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당신을 부르신다(눅 5.1-11).

20210112(묵상)

   

 

 

주님은 당신을 부르신다.

Luke. 5.1-11

  

    본문 관찰

 

     1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3 예수께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5 말씀에 의지하여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10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예수를 좇으니라

   

 

말씀이 답()이다.

 

호숫가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고기잡이 배들과 어부들, 그것도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실의에 빠진 어부들, 저 쪽에서 낚시질에 여념이 없는 강태공들, 갈매기와 그 울음소리, 구름, 바람, 파도, 멀리서 들려오는 강아지 울음소리, 물놀이를 즐기는 일단의 무리들로 뒤 섞여 있는 전형적인 호숫가를 말이다. 이것이 주님이 오시기 전 사람들로 가득한 게네사렛이라는 세상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게네사렛에 주님이 오셨다. 말씀으로 오셨다.

   

 

1. “무리가 옹위(擁衛)하여 들을새”(1)

 

얼마 전 유대인은 예수님을 배척했었다(4.14-15 28-29 31 37/43-44 5.1- ). 하지만 주님은 다시 호숫가로 저들을 찾아오셨다. 그런데 게네사렛 사람들은 나 홀로 집에살던 모든 옛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서서히 예수 그리스도 앞에로 나아온다. 두 부류의 사람들을 만난다. 지금 주님 곁에 있는 무리들, 그들은 왜 옹위했을까? 예수님의 옷을 구경하려고? 호기심에? 뭔가 얻어 먹으려고?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몰려들었다.

갈릴리에서 게네사렛(호숫가)으로, 그리고 주님의 시선과 관심은 서서히 좁혀지고 있다. 베드로는 장모의 열병 치유라는 기적(은혜)의 체험을 들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무리가 아닌 자로 주님 곁에 머물러 있다. 1절의 무리와 당신은 같은 마음인가, 아닌가?

   

 

2. 어부들은 여전히 그물을 씻고 있다(2-3a).

 

무리와 어부들로 나누어진 호숫가를 보라. 그럼에도 배와 어부들이 어떻게 예수님과 만남이 이루어지는가를 잘 살펴보자. 주님은 그 배를 보셨다. 평범했다. 그냥 지나쳐 버려도 하등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 일단 들어오자 그것은 전혀 새로운 용도로 쓰임을 받는다. 고기를 잡던 배가 강대상이 되었다. 마침내 강변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그 누구도 그 배가 강대상으로 쓰일 것이라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했다. 내가 그랬다. 하지만 주님은 무리를 청중으로, 베드로의 배를 강단 삼아 하늘 메시지를 증거하신다.

주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셨다. 주님은 시몬의 배에 오르셨고, 시몬은 회중이 되어서 예수님 앞에 앉아 있다. 그는 그물만 씻어 놓고, 또 배를 정박해 두고서 돌아갈 수 없었다. 주님이 노린 부분은 바로 이것이었다. 예수님의 목표는 베드로를 만나는 것이다. 만남은 이처럼 시작된다.

말씀 앞에 모인 무리와 구별된, 그들과 동떨어진, 여전히 고기잡는 그물을 씻고 있는 어부들이 있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인생들의 모습이다. 한 쪽에서는 놀라운 천국 복음이 전해지고 있으나, 다른 한 쪽에서는 육신의 일에 바쁜 인생들이 있다. 세상에는 언제나 이러한 두 종류의 사람들이 공존한다. 노아와 롯의 때에도 그러했고(17.26-29), 재림 때까지 그럴 것이다(30-35).

베드로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다. 어떤 인생도 스스로 깨닫고, 소위 구원을 자생적으로 파악하고 득도(得道) 해서 예수님 앞으로 나아 오거나, 진리를 선택하게 되는 그런 방식은 성경에 없다. 오늘도 죄를 좇아 살아가는 냄새나는 베드로(‘’)를 우리 주님이 친히 찾아 오셨다.

   

 

3. 주님은 말씀으로 무리를 가르치시다(3b-4a).

 

말씀 안에서의 만남이 시작된다. 오로지 말씀을 증거 하시기 위해서 배에 오른 것이다. “말씀을 마치시고”(4), 이렇듯 말씀을 먼저 가르치셨다. 말씀이 마쳐지기 전에 고기를 잡으라!”사명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대단히 중요한 통찰이다. 말씀 보다 앞서려고 하는 것은 불신앙이요, 교만이다. 자기 힘으로 뭘 해 보겠다는 것만큼 하나님의 역사를 더디게 하는 것은 없다.

많은 사람들은 말씀이 마쳐지기 전에 행동하기를 원하고, 또한 그 전에 일하려고 한다. 그러나 말씀이 끝나기 전에는 일어나지 말라! 급하게 먹으면 체()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 모세의 모습이 그러했다(2.11- ).

주님은 말씀 전()에 그 어떠한 인생도 세우시지 않았다. 말씀 없이 행동하려고 하지 말라! 말씀이 마쳐져야 한다. 나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을 조용히 기다리라! 그것이 차기까지 겸손히 주님의 무릎 앞에 엎드리라! 말씀이 좌하면 좌하고, 우하면 우한다. 멈추면 함께 멈춘다. 말씀이 말하면 말하고 말하지 않으면 역시 말하지 않는다. 말씀보다 앞서면 교만이다. 잘못이다.

 

 

고기를 잡으라!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4)

베드로의 첫 번째 사명은 말씀을 마치시고 주신다. 우리에게 먼저 있어야 할 것은 말씀이다. 본문의 전환점은 이것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먼저 있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다. 그리고 그 말씀이 과연 어떤 역사를 이루는가를 베드로로 하여금 체험할 기회를 주신다. 이것 역시 말씀으로 주어진다. 주님이 고기를 잡아 베드로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선() 말씀, () 사명이다. 말씀이 임하지 않으면, 말씀이 나를 사로잡지 않으면 우리는 사명자가 될 수 없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1. 베드로의 첫 번째 신앙고백이다(5).

 

말씀과의 만남은 순종을 낳았고, 이어서 자신의 모습, 즉 순종의 결과를 그대로 보도록 이끈다. 말씀 없이 살았던 지난 날의 첫 번째 실상이다: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인생 수고의 헛됨을 본다. 베드로의 경험, 지식, (), 잔뼈가 굵은 경력, 바람과 물과 구름과 갈매기와 파도만 보아도 고기 잡는 것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인생 70년을 시간으로 계산해 보자. 613,200시간이다. 한 노인이 자신의 70년을 다음과 같이 계산해 보았다(“X세대 예수세대”, pp.42-43).

 

    *수면: 23                     *: 11                 *오락: 8

    *식사: 5                      *옷 입는 시간: 5       *교육받는 시간: 3

    *독서: 2                      *대화: 3                 *약속 기다리는 시간: 2

    *화장: 16개월              *코 푸는 시간: 80      *머리-수염깍기: 228

    *자녀교육 및 훈계: 218   *주님을 섬긴 시간: 6개월

 

말씀 없이 살아왔던 지난 날의 두 번째 실상이다: “얻은 것이 없지만은.” 그러나 절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베드로의 말투가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보라. ‘얻은 것이 없으니 헛일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왜 그런가?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에디슨은 전등을 변명하기까지 수천 번 실패했다. 바로 그 베드로를 찾아 오셨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주님은 찾아오신다. 믿는가? ‘육의 양식은 계속 잡아야 한다. 늘 부족하니까. 끝없는 인생길이다. 육신의 욕망은 결코 만족함이 없다. 마치 브레이크 없는 벤츠와 같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밤이 맞도록 수고할 때 의지했던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한 포기(항복)선언이다. 생각해 보자. 아직도 이 땅의 것을 붙잡고 있는가? 베드로의 이러한 고백은 말씀을 듣고 변화되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것도 말씀과의 첫번 만남이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훈련시키는 것처럼 우리는 오직 말씀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 어린 독수리의 보금자리를 무너뜨리듯 베드로의 모든 것을 흔들어 버리시고 오직 말씀앞에 복종케 하셨다. 당신은 어떠한가? ‘말씀을 의지하여살아가는가? 말씀이 중심인가? 아니면 말씀(그리스도)은 변두리인가? ‘펌프질 신앙이 요구된다. ‘한 번 더시도하라!

   

 

2. 말씀대로 순종한 결과는 무엇인가?(6-7)

 

말씀은 능력이다. 말씀대로 그물을 내린즉 고기가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고, 다른 두 배에 채우매 잠기에 되었다. 말씀은 기적을 낳는다. 말씀은 이처럼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삼켜 버린다. 말씀이 가는 곳에 기적이 일어난다. 놀라운 역사를 보라. 베드로의 초라함과 예수님의 위대함이 교차한다. -“예수 안에 좋은 일이 있다!” 분명 우리 역시 말씀에 순종한 결과가 보여주는 것들을 얻게 된다. 이것은 가치 없는 게 아니다.

   

 

축복 이후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7절로 끝난다.

주님은 언젠가 10명의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적이 있었다(17.11-19). 그런데 그 이후를 살펴보면 9명은 눈 뜬 이후가 없다. 기적(축복)으로 끝이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만이 그 은혜를 기억하고 주님께 나아왔다. 이것이 오늘 베드로에게서 발견되는 부분이다. 베드로의 두번째 신앙고백이다(8-10a). 고기를 잡은 이후의 베드로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깊이를 만나게 된다. 더 큰 은혜를 받는 비결은 이것이다. 축복 이후, 바로 이 부분을 잘 관리하는 사람이 계속해서 복된 삶을 살 수 있다. “일찍 핀 꽃은 일찍 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1. “이를 보고

 

그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두 배에 채우며 잠기게 된 풍성한 축복(고기)? 결국 그것만을 보고 있다는 말인가? 정말 그런가? 눈이라고 다 눈이 아니다. 세상만을 보는 눈, 있다가 없어질 것만을 따라가는 눈, 죄만을 향해 나아가는 눈이 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주님이 보였다. 신령한 세계가 보였다. 그는 단지 고기만을 본 사람과는 달랐다. 이것이 핵심이다.

그는 먼저 자신의 무지를 본다. 자기 지혜, 지식, 경험, 관록의 무상함을 본다. 그것은 생명이 없는 죽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자신이 얼마나 죄인임을 볼 수 없다. 모두들 두 배의 축복을 보고서 기뻐하고 있을 때 베드로는 전혀 다른 것을 보았다. 당신은 은혜 받은 이후에 무엇을 보는가?

동시에 말씀의 실체를 보고 있다. 보이는 말씀, 확증된 말씀의 살아있음을 본다. 그는 주님의 능력을 본다. 이는 모세와 다윗이 의지했던 것이기도 하다. 신령한 눈이 열려야 한다: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119.18) 이와같이 나를 보고, 너를 보고, 세상을 보고, 교회를 보고, 말씀을 보고, 주님을 볼 수 있는 축복을 간구하라.

순종의 결과를 보고 있다. 베드로는 단순히 포장지(껍질)만을 보지 않았다. 그는 내용을 보았고, 본질을 보았다. 그는 고기(축복), 또한 그것의 현상만을 본 것이 아니라 그 고기 속에 역사하신 예수님을 보았다. 죽어 있는, 생명 없는, 능력 없는,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는 이름뿐인 돌부처가 아니라 살아 있어 역사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을 베드로는 보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라. 세계를 가슴에 품으라. 신령한 성령의 세계를 보라. 이를 위해 기도하라. 미국의 흑인들을 깨운 킹(Martin Luther King, 1929-68) 목사는 흑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꿈을 보았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한국교회 역시 전쟁 이후 5-60년대의 가난한 시대를 지나면서도 세계선교와 민족복음화의 꿈이 있었다. 하나님은 그 꿈대로 한국과 한국교회를 축복하셨다. 하나님이 한국교회를 통해 이루신 그 꿈을 보았다.

 

 

2.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

 

경배: 진정한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 당신은 누구의 무릎 앞에 엎드립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경배(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은혜 받은 사람은 찬양하는 사람이다. 바울의 빌립보 감옥이 그러했고, 다니엘의 사자굴이 그러했다.

낮아짐: (servant)으로서의 자기비하다. 은혜 받은 사람은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높인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쓰신다. 더 많은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은 더 낮아지는 것이다.

항복: 철저한 저기부정(포기)이다. 은혜 받은 사람은 영적인 권위와 질서를 지킨다.

자신을 발견(identity): (Lord)와 종(servant)의 관계의 표현이다. 이제부터는 전혀 새로운 인격적인 만남’, 즉 관계의 회복을 바라는 철저한 항복선언이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다.

 

 

3.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자만이 이처럼 고백할 수 있다. 이것이 은혜(축복) 받은 사람의 세번째 모습이다. 그런데 과연 6-7절의 축복(성공, 횡재)을 이루게 하신 분을 떠나라고 간구할 수 있을까? 보통은 ! 드디어 을 만났다. ‘너는 봉이야!’ 우리 동업(同業)합시다!”라고 끈질기게 매달릴 것이다. 상식적으로 볼 때 축복을 주신 주님이 떠나면 안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놀라운 것은 이 부분이다. 많은 사람이 거기서 끝난다. 7절이 정상이자 끝이다. 그 다음 이야기가 없다. 마치 9명의 소경처럼 말이다.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한 게 고작 고기잡는 것이었을 때 그렇다. 그러니 7절 이후가 없다.

하지만 놀랍게도 베드로는 달랐다. 베드로는 자신의 죄를 회개한다. 당신은 지금 받은 은혜의 충성함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 혹시 욕심쟁이가 아닌가? “더 더 더!”라고 아우성이 아닌가? 그러나 베드로는 그러지 않았다. “축복에만, 즉 잡지 못했던 고기만을 얻어 보려고 했던 욕망을 회개합니다. 풍성한 축복 앞에 나의 죄악을 보나이다.” 신앙은 이처럼 자신이 죄인임을 보도록 한다. 그것도 축복을 받았을 때 를 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처럼 은혜는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복을 받기에는 부족한 사람인가를 아는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받은 사람은 이렇게 고백한다: “주여, 나는 감당할 수 없나이다!” 그 사람의 입술은 그가 받은 은혜를 알 수 있도록 한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게 한다. 시편 기자의 고백을 보라: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8.4-5).

은혜 받은 사람은 눈물이 있다. 주의 이름만을 불러도 눈물이 있다. 눈물이 있는 사람, 이웃을 가슴에 품고 통곡할 수 있는 사람, 불신 영혼을 보며,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 -“인애하신 구세주여”(찬송가 337)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나님은 8절의 사람을 쓰신다.

말씀은 사명으로 열매 맺는다. 게네사렛은 마침내 깨어난다. 이제까지는 그물과 배와 고기만이 전부였던 게네사렛! 그러나 말씀의 씨앗이 떨어지더니 베드로라는 열매를 맺게 된다. 이제 베드로는 한 알의 밀알처럼 부르심을 받는다. 이처럼 강변이 하나의 교회가 된다.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여 하나님의 기적을 이루는 곳, 그곳이 바로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가 아닌가. 날마다 8절 앞으로 먼저 나아가라. 그리하면 하나님은 당신을 10절 앞에 세우실 것이다. 나는 8절을 했을 뿐인데 하나님은 10절을 주신다.

   

 

1. 위대한 사명(10)

 

강변교회의 아름다움을 보라. 위대한 사명은 위대한 신앙고백을 통해서 주어진다. 하나님은 8절 없는 사람을 쓰시지 않는다. 위대한 사명을 기대하는가? 먼저 8절 앞에 서라. 그러면 주님이 이처럼 응답하실 것이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고기잡이에서 복음잡이로의 부르심이다. ‘이제 후로는에서 베드로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생활을 느끼게 된다. 과거와 단절된, 말씀 없이 살던 때와는 다른, 마침내 주님과 함께 시작되는 제자로서의 새생활이 시작될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복음 안에서의 헌신을 강하게 요구하고 계신다. ‘이제 후로는에서 이제 후는 어떤 것인가? 베드로의 일생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21.18-19)

 

어떤 사람에게 사명이 주어지는가? 사명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어떤 점을 보시고 그에게 위대한 사명의 축복을 주셨을까요? 말씀을 들었다. 말씀대로 순종했다. 말씀이 이룬 결과를 보고 자신은 이 복을 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한 신앙고백을 축복하신다.

   

 

2. 사명자의 자세(11)

 

오직 예수! 밤이 맞도록 잡고자 했던 고기, 그리고 배, 그물, 가정(아내, 4:38), 자신의 전부를 -경험, 지식, 물질, 두 배에 가득찬 고기, 고향, 신분, 등등- 완전히 버린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모든 것을 버리면 모든 것을 얻는다. 이것이 영적 자유를 누리는 길이다.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던 자리에서 일어나 오직 예수님만이 자기를 지배하도록, 주인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제자의 각오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9.23-24)

당신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을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당신에게도 1-8절의 역사가 있기를 기도하라. 주님의 약속이 있다.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핍박의 길은 부활의 아침을 여는 열쇠이다. 십자가 없이 부활의 영광은 있을 수 없다. 성경은 단순히 우리가 잘 되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요셉이 옥에 갇히고, 스데반과 바울이 순교를 당한다. 이 약속은 금생과 내생 모두를 포괄한다. 우리는 오늘 베드로에게서 이 말씀의 실재를 보게 된다. 주님은 당신을 이처럼 부르고 계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10.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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