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세상을 거꾸로 사는 것이다(요 15.18-27).

20220405(묵상)

  

 

 

복음은 세상을 거꾸로 사는 것이다.

Jn. 15.18-27

  

    본문 관찰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8,19)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19)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19)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25)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20)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22)

 

 

세상의 정체

 

세상의 실체를 우리 주님은 공개하신다.

세상이 주님과 주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인 성도들을 미워하고(18), 핍박하는(20)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21).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제는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다(22). 그 이유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이다(22,24). 그러므로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을 ()’라고 선언하고 계신다. 도대체 세상은 왜 이 모양인가? 주님은 율법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말씀하신다: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25, 35.19)

 

 

세상이 하는 일들

 

주님은 세상이 어떤 곳인가를 가르치심으로써 세상에 거하며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닌 성도의 신분(정체성)을 분명히 하신다. 중간지대는 없다: 세상이냐?(18-25) 성령이냐?(26) 나는 어느 쪽 증인인가?(27)

 

(1) 세상은 성도를 미워한다(18,19b).

 

세상은 제자(성도), 예수님, 하나님을 미워한다(18,23). 특별히 성도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19b) 세상이 미워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주님 때문에, 십자가 때문에, 진리 때문에, 교회 때문에, 복음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오히려 세상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세상에 속한 자일 뿐이다. 정말 복음으로 산다면 세상을 사는 게 당연히 좀 불편한 것이 맞다.

그럼에도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으면 여러모로 불편하고, 불이익이 있으니까 적당하게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있다. 세상이 나의 성격, 성품, 품행, 버릇, 교양, 예절, 교만, 무지, 오만불손과 같은 내 쪽의 이유들 때문에 나를 미워하는 것과, 세상과 내가 다르기 때문에 미움을 당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는 점 말이다. 전자(前者)를 주님 때문에 내가 미움을 받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세상 쪽이기에 만나는 미움과 세상 쪽이 아니기에 당하는 미움은 근본이 다르다는 얘기다.

 

(2) 예수님께 한 것처럼 또한 핍박한다(20).

 

세상은 창세 이후로 믿음의 사람들, 진리의 사람들, 십자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기뻐하라. 왜 그런가?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5.10-12)

내가 세상과 비슷하거나, 혹은 같으면 굳이 세상이 나를 핍박할 이유가 없다. 세상이 나를 미워하고, 핍박하고, 싫어하는 것은 세상과 -, 세상의 방법들, 세상의 생각들, 세상의 가치관들- 내가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적당하게 타협하며 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과 구별되어 있는가, 세상과 비슷한가, 아니면 예수님과 비슷한가. 세상이 성도를 핍박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21) 그러므로 영적 무지야말로 가장 무서운 암()이다.

 

 

세상의 행위들은 일 뿐이다.

 

이제는 몰랐다고 발뺌할 수 없게 되었다(22). 그 이유는 예수께서 오셨기 때문이다(22). 이제는 심판대 앞에서 변명하거나, 몰랐다고 항변할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의 행위가 파렴치한 것은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25)는데 있다. 오직 할 일이 없으면 그냥, 이유 없이, 까닭 없이예수님을 미워하겠는가? 이게 다 때문이다. 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공존할 수 없다.

 

 

부스러기 묵상

 

세상이 나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바로 그것만큼 나는 세상방정식대로 살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내가 세상과 비슷하다는 증거일 수 있다는 것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일을 해야 하나, 이처럼 타협해야 하나, 이런 식으로 계속 끌려다녀야 하는가라는 식의 갈등 없이 뭐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면 진정한 의미의 신앙을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한다. 반대로 세상처럼 살아가는 것을 동경하고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신분이 이중적이듯이 -세상에 살지만 그러나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세상과 세상을 바라보는 성도의 시각 역시 이중적이다. 세상은 복음을 증거해야 할 의미에서 사랑해야 할 대상이면서(3.16), 동시에 본문의 시각처럼 결코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이다. 이렇듯 성도는 거룩과 세속 그 사이를 살아간다. 거룩을 따르면 세상이 미워하고 핍박할 것이고, 세속을 쫓으면 세상이 그 사람을 자기 사람이라고 하여 사랑할 것이다(19a)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이 영적 원리를 잃어버렸을 때 모든 것을 역시 잃었다. 세상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위해서 단지 필요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 안에는 천국이 없기 때문이다. 롯은 생()의 거의 전부를 통해 이 진리를 알게 된다. 이런 세상임을 알고 배우기 위해 탕자의 길을 경험할 필요는 없다. 구약의 롯이나 신약의 탕자만으로 충분하다. 세상의 정체를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밝혀주신 그대로 세상이 예수님을 대하는 것을 요한과 더불어 따라가 보는 것만으로 역시 충분하다. 주님께 그러했는데 하물며 나랴(20). 세상이 나를 미워하고 핍박할 것을 미리 알고 시작하자. 후에 서운하다 생각하지 말고. 그렇다면 문제는 이처럼 미워하고 핍박하는 세상을 어떻게, 무엇으로 살아가느냐이다. 이게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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