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목에서 만난 예수님(눅 9.46-62)

20210130(묵상)

  

 

 

나들목에서 만난 예수님

Luke. 9.46-62

 

    본문 관찰

 

    베드로의 신앙고백(20):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첫 번째 수난예고(22): 고난 죽임 살아나야 하리라.

    제자도(23-27):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두 번째 수난예고(44):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두 번째 수난예고 이후(46-48): 누가 크냐

       갈릴리행전(49-50): 마무리

       예루살렘 노중행전(51-56): 도입부

       제자도(57-62): 나를 따르라!

   

 

중간평가

 

    [교차로에서 만난 두 사람]

    ① 주님을 함께 따르지 않는 자들(귀신을 쫓아내는 자들, 49-50)

    ② 주님을 거부하는 자들(사마리아인들, 51-56)

 

본문은 두 번에 걸친 수난예고(22,44) 이후에 위치한다.

제자들은 앞서 전도자로 파송되어 복음의 현장을 누빌 만큼 성장한 듯하다(1-6). 하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초보운전자와 다를 바 없다(40,45,46,49-50,54).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메시야로서의 복음행전은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한편 주님과 복음에 대해 적대적인 자들을 향한 제자들의 닫힌 마음(49,54), 그런 사람들을 -그들에게서 달라질만한 어떤 모습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 향한 예수님의 열린 마음(50,55-56)이 묘한 대조를 이루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자들로 하여금 뭔가 결정을 요구한다.

   

 

누가 크냐?(46-48)

갈릴리행전(49-50): 마무리

 

    [9장의 제자들]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다(40).

    ▪두 번째 수난예고 말씀을 깨달아 알지 못하다(45).

    ▪누가 크냐?’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46).

    ▪자신들을 위하는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다(49-50).

    ▪복음을 거부한 사마리아에 불심판을 요구하다(54).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4.14-9.50)이 마무리되는 단락에 제자들의 언행(言行)이 이어진다. 하나는 수난 예고와 이것의 실현이라는 메시야 사역이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는 때에 초점이 메시야가 아닌 자신들 가운데 누가 크냐?”(46-48)는 논쟁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 중 요한이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을 보고 제자들과 함께 주님을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49). 하지만 긴 갈릴리행전을 지나오면서 무수한 말씀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천지가 진동하는 생생한 기적들을 직접 목도한 이후에 나온 반응이라는 점에서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나에게 없는 것이 너에게 있을 때(40 vs 49), 어찌해야 하는가. 제자 공동체에서 일어난 일은 오늘 우리들의 신앙공동체에서 늘 대면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더 한심할 정도로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이 와중에 행하는 누가 크냐?’(46-48)는 논쟁이다.

   

 

예루살렘 노중행전(51-56): 도입부

제자도(57-62): 나를 따르라!

 

    [예루살렘으로 가는 노중](9.51-19.28)

    예루살렘을 향하여(9.51,53)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13.22,33)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17.11)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18.31)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19.11)

    예루살렘을 향하여(19.28)

 

예수님은 사마리아인들을 거부하지 않았다(10.25-37, 17.11-19). 하지만 사마리아가 예수님을 반대한다. 이유가 뭘까?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53a)이다. 사마리아의 예루살렘에 대한 적대감은 급기야 예수님까지 거부하는 일로 발전한다. 좀 더 큰 그림에서 보자면, 지금 사마리아의 언행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22), 그리고 승천(51a)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메시야행전에 대한 거부에 해당한다.

이때 야고보와 요한을 중심으로 한 제자들은 여기서도 눈에는 눈의 식이다(54). 사마리아가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나, 제자들이 사마리아가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지만 수난예고를 성취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결심하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진실로 추구해야 할 제자도는 분명하다(57-62). 먼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은 머리 둘 곳(거처)도 없는 가난과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57-58).

또한 메시야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제자의 길은 주 예수 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59-62).

   

 

부스러기 묵상

 

제자들의 이중성이 눈에 들어온다.

이들은 평지설교(6.17-49)의 실전편(7-9), 특별히 갈릴리행전의 마지막 대목에서 보여준 모습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40,45,46,49-50,54).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를 향해서는 자신들 이상의 수준을 요구한다. 사마리아의 멸망을 바랄만큼 거침없는 점에서 그렇다(54). ‘누가 크냐?’의 논공행상(論功行賞)이 마음에 자리한 것을 넘어 이젠 공공연하게 토론되고 있을 때다(46). 한편 수난예고(22,44) 시즌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자신들보다 능력 있는 자들은 거부하고(49), 사마리아에 대해서는 불심판’(54)을 요구하는, 도대체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찾을 길 없다. 이것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공생애의 절정기를 전후한 제자들의 몰골이다(51).

이런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51) 계신 주님의 심정은 어떠셨을까. 그럼에도 나를 따르라하신다. 어떻게 따르는 것인가.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는 것이고, 여러 가지 기본적인 특권까지를 내려놓는 것이다. 이게 메시야를 따라가는 제자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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