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의 회복은 그 영광을 나타냄이다(요 2.1-11).

20220106(묵상)

 

 

 

잔치의 회복은 그 영광을 나타냄이다.

Jn. 2.1-11

 

    본문 관찰

 

    마리아 -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3)

    예수님 -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4)

    마리아 -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

    예수님 -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7)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8)

    연회장 -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10)

   

 

이 처음 표적(sign)

 

마침내 더 큰 일’(1.50b)이 시작되고 있다.

장차 보리라”(42,51)아직’(not yet) 미래인 주님의 약속은 이미’(already) 제자들의 눈 앞에서 실현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 것이자 천국이 가까이 온 것이다. 요한은 기적(이적)이라는 말 대신에 표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로써 11-18, 특히 14절의 실현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임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인들을 통해 -이 표적은 7개나 등장한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대상, 즉 사람들이 어떻게 믿음과 생명을 얻게 되는가를 보여준다(20.30-31).

그러니까 단순히 기적이다는 메시지뿐만 아니라 이 표적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래서 사람들이 얻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들이 바로 2031절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표적을 대하는 묵상 역시 이것을 통해서 주님께서 보여주고자 하시는 사인(sign)은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 표적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기쁨에서 절망으로(1-6)

 

사흘째 되던 날’(1a)에라는 문구는 2장이 1장과 연속적이라는 의미를 잇도록 만든다. 말하자면 151절이 2장에서 어떤 그림으로 그려질 것인가를 기대하게 한다. 혼인잔치에 예수님의 가족들과 제자들이 초청을 받았다(1-2). 유대 풍습에 따르면 잔치는 종종 1주일이나 진행되었다. 기쁨과 즐거움, 기대와 소망은 혼인잔치에 어울리는 단어들이다. 그런데 예기치 않았던 문제가 발생하였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3a) 뭐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 급박한 사건을 두고 가장 놀라고 당황한 사람들은 혼주측(婚主側)이었을 것 같다. 혼인과 잔치의 모든 이미지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잔치의 기쁨은 파장을 맞이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게 무엇을 말하려는 표적(sign)이냐는 점이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결과만이 아니다. 표적은 잔치에서 시작되고 있다. 특별히 포도주가 모자란 것과 표적은 긴장 속에서 만난다. 사실 첫 번 하나님이 에덴에서 시작하신 잔치는 아담이 은혜를 보존하는 것을 실패함으로써 그 을 잃어버렸다. 급기야 세상은 잔치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어두움 가운데 영생이라는 생명의 기쁨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마치 잔치에서 포도주가 모자란 경우에 비유된다. 이 잔치 역시 기쁨을 잃어버릴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쁨은 이미 그 안에 절망을 품고 있다. 문제는 이걸 아무도 모른다에 있다. 연회장도, 하객들도,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기쁨이 언제 슬픔으로 변할지 모든 사람들은 다 이 일에 대해서 무지하다. 그냥 잔치의 즐거움에 휘청거린다. 이것이 우리의 잔치가 갖는 한계다. 시작하다만 잔치처럼 금방 끝이 난다. 영원하지 않다. 이처럼 내 잔치의 기쁨은 끝날 때가 있다. 바로 지금이 기쁨이 바닥나고 있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가장 결정적일 때 무엇인가가 부족하다. 그렇다면 왜 내 잔치는 금방 끝이 나는가? 뭔가 모자란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 그게 뭘까? 나는 왜 잔치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슬픔으로 잔치와 점점 멀어져 와 버렸는가? 과연 이 어두움은 언제 끝날 것인가?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이 잔치에 예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마찬가지란 말인가?

잔치의 절망스러움이 공개적으로 드러난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3b) 이 절망의 파도는 쉽게 물러가지 않을 듯 보인다. 4절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대답에서 더욱 그렇다. 주님은 메시야됨이라는 영광의 표적(sign)을 나타낼 자신의 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씀한다. 그러니까 잔치의 모든 하객들은 이 표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뜻일 수도 있다. 아무 것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바로 이것이 5절이 갖는 긴장이다. 오직 한 사람, 마리아만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잃어버린 기쁨을 회복하는 일, 이 일의 표적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고 있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의 기적은 항상 이처럼 믿음으로 준비된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기억할 때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절망이 영광으로(7-11)

 

돌항아리 여섯도, 하인들도, 제자들도, 마리아도 아니다. 회복은 오직 그리스도가 이루신다. 잔치의 위기를 반전시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이 이미 예수님 자신이 곧 하나님의 나라의 가장 완전한 표적인 이유다. 그분 자신이 표적이다. 이 표적이 기적으로 조용히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포도주만을 보며, 혹은 중단되지 않은 잔치를 보며 안심한다. 어쩌면 대다수의 하객들은 이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자기 자리를 일어설 것이다. 이 표적은 하인들과 마리아, 그리고 제자들에게 일차적으로 공개되고 있다. 모든 사람이 회복된 잔치의 을 받았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표적은 이미 비밀이다. 이 비밀은 이렇게 시작된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7)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8)

 

하인들은 마리아의 분부대로(5)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7-8) 하였고, 그 결과 이 표적을 아는 은총을 맛보게 되었다(9). 믿음은 순종을 낳고, 순종은 기적을 낳는다. 이것이 처음 표적이 행해진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를 무대로 한 그림의 배경이다. 사실 이 표적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마리아와 하인들이 물밑에서 뭔가를 했다. 그에 반해 제자들은 아무 일도 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이 표적은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11b)는 결과를 낳았다. 마침내 151절은 제자들에게 서서히 더 이상 비밀이 아닌 것으로 성취되어가기 시작한다.

   

 

부스러기 묵상

 

표적의 부스러기는 모든 사람들의 몫이었지만 표적의 성취는 소수의 몫이다.

표적의 목표는 모든 사람이 2031절에 이르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믿음과 생명에 이른 사람만이 표적의 은총을 깨닫고, 누리고, 보고, 그래서 그것으로 더불어 주님을 높이며 사는 복을 받는다. 그렇다면 표적이 이루어져도 그것을 통해서 나타나야 할 것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그 사람에게는 표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실 이런 의미의 표적들이 얼마나 많이 지금이 시간에도 내 곁을 흘러 가 버리는지 모른다. 오늘 가나의 혼인잔치는 표적은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의 몫임을 분명히 증거한다. 주님은 지금도 내 삶의 모든 정황들을 통해서 일하시며, 말씀하시며, 교훈하시며, 기적을 이루시며, 그래서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결과적으로 이것들이 하나님을 보는 충분한 표적이 되어지기를 기대하신다.

주님이 기쁨을 잃어버린 잔치에 오셨다. 주님이 계셔도 잔치는 파국을 맞이할 위기에 있다. 주님이 계시기에 처음부터 모자랄 포도주가 그냥 자동적으로 채워지거나, 해결되어 버린 게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만드시고 이 땅에 두신 당신의 백성들과 잔치를 하고 싶으셔도 세상은 언제나 포도주가 모자라는 것으로 밖에 주님의 기대를 실망시키곤 한다. 오늘 가나의 혼인잔치도 예외가 아니다. 이처럼 세상은 이미 잔치의 기쁨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과연 이 잃어버린 잔치를 누가 회복시키실 것인가? 주님은 장차 보리라”(42,51)에 들어있는 하나의 주제, 즉 천상의 영원한 혼인잔치의 회복이라는 영광의 꿈,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11)라는 메시야로서의 등장을 통해 마침내 그 대장정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주님은 하늘의 영광을 맛보게 하신다.

오늘 이 잔치의 한 테이블에 앉아 우리 안에 이루어진 이 표적의 의미들을 벅찬 심령으로 묵상해 본다. 우리에게서도 151절을 이루어가시는 주님을 찬양한다. 오늘은 어쩌면 리허설인지도 모른다. 주님이 그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날, 공중 혼인잔치에서 이 처음 표적은 그야말로 표적에 불과함을 알게 되리라! 이 표적의 성취가 점점 임박하고 있다. 내 안에 이 일이 온전히 성취되는 그날까지 마리아처럼, 하인들처럼 그렇게 묵묵히 주의 부르심에 순종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이 또한 나를 통해서 표적을 깨닫고 2031절에 서야 할 사람들을 목회라는 또 하나의 표적에 담아내기 위해 오직 십자가의 길로 부르심을 받았고, 또 부르신 주님이 나에게 기대하시는 몫 아니겠는가.

 

   

제목 날짜
위로부터 오시는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이 있다(요 3.31-36). 2022.01.04
유다 vs 우리(눅 22.1-13) 2021.03.22
유대인 vs 이방인(눅 14.15-24) 2021.02.13
유대인들은 표적(sign)과 믿음 밖에 있다(요 6.41-59). 2022.01.17
유월절 어린양이 십자가로 향하신다(요 19.1-16). 2022.04.12
율법은 믿음 밖에 있는 사람을 정죄한다(요 10.31-42). 2022.01.31
은혜로 자라온 12년(눅 2.21-40) 2021.01.05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눅 18.9-17) 2021.03.10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라!(눅 11.14-28) 2021.02.02
이중생활을 버리라!(눅 11.37-54) 2021.02.04
인자는 갈보리에서 십자가를 져야한다(요 3.6-15). 2022.01.03
일상생활의 영성.靈性(눅 14.1-14) 2021.02.09
잃은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눅 15.1-10) 2021.02.15
잔치의 회복은 그 영광을 나타냄이다(요 2.1-11). 2022.01.03
재림의 법칙(눅 21.25-38) 2021.03.19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요 17.14-19) 2022.04.12
제자는 ‘지금은’과 ‘후에는’을 사랑으로 완성한다(요 13.31-38). 2022.02.14
제자대로.弟子大路(눅 12.1-12) 2021.02.04
제자도.Discipleship(눅 14.25-35) 2021.02.13
제자들: 복음 vs 헤롯: 세상(눅 9.1-17) 2021.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