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장차 … 보리라’의 표적(sign)이다(요 5.31-47).

20220117(묵상)

 

 

 

예수님은 장차 보리라의 표적(sign)이다.

Jn. 5.31-47

 

    본문 관찰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31-32)

       요한(33-35)

       예수님 자신의 일(36)

       하나님 아버지(37-38)

       성경(39)

    그러나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40-44)

    유대인들에 대한 선고(45-47)

  

 

장차 보리라의 증거들

 

세 번째 표적(5)은 예수님의 핍박과 죽으심이라는 문제에 불을 당긴다.

표적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1-15 16,18)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하신() 일에 대한 공격적 도전의 시발점이 되었다는데 그 위험성이 있다. 사실 이 일은 시기의 문제였지 언제든 이 문제는 태풍의 핵이었다. 순적하게, 때가 되면 아무 장벽 없이 십자가를 지게 되는 일을 기대하기란 그것 자체가 비성경적이다. 올 것이 왔고 시작될 일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은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가느냐를 묵상하는 일이다. 그래서 더욱 주님의 언행(言行)을 주목하게 된다.

   

 

예수님에 대한 4가지 증거

 

주님은 이 문제를 이야기하실 때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신다. 이를 아래의 ABC를 통해 묵상해 보자.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이 하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B를 맡은 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말씀하신다. 이것은 A로부터 예수님의 사역의 힘과 능력과 권위가 온다고 의미이다. 또한 C가 이를 좀 더 분명히 증거해 준다.

 

A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19,30)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20)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22)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26)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27,30)

 

B

   “자기의 원하는 자를 살리느니라.”(21)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23)

   “내 말을 듣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24)

   “내 말을 듣는 자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24)

   “내 말을 듣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24)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25)

 

C

   요한(33-35)

   예수님 자신(36)

   하나님(37-38)

   성경(39)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은 장차 보리라’(1.42,50-51)라는 BA로부터 나온다고 말씀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그 기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선언이다. , 주님이 지금 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만약 A B로 이어지는 주님의 사역을 반대(핍박, 16,18)한다면 하나님을 모독한 자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라는 의미로 정리된다. 문제는 예수님이 아니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들은 이 비밀을 알지 못하고서 자행자지(自行自止)하고 있다. 이들이 이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5장까지에서 그 대답을 정리해 본다.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1.10)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1.11)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5)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3.11)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3.18)

 

이 문제에 대해서 주님의 말씀이 다시 한 번 이어진다(31-32):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32) 이 증거가 C(33- )로부터 이어진다. 예수님은 지금 세 번째 표적이 안식일 논쟁과 신성모독 행위로 흐르는 것을(16,18) ABC를 통해서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자신을 믿는 믿음에서 떠난 것인가를 증거 하신다. 그 증거로 먼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던 요한이 나온다(33-35). 둘째로 장차 보리라의 꿈을 현실로, 그것을 진리의 빛으로 밝히시는 예수님 자신이다(36). 특별히 예수님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이 친히 예수님의 증거시다(37-38, 1.33). 마지막으로 성경이 예수님의 신성과 그의 사역을 증거한다(39, 1.45, 2.22).

여기에 대한 주님의 결론이 40절부터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결국 A B로 이어지는 장차 보리라’(1.42,50-51)는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께 나아오도록 하기 위함이었다(40). 그런데 빛이 왔으나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어두움을 고집하고 있는 그림이 현재의 분위기라는 진단이다. 이런 유대인들의 실체가 이처럼 밝히 드러났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42) 결국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음으로 해서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서도 멀어져 있음을 밝히신다(43a). 빛의 말씀으로서의 진리가 왔음에도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43b). 그런 행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이 아닌 사람의 영광을 취하는 것이 되고, 결과적으로 주님을 믿지 않게 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44). 지금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이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부스러기 묵상

 

장차 보리라의 무풍지대에 있는 유대인들을 향한 주님의 선언이 눈에 띈다(45-47).

이들이야말로 자충수(自充手)에 걸린 형국이다(45). 말씀을 모르고 하나님을 안다고 장담하는 이들은 결국 말씀으로부터 정죄를 받게 될 것이다. 주님은 모세를 증거로 내세우신다. 앞에서 요한은 빌립의 입을 빌려서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지식을 이렇게 말 한 적이 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1.45)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미 구약에 대해서 정통한 사람들이었다. 빌립과 나다나엘은 이 지식과 무관하지 않게 주님을 만났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미 구약을 알고 있었고, 구약의 성취로서의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늘의 진리를 말씀하시며, 그것의 표적들을 이미 세 번이나 나타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기는 커녕 핍박과 죽음(16,18)이라는 쪽으로 흘러버렸다. 그래서 모세가 이들을 피고로 고소하게 된 셈이다.

그랬다. 유대인들은 결국 모세도 믿지 않은 것이다. 이들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고, 그렇다면 주님이 이제껏 말씀하신 것과 함께 46-47절이라는 선언 앞에 정죄를 받을 수 밖에 없다: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이렇게 해서 장차 보리라의 표적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더 올라가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것이다(38a).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 그런데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를 모르고서 예수님을 16,18절로 대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하다.

성경이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말하고 있고, 그것이 지금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표적’(sign)으로 나타나고 있는데도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핍박과 죽음이라는 것으로 향하고 있는 인생들이 5장부터 조직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인간이 어찌 그럴 수 있나 싶지만, 하나님 없는 인생,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지 못한 인생들이 하는 일이란 이런 것이며, 이것이 이들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언행(言行)일 뿐이다.

우리 시대 유대인의 후예들을 향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높은 장벽 앞에 좀 허탈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주님은 오직 자기 길을 가신다. 이런 거추장스러운 이물질들 때문에 시간을 포함한 그 어떤 것도 허비하시지 않으신다. 오직 자기 길을 묵묵히 가신다. 이게 우리에게도 힌트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자기 길을 가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장차 보리라의 표적과 복음(1.12-12, 3.16-17, 20.30-31)을 붙들고 십자가까지 나아가는 것,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생명의 길이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복음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으로 살아갈 일이다. 우리는 이처럼 부르심을 받았고, 이 표적(sign)을 따라 살도록 빛으로 임하신 생명의 주 우리의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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