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색깔의 영성(눅 8.4-15)

20210122b(묵상)

  

 

 

네 가지 색깔의 영성

Luke. 8.4-15

 

 

    본문 관찰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4)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9)

    길가에(5,12)

    바위 위에(6,13)

    가시떨기 속에(7,14)

    좋은 땅에(8,15)

  

 

씨앗 때문인가? 밭 때문인가?

 

말씀이라는 씨앗을 뿌리는 밭은 어디인가.

모든 씨는 밭에 뿌리지만 말씀은 오직 인간의 마음에 뿌린다. , 말씀이라는 씨앗을 뿌리는 밭은 인간 심성이라는 마음의 밭이다. 주님의 해석에서도 이는 분명하다(11-15). 주님은 44색의 인간 마음의 심성을 매주 적절한 비유에 담아 깨우치신다. 44색의 영성, 이게 씨앗의 문제인지 밭의 문제인지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 마음이라는 네 종류의 밭

마음밭에 뿌려진 씨앗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함이라.”

 

왜 똑같이 말씀을 듣는데 이러한 다른 결과가 발생할까. 매우 중요한 사실은 네 종류의 밭 모두가 다 말씀을 들었다는 사실이다(12,13,14,15): “말씀을 들은 자니 말씀을 들 때에 말씀을 들은 자이나 말씀을 듣고 .” 어떤 밭은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어져서 처음부터 말씀이라는 씨앗을 뿌리는 일에 제외된 것이 아니다.

각각의 밭은 말씀이라는 씨앗을 뿌렸는데 결과가 다르게 나타났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한다. 그럼 중요한 것은 왜 이렇게 다른 결과가 나왔는가 하는 점이다. 같이 뿌렸는데,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똑같이 천국의 복음을 전하시는데도 왜 그 결과는 다르게 나타나는가.

 

길가에(5,12)

 

마귀가 늘 마음에 뿌리운 말씀이라는 씨앗을 빼앗는다. 마음이 길가와 같아서 씨앗을 받아 품을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처럼 말씀 따로, 밭 따로”, 이렇게 살아간다. 전혀 이 둘이 어우러질 줄 모른다. 미물에 불과한 새들도 자기에게 유익한 것인 줄 아는데 하물며 말씀을 뿌림 받은 사람은 그것이 생명이고 밭이 밭 되게 되는 축복의 씨앗인줄조차 깨닫지 못한다.

밭으로서의 생명을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 되어 버렸기에 밭을 살리는 씨앗이 뿌려지고 있음에도, 말씀이 그 밭을 살리겠다고 찾아왔음에도 마귀(‘악한 자’)에게 그만 이 씨앗을 빼앗겨 버리고 만다. 혹 내 마음 밭에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서 이리저리 뒹구는 씨앗들은 없는지 모르겠다. 내게 필요해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나를 찾아와 주셨음에도 내 취향에 맞지 않다고, 나는 그런 씨앗의 열매를 원치 않는다고 내 마음대로 방치해 둔 천국 씨앗은 없는지 갑자기 머리가 바빠진다.

 

바위 위에(6,13)

 

씨앗을 품을 만한 밭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흙이 얇고 깊지 않다(5). 때문에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 꿈을 펼칠 수가 없다(6). 이 밭의 특징은 기쁨으로 받으나 잠깐 믿다가로 요약된다. 시작은 되는 것 같은데 언제나 그것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그에 따른 결과가 없다. 왜냐하면 뿌리가 없어”(13) 그렇다. 말씀이라는 씨앗이 뿌리를 내리지도 못할 정도로 문제는 늘 밭에 있다.

기쁨으로 말씀을 받는 것은 좋다. 하지만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기까지 그것을 붙들고 있을 만큼 준비되어 있지 못했다. 그래서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13)고 만다. 말씀은 뿌려졌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한송이 국화꽃도 가을에 피려면 봄부터 소쩍새가 울어야 하고 무수한 비바람이 몰아쳐야 한다면, 하물며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것은 얼마나 많은 시련과 고통을 통과해야 하겠는가.

말씀을 듣고 즉시 기뻐하는 밭에게도 환난과 핍박은 있다. 이렇듯 말씀을 들었다는 것이 모든 어려움을 면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말씀의 씨앗이 뿌리내리는 것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로부터 넘어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관리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아야 한다.

 

가시떨기 속에(7,14)

 

말씀이 자라는 것은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이라는 가시가 함께 자라는 곳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때문에 이것들이 호시탐탐 말씀의 기운을 가로막는다. 돌밭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13)라면 가시떨기밭은 세상이라는 기운에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14) 경우다.

세상은 언제나 말씀을 들은 자의 마음의 뜰에 말씀이 뿌리내려 자라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잠시 있다 없어질 가시덤불과 같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좇도록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한다. 어느 때나 세상이 복음을 환영한 적이 있는가. 말씀이 자라듯 그것을 방해하는 가시도 함께 자란다(7). 그리고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의 기운에 막혀 말씀이 결실치 못하도록 만든다. 이것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무서운 힘이다.

 

좋은 땅에(8,15)

 

앞의 세 종류의 밭과 좋은 땅은 모두가 다 말씀을 들었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그런데 좋은 땅은 말씀을 듣는 것에서 깨닫는것으로 나아갔다.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듣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듣는 것과 그 다음이 합력하지 못한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땅은 깨달은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기까지 지켰다. 그 과정에서 마귀가 빼앗아 가는 것이나(12), 시련이나(13),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14)이라는 갖은 방해로부터 인내라는 수고가 있었다.

결실이란 그저 심었다고 해서 때가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씨를 뿌리는 이가 하나님이시기에, 시작하신 아버지께서 끝까지 이루실 줄을 들은 바 말씀을 통해서 믿고, 그래서 그것만큼 인내로 주의 섭리를 바라볼 수 있다면 결실하는 기쁨에의 꿈은 현실이 된다. 얼른 생각해 봐도 넷을 뿌렸는데 셋은 없어지고 하나만 남았으니 실패처럼 보인다. 그러나 넷 중 하나가 30, 60, 100배의 결실을 낸다. 이게 천국의 법칙이다.

 

 

부스러기 묵상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6.7b-9)

 

마침내 천국의 비밀은 너희다른 사람’(그들)으로 양분된다(10).

세상은 이처럼 크게는 두 종류의 인생밭으로 양분되어 있다. 주님은 이를 보셨다. 그럼에도 저들이 최후심판 때에 항의할 수 없는 것은 모든 인간의 마음에 천국 씨앗인 복음을 뿌리셨기 때문이다. 그 씨가 결실치 못한 것은 씨앗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은 밭의 문제였다(9-15). 천국을 이루는 것을 방해하는 악한 자, 환난이나 핍박,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결국 문제는 이것들이었다. 천국은 이것들과 매우 깊은 긴장 관계에 있다.

내 인생이라는 마음밭을 생각해 본다. 나는 어떤 밭인가. 나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나로 하여금 열매 맺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지금 정확하게 보고 있는가. 열매를 풍성하게 맺기 위해 나는 내 밭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씨앗타령이나 하고 있는 무능하고 무지하고 무기력한 밭은 아닌가.

내 마음은 이미 길가처럼 굳어져 버린, 말씀이 심겨지지도 않을 만큼 척박(瘠薄)한 박토(薄土)가 되어버린 지 오래인, 그래서 뿌려도 뿌려도 튕겨나가는 그런 밭은 아닌지 겁난다(12).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 싹이 났으나 시련을 당할 때에 그것이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통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13). 자라기는 하는 것 같은데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의 유혹이라는 가시가 더 잘 자라서 말씀을 막아버림으로써 결실치 못하는 것은 아닌지(14).

생각해 보면 60년 가까이 묵은 땅이 되어 버렸다. 지금도 뿌려야 할 씨는 있고, 싹이 나 자라고 있고, 이미 조그마한 열매를 맺은 것도 있고, 이제 곧 열매를 맺을 것도 있고, 어떤 열매를 맺게 하실까를 기대하며 바라보는 것도 있고, 종종 내 불찰과 무능력함 때문에 잃어버린 것들도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지난 53년 동안이나 말씀의 씨앗을 내 심령에 뿌려주셨다.

주님은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으시다. 하지만 나는 늘 초라하고 볼품없는 밭에 불과하다. 내가 생각해도 한심한 밭인데도 주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금년에도 그대로 두셨으며, 묵은 것이 아닌 또 다시 새로운 씨앗을 뿌려주셨다. 이제는 내 힘과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음도 조금은 알 것 같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필요하고, 주의 보혈의 피가 내 마음의 밭을 적셔야 하고, 하나님이 늘 주시는 공기와 햇빛과 비를 받아야 하고, 내 몸을 산 제물로 드려 주님의 영광이라는 결실을 맺어야 할 때도 되었다. 이렇게 살자! 언제까지나 황량한 들녘을 바라보고만 있을 순 없는 일 아닌가.

나무에 가위질을 하는 것은 나무를 사랑하는 것이다. 미물에 불과한 이름 없는 둘국화도 가을에 피려면 봄부터 소쩍새가 울어야 한다. 그리고 여름이라는 태풍과 모진 비바람을 견디고 이겨내야 한다. 하물며 사람이랴! 아픈 만큼 성숙하는 것이다. 나무가 나무 되려면 가위질을 아껴서는 안 된다. 사랑하고 축복하기에 가위질을 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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