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답이다(눅 5.12-39).

20210113-14(묵상)

  

 

 

믿음이 답이다.

Luke. 5.12-39

  

    본문 관찰

 

    온 몸에 나병들린 사람(12-16)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수많은 무리 - 모여 오되

       예수 -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한 중풍병자(17-26)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20)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22)

       모든 사람 -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새 시대가 오고 있다(27-39).

       세리 레위를 부르심(27-32).

       금식 논쟁(33-35)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36-39)

 

 

밀물 vs 썰물

 

    온 몸에 나병들린 사람(12):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수많은 무리(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모여 오되

    사람들(18): 한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와서

       무리(19):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17,21): 이 신성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모든 사람(26):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몇 부류의 사람들이 눈에 띈다.

죄사함과 치유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12,18), 이를 가능케 한 믿음의 사람들(20), 그리고 예수님을 가리켜 신성모독자라 생각한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17,21)이다. 동시에 이들 중심에 서신 예수님이다: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16) 또한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32) 오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에 초대된 세리와 여전히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를 고집하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새 시대의 초대장을 거부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있다. 과연 잔치는 누구에게, 어떤 사람에게 주어질 것인가.

      

 

온 몸에 나병들린 사람(12-16)

한 중풍병자(17-26)

 

    [예수님의 선언]

    온 몸에 나병들린 사람(13): “내가 원하노니

    사람들(18,20a): (한 중풍병자를 메고 온)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한 중풍병자(20b):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온 몸에 나병들린 사람(12)이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의 은혜를 받았다면, 한 중풍병자(18)는 자신을 침상에 메고 온 친구들의 믿음’(20)에 의해 죄 사함과 치유의 기적을 맛보게 된다는 사실이 놀랍다. 좀 묵상의 여백이 넓어지는 감이 없잖지만 이렇듯 나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는 예는 백부장의 믿음이 집에서 죽어가는 하인을 구원(8.5-13)한 것이 대표적이다. 좀 다른 것은 오늘 본문의 중풍병자는 믿음의 친구들과 함께 주님께로 왔고, 백부장의 하인은 자기 주인이 예수님께 믿음으로 구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집에서 죽어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과연 누가 신성모독자인가?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17,21)인가, 아니면 예수님인가? 죄사함이 믿음과, 동시에 치유가 믿음과 만나고 있음이 흥미롭다. 유대 정통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이 만남은 신성모독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주님은 죄사함과 치유를 믿음의 영역으로 알게 하리라”(24), 또한 보았다”(26)라는 은총으로 기꺼이 초대하신다.

1. 단락(5.17-26)에는 한 중풍병자(A, 18),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온 사람들(B, 18),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17,21), 무리들(19), 모든 사람(26)이 있다.

2. 주님은 '그들의 믿음'(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온 사람들; B, 18)을 보시고 '이 사람'(한 중풍병자; A, 24-25)의 중풍병을 고치신다.

3. 누가복음은 예수님께 요청하는 것에 대해 예수님이 응답하시는 것으로 증거한다(4.38,40, 5.12,18-19). 그러니까 예수님이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심을 알았고, 믿었고, 그래서 생각만 하고 있지 않고 나아왔다.

4. 어떤 사람은 사람들이 결국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기 목적을 성취한 것 아니냐? 그런데 그게 어찌 믿음이냐? 이런 얘기인 듯하다.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다.

5. 하지만 주님은 사람들의 생각을 아시는 분이시다(22). 그럼 AB 모두의 생각과 마음, 의도, 목적, 동기를 다 아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믿음이라 하시고, 이 믿음을 통해 치료의 은혜를 베푸신다.

6. 치료 받고자 하는 동기 뿐만 아니라 이를 이루시는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믿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과 목적을 믿은 게 아니라 이를 이루시는 예수님을 믿었다. 문맥은 바로 이 믿음을 보신 것이다. 예수님이!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14)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죄를 사하는 권세 알게 하리라.”(21-24)

 

두 기적 사건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겨냥한다(14,17). 제사장(14)은 예수님이 치유한 사실을 공적으로 인증(sign)하는 역할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그리고 한 중풍병자가 일어나 자신이 누웠던 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적의 현장에 있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17)은 이 기적을 목도한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바로 그때 저들은 또한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결국 핵심은 이들에게는 믿음이 없다. 이 놀라운 기적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이 일이 믿음으로 이루어고 있다고 선언되고 있는 바로 그 현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 종교지도자들, 즉 정통 유대주의자들은 기적과 믿음을 알고, 보는 일에 실패한다. 그래서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인가를 다시금 묵상하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믿음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현장에 있었다고 해서 그 믿음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온 몸에 나병이 들려 있어도, 중풍병으로 움직일 수 없어도 상관없다. 나의 믿음이, 너의 믿음이 이들을 구원한다. 핵심은 믿음이다.

한 가지 생각해 보자. 동일한 시간과 공간에, 동일한 찬송과 기도를, 동일한 설교자를 통해 말씀을 듣고,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런데 결과는 천차만별(千差萬別)이다. 왜 그럴까? 오늘 본문을 봐도, 이를 예배의 시각에 넣어 봐도 그렇다. 다 있다. 예수님 앞에 모두가 다 앉아 있다. 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들(12,18), 수많은 무리들(15),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17,21), 무리들(19), 모든 사람(26)이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 가운데 오직 유대종교 지도자들만이 요지부동(搖之不動)이다. 다 변화되었다. 한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던 무리들(19)마저도 이 기적의 은혜와 역사하심 앞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26) 반응한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 모든 사람들 가운데 나는 누구인가? 내 배우자는, 내 자녀들은, 우리 다락방의 식구들은, 시댁과 친정의 가족들은 지금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 있는가? 나를 지금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믿음으로 또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통로이기를 기대하시는 주님을 느끼고 있는가? 주께서 오늘 이루신 일을 보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자로 서기를 기대하시는 주님을 느끼고 있는가? 나는 오늘 본문에서 누구인가?

   

 

새 시대가 오고 있다(27-39).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다. 그러나 옛 사람, 즉 그 나라에 초대되지 않은 자들은 비방을 늘어놓을 뿐이다. 먼저, 어떻게 민족의 반역자인 세리와 같은 죄인과 함께 앉아 먹고 마실 수 있는가(29-30). 둘째, 왜 예수의 제자들은 요한과 바리새인의 제자들과 달리 먹기를 탐하며 금식하지 않는가(33). 이렇듯 마침내 사탄의 시험(4.1-13) 고향 나사렛의 배척(4.22-24) 귀신들의 소리(4.33-35,4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5.21)이 신성모독 프레임에 예수님의 사역을 집어넣었다.

결국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저항하고 반대하는 자들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30,33). 이들은 새 옷, 새 포도주에 비유되는 복음의 도래라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과 이 일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또한 믿지 못하기는 자들이다. 옛 것이라는 낡은 옷과 가죽부대(36,37)를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 사람이고 죄인이던 세리 레위는 예수께서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32)는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안으로 부르시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다(27-32). 당연히 옛 법에 눌려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일이고, 그러니 저들은 비방하며 외칠 수 밖에 없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30)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잔치가 저들에게는 이해되거나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복음으로 문을 연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 시대가 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련하고 믿음이 없는 세대가 이 진리를 계속해서 낡은옷과 가죽 부대에 새 옷과 새 포도주를 넣겠다고 하는 형국이다.

   

 

부스러기 묵상

 

회개를 통한 잔치라는 하나님의 나라, 바로 복음의 새 시대가 오고 있다.

귀신이 물러가고,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옛 사람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그리하여 이 하나님의 나라가 오고 있음을 아는 자들이 누리는 잔치가 시작된 것이다. ‘믿음의 눈을 뜬 사람들이 하나 둘 이 나라 안으로 들어오는 중이다. 하지만 동시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 일을 방해하고, 거역하고, 비난하고, 거부하고 있다.

세리 레위는 이 나라와 잔치에 나를 따르라!’(27)라는 초대장을 받자마자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28)로 응답한다. 하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잔치에 초대되기는 하였지만 이 땅의 잔치로 마감된다. 저들은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잔치에는 참여하지 못한 것이다. 어찌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 잔치할 때인 줄 알 수 있으랴! 그러니 여전히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를 붙들고 옛 사람으로 살아갈 수 밖에!

나병 환자도, 한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도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믿음의 문을 따라 들어온다. 동일한 기적과 말씀과 초대장 앞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서 있었지만 저들은 끝내 새 시대의 초대 앞으로 응답하지 않았다.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 생각했고(30), 어떤 잔치인가를 알지 못했고(34),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 시대가 오고 있고, 왔음을 알거나 믿거나 깨닫지 못한 것이다(38). 레위와 제자들과 같은 자들을 오늘도 교회를 통해 부르시는 주님을 묵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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