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답이다(눅 7.1-17).

20210119(묵상)

  

 

 

예수님이 답이다.

Luke. 7.1-17

  

    본문 관찰

 

    평지설교(6:12-49)

    백부장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7b)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9b)

       백부장의 종

    과부

       죽은 자는 한 과부의 독자요(12)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13)

  

 

백부장 vs 과부

 

    백부장 - ‘듣고’(3a) 말씀만 하사’(7b)

    예수님 - “내가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9)

    종 - “이미 강건하여졌더라.”(10)

    과부 불쌍히 여기사”(13)

 

듣고 행하다’ vs ‘듣고 행하지 않다’(6.46-49) 그 이후가 그러진다.

백부장의 벗들(유대인의 장로들)과 예수님은 가버나움으로 들어가는 노중에 있고(1-9), 병든 그의 하인은 가버나움 집에 있다(10). 병들어 죽게 되었던 하인이 직접 가버나움으로 들어가는 노중에 계신 주님 앞에 온 것이 아니다. 백부장이 보낸 사람들(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 벗들)이 예수님께 거의 죽게 된 하인의 병을 고쳐 줄 것을 청하고 있다(4- ). 이렇듯 백부장의 종을 낫게 하시는 기적 이야기는 평지설교’(7.17-49)의 결론으로 주어진 복음과 그 복음에 반응하는 자의 생생한 증거인 셈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다른 말로 하면, ‘듣고 행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주님은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는 길에 평지설교가 성취되는 하나의 증거(간증, 샘플) 같은 이야기를 보여주신다. 그리고 말씀한다: “너는 듣고 행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이처럼 보여주고 있느냐?” 그런 인생은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6.48b) 한다고 말씀하신다. 바로 그 사람의 모델이 백부장이다.

   

 

백부장: 들음에서 믿음으로!

 

백부장은 단순히 죽어가는 하인을 살리는 것을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러니까 단순히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이유 하나였다. 이 말은 현실적인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온 것이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다. 나 역시 얼마나 많은 현실 문제를 주님께 말씀드리는지 모른다. 백부장은 자신이 당면한 문제의 해답을 예수의 소문을 듣고”(3a)에서 찾는다. 이 부분이 절묘하다.

문제는 그가 듣고로 끝내지 않았음이다. 동시에 듣고변함없이 절망하고 탄식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또한 아니었다. 그는 들음에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백부장의 믿음은 들음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줄기차게 움직인다(3b-8). 그는 예수님의 비유(7.46-49)에서 집의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처럼 일했다. 그의 들음은 행하는 것과 분리되지 않았으며, 그의 들음은 믿음으로 이어지는 것에 정확하게 일치했다.

본문의 절정은 바로 9절이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9b) 주님은 여기서부터 일하시기 시작하신다. 백부장은 어쩌면 지극히 현실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왔을 뿐이지만 주님은 이를 백부장의 믿음’(9)이라 하시며, 그 믿음을 통해서 집에서 죽어가는 백부장의 종을 치유하신다.

믿기는 가버나움 노중에서, 그것도 백부장이 믿었다. 그런데 이루어진 역사는 병든 하인이 머물고 있는 백부장의 집에서 성취된다.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던 하인이 백부장의 믿음 때문에 살아난 것이다(9). 이것이 믿음의 능력이다. 믿음은 시공을 초월한다. 믿음이 역사하는 것은 장벽이 없다. 아브라함이 믿었는데 이삭과 야곱, 그리고 수 천 년이 지난 이후에 나에게까지 그의 믿음이 축복으로 임하고 있다.

내가 지금, 이 시간, 이곳에서 기도하는데 이 기도가 저 곳, 저 사람에게서 응답된다. 바로 지금 남편에게 이루어지기도 하고, 10년이 지난 어느 날 친구에게서 응답되기도 하고, 오래 전에 기도했던 기도제목이 이미 내 안에 이루어진 것을 믿음으로 발견케 된다. 참으로 희한한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신나는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백부장은 그냥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이 낫게 하소서!”(7b) 한 것뿐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 고백’(7b)을 그의 믿음’(9b)으로 받으시고 축복하사 다시 이 백부장에게 돌려주실 때는 하인이 고쳐지고, 이를 모두가 다 알게 하신다. 지금 백부장의 믿음은 먼저 자신, 그리고 하인에게, 또한 동시에 이 사건을 목격한 모두에게 믿음이 무엇인가를 생생하게 증거한다. 주님은 백부장의 믿음이 이처럼 쓰신 것이다. 이 어찌 백부장의 믿음만을 이리 하실까.

 

 

과부의 아들: 사랑은 절망 보다 강하다.

 

나인은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렸던 수넴 지방의 인근이다(11; 왕하4.18-37). 그래서 그랬을까. 죽었던 자가 일어나는 기적 앞에서도 나인 성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단지 엘리사와 같은 큰 선지자가 일어나셨다(16a)는 정도로 이해한다. 좀 더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16b)까지다. 그들은 메시야로 인정하거나 믿지 않은 것이다. 이는 예수님을 바로 그 선지자’(정관사 없음)이신 메시야로는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편 이 두 기적(백부장의 종 치유, 과부의 아들 살림)은 묘한 비대칭이다. 앞은 백부장의 믿음이 종을 고쳤다고 하면, 뒤는 아들을 살리는 일에 과부인 어머니의 일은 없다는 점에서다. 죽은 아들의 장례식을 치르는 과부를 주께서 보시고 그녀를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고 하시고”(13) 관에 손을 대신 후에 청년아 일어나라하시자 죽었던 자가 살아난 게 전부다(14-15). 그러니까 위 백부장과 비교했을 때 죽은 아들을 위해 과부인 어머니가 한 일은 없다.

이 놀라운 기적이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냥 주께서 불쌍히 여기셨다그러면 더 할 말이 없지만 필연 여기에도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게 있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그래 믿음만 있으면 다 되!’라는 믿음만능주의에 빠질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 하나님 편에서의 은혜와 사랑의 빛 아래 있는 믿음을 이해하기 보다는 내가 믿으면 뭐든 다 된다.’는 그런 인본주의로 믿음을 무기 삼을 수 있는 함정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인간의 믿음이 있어야만 그것을 근거(기초)로 무엇인가 일을 하시고, 믿음이 없거나 준비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행하실 수 없는 분이신가. 결코 그렇지 않다. 주님은 독자 아들이 먼저 죽었고, 그러나 이를 예수님이 살릴 수 있다고 믿고 주님께 간구하고 외친 과부의 믿음을 보시고 죽은 아들을 살리신 것이 아니다. 단지 슬픔과 절망과 탄식과 눈물에 잠겨 장례식을 치르는 그녀를 불쌍히 여기사죽은 아들을 살리셔서 그녀의 품에 다시 주신 것이다.

   

 

부스러기 묵상

 

백부장의 믿음이 하인을 살린다.

참으로 번쩍이는 진리의 부스러기가 아닌가. 백부장은 축복의 통로다. 자신도 살고, 하인도 살고, 온 식구들도 살고, 이 사건을 목격한 모두가 다 산다. 단지 육신이 사는 것만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보이지 않는 믿음의 세계를 보며 살게 한다. 나의 믿음이 너를 살린다.’는 이 놀라운 진리가 빛이 되어 임하는 걸 보라. , 나 때문에 네가 살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벅찬 은혜인가! 주님은 백부장처럼 나를 통해 너를 살리는 통로로 사용하고 싶어 하신다.

먼저 백부장이 살아야 한다. 그래야 그를 통해 그의 주위 사람들이 산다. 주님은 내가 살고, 네가 사는 길을 보여 주신다. 그것은 믿음이다. 이 믿음은 단순히 병이 고쳐진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님을 주목한다. 참 믿음은 단지 현실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만을 위해 필요한 도구가 아니다.

하지만 이 생각(기초)는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는 이어지는 기적에서 다시 중심을 잡게 만든다. 이것은 과부의 믿음이 죽은 아들을 살리는 것으로 알려지는 기적이 아니어서다. 생각해 보라. 나의 믿음이 너를 살린다는 것이 주님과 상관없이 단지 나에게 그런 믿음이 있다는 것으로, 그것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주님이 없어도 나는 기적을 만들어낸다는 것 아닌가.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과 분리된 믿음은 만능열쇠가 아니라는 점을,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주님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뭔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낸다고 보면 안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믿음이 늘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고, 그러니 내 믿음은 네 믿음과 차원이 다르다고, 나의 믿음은 1등이라고, 그래서 다름 사람들 무시하고, 정죄하고, 자기가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칼로 쓰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악질적 사유화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자기의 사리사욕과 욕망과 육체를 위해 사용하기에 급급하며 살아간다. 과연 우리 주님이 믿음을 그리 쓰라고 주셨을까.

백부장마저도 자신의 믿음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집에서 죽어가는 하인을 위해 주님이 인정하시고 사용하실 수 있는 건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주목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꼭 믿음이 있어야만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일의 결정권과 주도권은 믿음을 가진 백부장이거나, 죽은 아들을 인하여 얼마나 슬퍼하고 아파하느냐에 있지 않다. 그럼 누구에게 있는가. 답은 참 쉽다. 바로 우리 주님께 있다. 나의 믿음은 우리 주님이 사용하실 때 비로소 그 빛을 발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믿음일지라고 이 믿음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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