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와 빌립의 해답이 믿음임을 주님은 아신다(요 14.1-11).

20220401a(묵상)

  

 

 

도마와 빌립의 해답이 믿음임을 주님은 아신다.

Jn. 14.1-11

  

    본문 관찰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7).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8-11).

 

 

도마와 빌립

 

지금은후에는’(13.36)14장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차이가 14장에 근심이라는 파도로 밀려온다. 주님은 이를 직시하신다. 자칫 이것은 영적 침체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하지만 주님은 이것마저도 영적 파도타기로 이끄신다. 과연 주님은 뭔지 모르게 동요를 보이는 제자들, 그러면서 사뭇 비장한 언행으로 치닫는 제자들의 추임새(8,9,24,25,36,37)를 어떻게 반전시키실 지 궁금하다. 해답은 나를 믿으라!’(1)와 역시 나를 믿으라!’(11)는 주님의 샌드위치 말씀 사이에 풍성하게 숨 쉬고 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7)

 

주님은 다시 제자들을 당신의 가슴에 품으신다(1-4). 주님은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자리를 잡고 있음을 아셨다(1a). 제자들의 흔들림은 주님과 오고가는 13장의 대화에서 이미 감지되었다. 뭔가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제자들의 언행을 주님이 모르실 리 없다. 사랑과 섬김으로 제자들을 품으심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공백은 결정적 요인으로 파장을 일으킨다. 이처럼 제자들은 문제를 낳았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주님은 해결을 주도하신다. 그것은 믿음이다. 동시에 믿음의 대상을 밝히신다. 허공을 치는, 제자들 스스로 해법을 찾는,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식의 확률이 아니다. 바른 믿음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12.2a)님과 하나님 아버지를 대상으로 한다. 주님만이 마음의 근심으로부터 제자()를 지키시며 보호하신다. 그러기 때문에 근심하지 말라!” 명하신 것이다.

13장의 제자들이 근심 쪽으로 급류를 탈 것을 아신 것이다. 하지만 가노니’(2)로 끝난다면 제자들의 근심이 옳아 보인다. 그러나 다시 와서’(3) 베드로의 지금은’(13.36)을 주님의 후에는’(13.36)으로 바꾸실 것이기에, 그리하여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3b)이므로 근심이 설 자리는 없다. 주님은 지금 이것을 제자들로 하여금 믿으라하신다. 이로써 13장은 다시 믿음 쪽으로 반전된다. 주님이 하신 일이다. 제자들이 할 일이란 이 일을 말씀하고 이루시는 주님을 믿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복음은 이것이다. ‘지금은 = 가노니후에는 = 다시 와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점이다. 이를 제자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다. 사실 이러한 패턴은 13장에서 계속해서 반복되었었다(67, 88, 910, 3636, 3738).

그런데 도마는 이미 잊혀진 13장의 옛 구습을 14장에서 다시 쫓고자 한다(5). 도마의 질문(5)은 앞서 베드로의 질문(13.36)과 유사하다. 그렇게도 많은 주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말이다. 참으로 맥빠지는 일 아닌가. 도대체 도마의 문제는 무엇일까? 1절의 맥락에서 보자면 도마는 믿음이 아닌 근심 편이다. 도마는 주님이 부활하신 이후에도 의심이 많은 제자였다. 그는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에도 내가 그 손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0.25)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니 14장에서야 오죽하겠는가. 영적 무지를 시인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본심이 위장되었을 뿐인 불신이다. 그만큼 믿음 없음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믿음이 없으면 이처럼 뻔뻔해지는 걸까.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을 탓할 순 없지만 예수님께 3년이나 제자훈련을 받았고, 무수한 표적과 하늘 양식을 받아먹었음에도 말이다. 주께서 1-4절로 다시 말씀하고 계심에도 그는 요지부동(搖之不動)이다.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6-7절로 응답하신다. 그래서 희망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를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8-11)

 

그러자 이번에는 빌립이 등장한다. 그는 7절 말씀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다.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말한다(8). 주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는 말씀으로 빌립의 질문에 답을 하신다(9-11). 이것 역시 믿음으로 풀어야 할 숙제다: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10a)

그러니까 결국은 도마나 빌립이나 지금은이라는 주님과 함께함의 시간들을 근심으로 채우고 있고, 또 보여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주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계속해서 믿으라!’(11)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문제의 핵심은 다름 아닌 믿음이다. 한결같이 제자들은 이 문제 앞에 휘청거리고 있다.

 

 

부스러기 묵상

 

도마와 빌립만을 탓할 수 없다.

나를 저들의 뒤에 숨겨두고서 나는 그런 근심이나 의심, 그리고 불신이 없는 것처럼 행세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제자들을 정확하게 아시는 주께서 어찌 나를 모르시겠는가.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는 깊어지는 만큼 문제에 대한 해답이 주께로부터 온다. 제자들의 질문은 저들의 수준과 그에 따른 문제이기도 하지만 주님은 그걸 통해서 빛나는 진리를 토해내심으로서 제자들을 영적으로 먹이신다. 진정한 맨토는 이처럼 부정적인 환경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사람이다.

주님은 다시 한번(6번째다) “나는 이다.”(6)라는 신적 용법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다. 예수님이 유일한 길과 진리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더 이상 근심이 없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이르는 길이시며, 따라서 주님을 믿는 자에게 이 진리가 저를 자유케 할 것이다. 이것을 계속해서 믿으라말씀하신다.

믿음이 없거나 약하면 그래서 늘 딴소리를 하게 된다(5,8). 그리고 속사람은 언제나 근심 덩어리로 가득차 있다. 말씀을 듣고 있고, 제자도(13.34-35)를 전수 받고 있고, 무수한 표적과 이적을 보았으며 체험하고 있고, 불신앙의 계보에 속한 사람들과 그래도 다르게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의 자리와 어느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게 신기하지만 도마와 빌립을 보면서 이럴 수도 있구나 싶어진다.

지금 이게 옳다는 게 아니다. 이러고도 예수님을 가까이에 모시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 수 있는 게 신자의 이중성이라는 뜻이다. 입술에 신앙적인 진술이나 명제(문장, 5,8)가 있다고 해서 신앙이 깊은 것이 아님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여전히 내 영혼의 뜨락에도 근심이라는 잡초가 자라고 있음을 본다. 어찌할까. 주님은 이걸 보게 하셨고, 그래 내 심령의 밭에 믿음이라는 한 알의 겨자씨를 심으라 하신다. 이것만이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라, 진리라, 생명이라 거듭 당부하신다. 이 일을 이루시는 주님 자신을 믿으라!” 하신다. 주님께는 근심이 없다. 천국에도 근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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