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눅 18.9-17)

20210314b(묵상)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Luke. 18.9-17

  

    본문 관찰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9-14)

       바리새인의 기도(10-12)

       세리의 기도(13)

       주님의 시각(14)

    어린아이 메시지(15-17)

   

 

바리새인 vs 세리

 

자기 의()가 기도에까지 영향력을 마친다는 게 흥미롭다.

하나님께 기도할 정도의 삶을 살아가는 자에게 주께서 가장 싫어하는, 그러니까 여전히 복음이 아닌 기준을 따르며 살 수 있다는 것,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말씀을 하시는 시점이 공생애가 거의 마무리 되고 있는 때가 아닌가. 주님은 삶의 시각(기준)을 두 사람의 대조를 통해 자연스럽게 깨우치신다. 그리고 중간광고처럼 어린아이 하나가 무대 앞을 지나간다. 이처럼 세 사람은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메시지의 중요한 예화들이었다. 오늘 나는 주님께 어떤 도구로 쓰임을 받을지, 먼저 저들에게 나를 비추어 본다.

   

 

자기 의()만 있고, 까불래!(9-14)

 

먼저 두 사람이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메시지의 도구(예화)가 된다. 그리고 소제는 기도다. 주께서 이 두 사람을 통해서 이끌어내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9) 자신의 기도를 점검해 봄으로써 얼마나 그가 하나님의 기준을 떠나 있는 사람인가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하나를 보면 모두를 알 수 있듯이 그 사람의 기도를 보면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 자인가가 드러난다는 주님의 충고가 내 마음을 향해 날아든다.

 

바리새인의 기도(10-12)

 

       “나는 아니하고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하고 드리나이다!”

 

바리새인은 감사할 충분한 이유들을 따라 살았던 매우 도덕적이며 신앙적인 삶을 추구했던 것 같다. 아니하고 하고에서처럼 감사의 이유가 있었으며, 헌신에도 탁월했다. 즉 사람과의 사이에서도(11),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12), 그러니까 결국 바리새인은 십계명(율법)을 따라 바르고 다르게살았던 사람이다.

결국 율법의 의()와 자신의 의()의 간격을 가능한 한 좁히며 살았다. 이것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났느냐면 일단 서서 따로기도한다. 이것은 이어지는 세리의 기도와 모습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그는 누가 뭐래도 이처럼 언행(言行)할 만큼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최소한 9절과 14절의 기준이 없었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 본문의 갈등은 이것이다. 내가 과연 바리새인을 비난할 수 있는가. 그러는 순간 나 역시 바리새인이 되는 것이기에 그렇다. 소위 이 사람은 자존감(自存感)이 높았다. 그런데 그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에게도 당당했고 늘 옳은 삶을 살았음을 주저하지 않고 말한다.

하지만 주님은 이 사람을 향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9), 동시에 자기를 높이는 자’(14b)라 하신다. 자기 의를 심어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으로 자기를 높이는 열매를 맺는, 다른 사람들을 밟고 그 위에 올라가는, 이렇듯 오직 자기 자기만으로 똘똘 뭉쳐 있다.

문제는 그가 주님 앞에서는 낮아지게 될 사람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자기 의가 높고 깊은들 그것이 주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님을 흠 잡을 데 없던 바리새인은 미처 이를 알지 못했다. 결국 영적(靈的) 무지가 자기 의가 되어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자랐으니 결론이 이 모양 요 꼴이었다 싶다. 자신을 하나님에 비추어 보는 일에 실패하는 사람의 흉물스런 모습이 바리새인들의 내면세계가 아닌가.

 

세리의 기도(13)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한편 세리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성전에, 그것도 기도하기 위해 올라갔다. 어찌 보면 뻔뻔스러움이지 않나 싶을 정도다. 어찌 생각하면, 사람에게는 윤리적으로 지탄을 받고 살아도 하나님께만 인정을 받으면 된다는 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13a) 애통해 한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본다. 이 점이 바리새인과 구분되는 대목이다. 하나님 앞에 서 보니 초라하디 조라한 바싹 마른 몰골의 자신을 발견한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본 것이다. 사람과의 사이에서 나온 상대적 비교우위가 아닌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오는 절대적 기준 앞에 자신을 세우고, 그래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다.

이렇듯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에 비추어진 율법의 앵글을 통해 자신을 보았고, 세리는 하나님의 존전 앞에 서자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저울의 눈금에 턱없이 부족한가를 즉시로 발견한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믿고 다른 사람을 보기도 전에 자신을 본 순간 그만 그 자리에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깨닫는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b)

그는 성전에 올라갈 때부터, 그리고 기도자로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면서 자기를 낮추는 자로 변함없이 살아간다. 그랬더니 주님은 기도가 마쳐지자 세리를 가리켜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14a)고 격려와 아울려 축복과 회복의 은혜를 받아 삶의 자리로 내려간다.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할 때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멸시하지 않는다는 점을 깊이 생각해 봐야겠다.

   

 

어린아이 메시지(15-17)

 

어린아이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9)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4b)는 진리를 설명하는데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아이를 주님께로 데리고 오는 것을 보고서 이를 꾸짖는 제자들 역시 바리새인의 범주에 들어가는 우를 아직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깝다.

지금 주님은 생물학적으로 어린아이들을 들어 영적인 사람, 그것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을 설명하신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고 할 때, 이 경우 어린아이가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듯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지금 바리새인과 세리 중 누가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고 있는가(9-14). 누가 불의한 재판관 앞에 선 한 과부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1-8). 과연 누가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고 있는가(17.20-37). 어떤 사람이 열 문둥병자 중 한 사람처럼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 앞에 받은 바 은혜를 다시 돌려드리고 있는가(17.11-19).

   

 

부스러기 묵상

 

    “성전에 올라가니 집에 내려갔느니라.”(10-14)

 

주님, 나도 보고 계셨군요!”

성전에 올라가는 바리새인과 세리처럼 매우 종교적인 바로 그 나를 말이다. 아직은 구별되지 않는 겉모습, 그러나 속은 너무나 다른 것까지도 주님은 놓치시지 않고 보고 계시다는 생각이 내 영혼을 마구 흔들어 깨운다. 도적질하다 들킨 죄인처럼 나를 향한 시선을 멈추지 않으시는 주님의 눈과 내 눈에 서로 부딪힌다. 바리새인들을 정죄하기에도 뭐하고, 그렇다고 세리처럼 나의 죄를 인식하고 있다고 하기에도 뭔가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 있는 나를 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리새인에게처럼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11-13, 17.20b), 오히려 세리에게처럼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그러나 하나님만이 정확하게 보고 계셨듯이 세리와 같은 삶을 사는 자들 가운데 있다(14, 17.21).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내면세계 가운데 이뤄나가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만큼 그는 바리새인들처럼(11-13), 동시에 노아와 롯 시대의 사람들처럼 살아가게 된다(17.26-32).

나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바리새인과 세리처럼 주님에게 그대로 다 읽히고 있다는 생각, 다시금 기억해 본다. 주님은 나의 언행(言行)이 사람(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화려하고 그럴듯한가에 초점을 맞추고서 평가하시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나의 고백이 얼마나 하나님(사람) 앞에서 추하고 더러운, 그래서 부끄럽고 창피해서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통회하는 사람인가에 초점을 맞추신다.

인간이 의로운들 그 무게가 얼마나 나가겠으며, 인간이 하나님 앞에 당당할 수 있은들 그게 뭐 대단하겠으며, 인간이 아니하고 하고의 목록을 주께 꺼낸들 그게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데도 그 알량한 더럽고 추한 행위목록표를 하나님의 기준(표준) 앞에 꺼내들고 하나 둘 읊어대고 있으니 이게 꼴불견이 아니고 무엇이랴.

세리로 살면서 하나님의 전을 찾고, 그분 앞에 엎드려 기도할 수 있다는 것, 결코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도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고, 하나님 앞에 죄인이기에 죄 가운데 살아갈 수 밖에 없음을 인하여 가슴을 치며 통곡할 수 있다는 것, 예사롭지 않은 장면이다. 세리가 시작한 이 거룩에로의 몸부림이 나에게도 시작되고 이어지기를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엎드린다. 이 거대한 하나님의 나라의 행렬에 세리 뒤에 설 수 있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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