믿음을 물려주고 있습니까?(눅 8.40-56)

20200503(양무리교회)

  

 

 

믿음을 물려주고 있습니까?

Luke. 8.40-56

 

    본문 관찰(5.21-43)

 

    하나님 예수님 회당장 (부모) - 자녀

   

 

믿음입니까?

 

누가복음 8장에 나오는 밀려들더라’(42b)와 네 종류의 밭 비유에 막았고’(7)의 헬라어가 같은 단어다. 그렇다면 생사를 오가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구원(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은 역설적이게도 밀려드는 사람들에 의해 문제가 생겼다: 사람들이 막았더라결국 그만 치료하러 가시는 예수님이 이처럼 사람들에 의해 막혀 버린 셈이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랑하는 딸을 향해 달려가는 야이로의 기대와 소망은 이처럼 처음부터 막혀 버렸다. 믿음으로 가는 길임에도 말이다. 예수님의 비유처럼이라면 회당장은 사람들에게 막혀’(14), 결과적으로 딸을 살리는 일을 결실 맺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동행해도 그 길이 막히고, 그러면 딸은 죽고, 이렇게 일은 일단락될 수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그만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일이, 곧 회당장의 12살 난 딸이 죽고 말았다.

이처럼 끝나 버렸다. 그랬음에도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전혀 다른 희망을 요청하신다. 예수님은 여기서 회당장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신다. 그게 무엇인가. 바로 믿음이다. 그렇다면 밀려드는 것에 막혀 결실치 못하는 된, 그래서 이미 죽어버린 딸을 살리는 열쇠가 무엇이라는 뜻인가. 다름 아닌 믿음이다. 이렇듯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에게 바로 그 믿음을, 지금 죽음까지 막아서서 끝나버린 이 일을 역시 믿음으로 다시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회당장 야이로, 그는 한 딸의 아버지다.

 

아버지로서의 고통과 절망은 무엇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무엇보다도 자녀의 문제는 부모의 모든 한계를 뛰어넘게 만든다.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딸을 구원하실 것을 믿었고, 그랬기에 바로 그것을 주님께 간구했었다. 하지만 고치기 위해 가는 길에 그만 자기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달받은 아버지 회당장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딸은 죽고 이제 모든 일은 끝났다.

그런데 주님은 이때 매우 놀랄만한 말씀을 딸의 아버지인 회당장 야이로에게 하신다. 죽었다는데 믿으라 하신다. 도대체 무엇을 믿으라는 것인가. 죽었다면 상황 끝인데 놀랍지 않은가. 여기서 또 하나 더 놀라운 것은 죽은 딸의 아버지 백부장 야이로의 언행 즉 태도다. 백부장 역시 딸이 죽었으나 주님의 말씀대로 믿고 장례식장으로 변해버린 집으로 간다. 그럼 이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말씀처럼 믿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 아닌가.

주님과 제자들, 그리고 회당장이 죽은 딸이 누워있는 집에 도착했다. ,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달리다굼!’(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는 것으로부터 기적으로 넘어간다. 보이지 않는 믿음이 보이는 것으로, 그러니까 살아있는 딸로 나타났다.

기적은 이미 죽었기에 장례식을 하고 있는 곳에서, 하지만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는 말을 비웃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난다. 사실 죽은 소녀는 자신이 살아나는 것을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 ‘살려달라라고 주님께 요청한 것도 아니고, 주님이 달리다굼하실 때 그 말씀을 알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할 형편도 아니다. 야이로의 딸은 이미 죽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다시 살아난 것은 이미 죽어 있는 자신과는 무관하다. 그럼 무엇인가. 아버지 회당장의 믿음과, 무엇보다 전적인 주님의 은혜다.

여기에 아버지의 믿음이 자리한다. 마침내 아버지의 역할이 빛난다. 아버지의 믿음은 딸을 다시 살리는 통로가 되었고, 이 믿음이 흔들리거나 약해지지 않도록 주님의 격려가 있었다. 도대체 믿음이 뭐지? 뭐 대단한 게 없다. 그냥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끝까지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게 믿음이다.

   

 

12살 딸의 아버지, 믿음의 다리를 잇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 믿음이라는 선물은 단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이처럼 나 한 사람을 넘어 가족공동체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 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오늘 묵상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12살짜리까지 피어나다가 그만 꺾여버렸던 한 딸을 다시 회당장인 아버지가 다시 살린다. 무엇으로 인가? 믿음이다.

하지만 믿음으로 행하고 있음에도 위기다. 따라서 오늘 이야기는 이처럼 끝나버릴 수도 있어서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선생을 더 괴롭게 해드릴 일이 있겠습니까?”(49b) 믿음의 위기다.

그럼 이렇게 끝인가. 그런데 회당장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 집에서 온 하인들이 전한 딸의 죽음의 소식을 함께 전해 들은 모든 사람들과 다르게 움직이는 분이 계시다.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나버린 딸과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또 하나의 시작을 알리신다: “당황하지 말라. 나만 신뢰하여라. 그러면 다 잘될 것이다.”(50)

이 이야기를 보고 듣는 모두에게 일어나는 놀라는 질문들은 이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믿음이라고?’ 도대체 믿음이 무엇이지? 지금껏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도 본 적이 없지만 그것도 믿음이라는 게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한다고? 믿음이 뭐야? 믿음이 정말 밥 먹여 주나?”

그렇다. 이 믿음이 살린다. 그럼 믿음이 무엇인가? 예수님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신뢰하는 것이다. 다시 얘기하지만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이다. 바로 이 믿음이 이미 죽었으나 딸이 누워있는 곳으로 가는 ‘YES’라는 긍정의 순례를 멈추지 않게 한다. 회당장은 앞서 경험한 장애물에 오히려 이 막힘 때문에 딸이 죽었다.- 그만 넘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가. 믿음이 말이다.

이처럼 아버지의 이 믿음이 죽은 딸을 살리고, 그 믿음이 아버지에게서 자녀에게로 흘러가고 있다. 오늘 우리도 이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 믿음이 너를 살리고, 그리하여 나에게서 너에게로,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믿음이 이어지게 된다. 이게 믿음의 유산이다. 이게 믿음의 계승이다. 이게 믿음을 물려주는 것이다.

   

 

부스러기 묵상

 

믿음으로 보면 끝난 게 끝난 게 아니다.

믿음은 나 자신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믿음의 주인이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은 내가 만들어내는, 내가 내 안에서 자가발전시키는, 내가 내 의지와 확신과 집중력을 발휘해서 어떤 에너지로 만들어내는 그런 게 아니다. 믿음은 철저하게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 믿음의 주인이시고 또한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다. 이 믿음이 백부장에게서 보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이 믿음이 있는가.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타락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에덴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범죄하여 동산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아담을 찾아오신 하나님! 그분은 아버지다. 심판주가 아니다. 호통치고, 타락의 죄 값을 따지시고, 시작된 모든 관계와 인연의 끈을 끓으시는 비정하고 무시무시한 모습은 한 부분도 없다.

그분은 죄로 말미암아 부끄러운 나머지 나뭇잎으로 몸을 가린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만들어 오신 아버지다. 비록 속마음은 타들어 가고, 지난 밤 천국의 어전(御殿)에서 흐느끼시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오히려 상처 입은 아담을 치유하시기 위해 그를 찾아오시는 아버지의 모습, 이것이 창세기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되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허물과 죄로 죽은 아담의 후손인 우리를 왜 찾아오셨을까요. 죽었는데 말이다. 오늘 야이로의 딸처럼 이미 죽었지 않았는가. 같은 질문이다. 그런데 왜 죽은 딸이 누워있는 집으로 가시는가. 무슨 말인가. 왜 이미 죽은 아담인데 에덴을 찾아가셔서 그에게 가죽옷을 입히시는가. 이미 죽었는데 말이다. 동시에 왜 이미 죽은 우리를 찾아오시는가.

그럼 지금 하나님의 찾아오심, 즉 그분의 심방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아담아, 너 죽었지? 그래 나도 안다. 그런데 말이다, 너는 너의 죄로 죽어 끝이났지만 나는 여기서 에덴과 인류에 대한 나의 놀라운 계획을 멈추지 않을 것이란다. 무슨 말인지 아느냐? 나는 너를 꼭 살릴 거야. 이것이 가죽옷을 입히는 이유고, 이것이 여자의 후손(3.15)을 통해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할 이유다. 바로 이것이 아버지임에도 아들을 십자가의 죽음 앞으로 나아가게 한 사랑이야.”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죽었다고? 그래서 끝났다고? 너 정말 그리 생각하냐? 아니다. 난 다시 살릴 거야. 믿기만 하고 따라 오너라. 그렇다면 오늘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난 딸 이야기는 전혀 새로운 소식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된다. 살리시는 아버지 하나님처럼 예수님 또한 살리는 분이시다는 것을, 그러니까 백부장 아버지처럼 우리도 우리 자녀들을 살리라 하시는 거다. 그분은 죽음마저도 깨뜨리시며 죽음을 이기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오늘도 살리시는 일을 하시는 것 아닌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50)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자라는 것을 예수님 자신도 믿었다. 그러기에 죽은 회당장의 딸에게로 나아가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를 위해 죽으시지만 하나님은 다시 아들을 살리실 것을 또한 믿었다. 그러기에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신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 앞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신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에게도 오시는 것이다.

여기에는 회당장 뿐만 아니라 우리를 향해서도 말씀하시는 게 있다.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십자가로 가는 일을 멈추지 않듯이 회당장 너도 나를 믿으라! 나를 신뢰하고 따라오너라. 이게 믿음이다! 그러니까 너도 백부장 아버지처럼 너희 자녀들에게 믿음으로 나아가거라.’

그렇다. 이 믿음이 있어야 우리도 자녀에게 말할 수 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아버지/어머니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으로 지금 여기까지 달려온 것을 지금까지 보았지! 그러면 너도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그러니 믿음으로 가족에게 보여주며 살아야- 믿음의 여정을 중단하지 말고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믿음을 지키거라!’

우리는 믿음 끝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본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며 걸어가는 인생의 여정 그 끝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그게 믿음이다.

우리 부모는 믿음의 다리를 놓는 사람들이다. 이 다리를 우리 후손들이 건널 것이다. 이것이 대()를 이어 계승하고, 상속하고, 물려주어야 믿음의 유산이다. 그러려면 이 믿음이 먼저 우리 부모에게 있어야 한다. 백부장처럼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도 살고, 가족도 살고, 가정도 살고, 교회도 산다.

 

이 믿음이 있습니까?

이 믿음을 물려주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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