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십자가행전’의 서곡이 보인다(요 11.47-57).

20220209(묵상)

 

 

 

마침내 십자가행전의 서곡이 보인다.

Jn. 11.47-57

   

    본문 관찰

 

 

    산헤드린 공회의 공격(47-53)

    예수님의 방어(54-57)

 

 

 

전혀 다른 두 그림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45).

그런데 그 시각,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예수님의 죽음을 모의(謀議, 53)한다. 한 사람이 살아난 것에 대해 전혀 이질적인 분위기가 감지된다. 마침내 예수님은 516에서 시작된 핍박이 곧바로 518절에서 죽이기로 넘어가더니, 급기야 산헤드린 공회는 이 일을 공식적으로 결의하기에 이른다.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통해 살아있는 주님이 죽음 앞으로 나아간다(53). 이것이 나사로 표적이 주는 메시지다.

 

 

47-53

54-57

 

       → 믿었으나”(45)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47)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48a)

    “한 사람이 죽어서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50)

    “이 말은 예수께서 (메시야로)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51-52)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53)

       → 그러므로”(54)

    “예수께서 다시 거기를 떠나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54)

    “유월절이 가까우매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55-57)

 

 

 

 

장차 보리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1.29)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2.19)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3.1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6.53-58)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0.11,15-18)

    “이 말은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11.51-52)

 

 

 

 

부스러기 묵상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5.18)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7.1,19,25)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7.30,32,44,45)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8.37,40)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8.59)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10.31)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10.39)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11.53)

 

5장의 표적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시발이었다.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이 말이다. 그 후로 참 많은 음모가 진행되었고, 급기야 역시 나사로가 살아난 표적이 주님의 죽음에 불을 놓는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움직임은 비로소 그것을 결의하기에 이른다. 실로 무서운 복선(伏線)이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세속 권력과 결탁된 기득권자들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자임하는 율법의 사람들 아닌가. 구약을 따라 제사장이 있고, 성전이 있고, 제사가 있고,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전을 찾는 백성들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반대하고 있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예수님을 핍박하고, 마침내 그를 죽이려고 결의까지 한다.

요한의 영적 통찰(insight)처럼 이 일마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47-53). 그러나 이들은 가장 불행한 도구로 쓰이는, 결코 돌이키거나 씻을 수 없는 저주받는 일에 스스로 앞장선다. 하지만 빌라도, 가룟 유다처럼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기는 하나, 그렇다고 이들이 한 일의 수고가 인정되고, 또 어떻든 그리스도의 구속을 성취하는 일에 쓰였다고 해서 하나님께 무슨 은총을 받게 되는 그런 일은 없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어떻든 누가 맡아도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을 위해서는 저주받은 무리들(대제사장, 바리새인, 빌라도, 가룟 유다 등)이 필요했고, 이 악한 배역을 자신들이 맡았으니까 정상을 참작해 달라는 억지는 한 마디로 웃기는 얘기에 불과하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이처럼 권모술수(權謀術數)가 난무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의 추함 그 안에서도 당신의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결코 포기하시거나, 놓쳐버리시거나, 왜곡시키시거나, 타협하지 않으신다. 11장의 사람들을 보면서 참으로 머리가 서는 느낌이다: “만약 내가 이들처럼 쓰이는 배역을 맡았다면 어찌될 뻔했을까?” 저들은 그렇게 쓰였으니까 고소하고 나는 아니니까 좋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웬 은혜로 우리는 주님을 믿고, 알고, 따르고, 사랑하고, 섬기고, 충성하는 사람으로 쓰시는가를 생각할 때 그저 감사할 것 밖에 없음을 고백하게 된다. 인간이 잘 나고, 믿어서, 주님을 영접해서, 주님을 위해서 뭔가를 하였으니까가 아니다. 인간의 탈을 튼 사탄의 후예들을 보면서 서글프다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면서 이런저런 고백을 묶어서 주님 앞에 선다. 이처럼 살 수 있음이 황홀하고 황송하다.

 

 

 

 

   

제목 날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요 19.28-42). 2022.04.13
가지는 나무의 사랑, 그게 희망이다(요 15.9-17). 2022.04.03
가지는 포도나무 안에 거함으로 열매 맺는다(요 15.1-8). 2022.04.03
주님은 제자들이 만난 풍랑을 기쁨으로 바꾸신다(요 6.16-21). 2022.01.17
예수님은 ‘장차 … 보리라’의 표적(sign)이다(요 5.31-47). 2022.01.13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23) 2022.04.14
베드로: 안다와 모른다, 그 사이에서(요 18.10-18,25-27) 2022.04.12
예수님은 그 당할 일을 다 아셨다(요 18.1-9). 2022.04.12
기도의 파도타기는 주의 기쁨을 낳는다(요 16.16-24). 2022.04.06
도마와 빌립의 해답이 믿음임을 주님은 아신다(요 14.1-11). 2022.03.30
제자는 ‘지금은’과 ‘후에는’을 사랑으로 완성한다(요 13.31-38). 2022.02.14
마침내 ‘십자가행전’의 서곡이 보인다(요 11.47-57). 2022.02.01
36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영성(마 14.13-21) 2022.07.14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요 17.14-19) 2022.04.12
56 세상이 복음을 흔들 때, 그래도 십자가 곁인가?(마 22.15-33) 2023.01.21
고난 받으시는 주님을 생각한다(요 18.19-24,28-32). 2022.04.12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님을 보내신다(요 14.15-26). 2022.03.30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눅 18.9-17) 2021.03.10
*46 결혼교향곡(마 19.1-12) 2022.09.13
세상으로 나를 믿게 하옵소서!(요 17.20-26) 2022.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