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의 영광, 산하에도 흐르게 하다(눅 9.28-45).

20210128-29(묵상)

  

 

 

산상의 영광, 산하에도 흐르게 하다.

Luke. 9.28-45

  

    본문 관찰

 

    산에 올라가사(28-36): 기도하시러

       예수님의 변모(28-31)

       베드로의 서원(32-33):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늘의 소리(34-36)

    산에서 내려오시니(37-45):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제자들의 불신(37-43a)

       제자들의 무지(43b-45)

   

 

변화산 이야기

 

    [예수님의 기도]

    요단강 세례 전(3.21)

    하루의 사역 후(5.16)

    열두 제자를 택하기 전(6.12)

    베드로의 고백과 수난예고 전(9.18)

    변화산에서(9.28-29)

 

예수님은 중요한 일을 놓고 늘 기도하셨다.

그는 고난 받으실 그리스도(9.21-22)이시자 동시에 영광의 그리스도이시다(29-31). 이를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보이신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도 확증하신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35) 이때 베드로는 산 위의 영광만을 구하지만 주님은 산 아래로 내려오셔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41a)의 모든 짐을 지고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44)게 될 것을 다시 말씀하신다.

   

 

산에 올라가사(28-36)

    ▪수난예고(21-22)

    ▪제자도(23-27)

        → 이 말씀을 하신 후”(28a)

 

마침내 메시야로서의 수난예고(9.21-22)가 시작되었음에도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니 변화산에 올라가서 영광의 그리스도를 보았음에도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33)라며 메시야로서의 소명을 성취해야 할 산 아래를 놔두고서 산 위에 있자고 말하고 있다. 이게 제자들의 가볍디 가벼운 영적(靈的) 민낯이다. 사실 베드로는 앞서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9.20)라고 고백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가 기대하고 원한 그리스도, 즉 메시야는 영광의 그리스도라는 점이 드러났다. 그러니 산 위에 머물고자 한 것 아닌가.

하지만 주님은 두 가지 모두를 잃지 않는다. 하나는 고난 받는 메시야와 함께 그후에 이어지는 영광의 그리스도다(29-31). 이것은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의 별세’(죽음, exodus)를 통해 이루어질 새로운 출애굽의 영광이다. 그렇다면 고난, 영광이다. 따라서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을 따라가야만 영광의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구름 속에서 나는 하나님의 음성에서도 동일하게 요구된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35)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그의 말은 무엇인가. 이는 바로 앞, 첫 번째 수난예고에 이어지는 제자도(23-27):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23) 그렇다. 아직은 영광을 누릴 때가 아니다.

   

 

산에서 내려오시니(37-45)

 

그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37a)로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메시야의 영광이 이루어지는 것은 변화산이 아니라 예루살렘이고(31), 이를 위해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려야 한다. 주님은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며 활동하는 마귀를 몰아내심으로서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그렇다. 산 아래 세상은 여전히 영광이 아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41a). 때문에 주님이 영광의 산을 내려오셔야 하는 것이고, 이것이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44)는 두 번째 수난예고를 하시는 이유다. 물론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메시야의 사역에 대해, 영광을 잃어버린 세상에 대해 여전히 무지하다(45). 그러니 자신들의 사명을 알 수 있었겠는가.

   

 

부스러기 묵상

 

제자들은 앞서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는 사역을 했었다(1,6).

그런데 왜 이번에는 어떤 아버지의 외아들에 든 귀신을 내쫓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을까. 앞서 12 제자들을 파송하여 직접 사역에 투입할 때는 예수께서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1)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산 아래에 있는 제자들은 이번에도 주의 능력을 힘입어야지 이를 자신들의 힘이나 능력으로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승리한다는 믿음. 악한 마귀의 세력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결코 맞설 수 없다는 믿음,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마귀의 세력을 멸하시기 위해 오셨으며 이 일을 위해 장차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라는 알았어야 한다. 하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무지하다. 그러니 이어지는 누가 크냐?’(46- )라는 논쟁과 같은 세속적인 가치를 찾고 두드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산 아래라는 세상이 언제까지 마귀의 권세 아래 있도록 할 것인가.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이런 마귀의 끊임없는 활동과, 믿음 없는 세대를 향해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이야기하시는 것이다(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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