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천국로(天國路): 나는 누구인가?(마 9.1-17)

20220220(묵상)

  

 

 

천국로(天國路): 나는 누구인가?

Matt. 9.1-17

 

    본문 관찰

 

    중풍병자를 고치시다(1-8)

       예수께서 [1]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3a]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2] 무리가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마태를 부르시다(9-13)

       [4a] 마태 -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3b] 바리새인들이 보고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왜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14-17)

       [4b] 요한의 제자들 -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 그들(2)

        [2] 무리(8)

           [3a] 어떤 서기관들(3)

           [3b] 바리새인들(11)

        [4a] 세리 마태(9-10)

           [4b] 요한의 제자들(14)

  

 

예수님 곁의 사람들

 

여러 다양한 사람들이 주님 곁에 서 있다.

8장의 건너편 가다라 지방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기적과 죄사함(1-8), 그리고 죄인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함(9-13)이 이루어지는 광경을 만난다. 또한 요한의 제자들도 등장한다(14-17).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잘하고 있는 금식이라는 앵글에 예수님을 집어넣어 판단하려는 점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별 다른 차이점을 발견하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어둡고 절망적이지만은 않은 것은 그들’(2)무리’(8), 그리고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는 세리 마태(9)가 무엇인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뒤죽박죽된 현장에서도 복음의 핵심을 밝히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점,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주님 곁에 서 있어야 하는가를 돌아보게 한다.

   

 

[1] 그들(2):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친구들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4.17) 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지만 8장의 가다라 지방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다시 1절에 가버나움으로 되돌아 오셨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하나님께로 가는 천국로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은 어떠할까: 거절인가. vs 영접인가.

2절을 주목하는 이유다. 첫 번 반응은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다(2). 거절이 아니라 영접이다. 예수님께로 나아온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2a)이라는 장면을 그려보라. 주께서 치유하실 것을 믿었기에 이런 행동은 가능했고, 무엇보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 그들의 행동 속에 들어있는 마음, 그 중심에 있는 믿음을 보시는 주님이시다. 그렇다면 주님 곁으로 나아온 자들의 중심을 살피시며 그것이 믿음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욕심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통찰하신다고 보여진다.

주께로 나아온 이 조그마한 헌신은 중풍병자의 질병이 치유되는 것은 물론 그의 죄가 용서되는 은총을 낳는다(2b,5-7). 주님은 전적으로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며, 그가 안고 있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신다. 예수님은 다른 것을 요구하거나 보시지 않으셨다. 오직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 볼품없이 초라하고 무능력한 사람이지만 사람의 겉모양을 보시지 않으시고 그의 속사람을 보신다.

   

 

[2] 무리(8): 가버나움 동네 사람들

 

무리는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치료하신 기적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이다(8). 이들은 가버나움 동네 사람들인 무리’(8). 저들은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이 모든 광경과 하신 말씀을 다 보고 들었다. 과연 이들은 어떤 반응을 표할까. 무리는 질병이 치료되는 것은 물론 죄가 용서되는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였다. 이를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진심으로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 두려움이 단순한 공포심이 아닌 것은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8)는 반응에서 분명해 진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과 그 능력을 보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반응을 보인다. 그야말로 천국 복음에 대한 긍정이다.

   

 

[3a] 어떤 서기관들(3)

[3b] 바리새인들(11)

 

여기 주님 곁에 있으나 주님과 함께 천국로를 따라 걸어가는 자가 아닌, 이 좁은 문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가, 어떻게 거절하는가. 먼저, 어떤 서기관들은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시는 주님을 향해 악한 생각과 함께 신성을 모독하도다!”라고 말한다(3-4). 한편 이런 놀라운 은총이 이루어지는 자리에서도 이처럼 마음에 악한 생각을품는다. 정말이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서기관은 어떤 사람인가. 그들은 율법에 능통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율법의 주인이요 완성자이신 주님의 언행(言行)을 자기 잣대를 따라 왈가왈부(曰可曰否)한다. 이게 주님 밖에 있는 거듭나지 못한, 믿음 없는 인생들의 몰골이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9)고 부르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함께 식사 교제를 나누는 것을 보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11) 그러자 예수께서 의사가 병든 자에게 쓸 데 있는 것처럼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3b) 말씀하신다.

그럼 무엇인가.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은, 그렇다면 죄인들과 식사(교제)하는 예수님과는 인생의 길을 같이 동행할 수 없다는 자들이다. 그러니까 천국로인 좁은 문, 좁은 길로 주를 따라갈 일은 없을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4a] 세리 마태(9-10)

[4b] 요한의 제자들(14)

 

한편 바리새인들이 볼 때는 죄인들(11)에 속한 세리(세관원) 마태는 너는 나를 따르라!”(9b)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주님에게 마태는 병든 자’(12)죄인’(13)이었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요한의 제자들은 어떤가. 주님께 질문을 가지고 온 것은 잘한 일이다. 하지만 요한의 제자들은 여전히 유대 종교의 의식 가운데 하나인 금식이 주된 관심사다. 아마 자신들은 이 주제에 대해 매우 자신이 있었던 모양이다.

주님은 유대 전통이라는 ’(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과 천국 복음(생베 조각, 새 포도주)을 대조시키신다. 그렇다면 이미 생명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낡은 형식과 의식이라는 전통에 생명의 복음을 담을 수 있겠느냐는 말씀이다. 이제 요한의 제자들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금식이라는 틀을 가지고는 복음을 이해하거나 바르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주님은 금식을 금하시거나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5.16-18).

 

우리 시대의 공동체 안에도 여러 부류의 사람이 공존한다. 끊임없이 불어오는 삶의 소용돌이라는 변화무쌍한 현실을 믿음으로 이겨내는 사람들, 그리고 이 기적과 은총의 목격자들이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 하지만 이런 놀라운 하늘의 은총과 축복이 이루어지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궁시렁거리는 사람들, 이 구도는 예나 지금이나 어찌 그리 동일한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

   

 

부스러기 묵상

 

우문현답(愚問賢答)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어떤 서기관들은 속으로(3), 바리새인들은 공개적으로(11), 요한의 제자들이라는 사람들은 그들대로(14) 각각 이런저런 질문들을 쏟아낸다. 하지만 한결같이 우문(愚問)들 뿐이다. 어찌 보면 인생들에게는 대답 없는 질문들만이 있을 뿐이다. 주님과 진리와 복음 곧 천국 밖에서 인간의 얄팍한 이성에 호소하여 만들어진 것들이기에, 그것도 주님을 알고 믿기 위한 것이 아니기에, 질문들이라는 게 하나같이 어리석어 보인다.

진실로 변화되기 전에는 주님을 더 잘 믿기 위해서,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진리에 대한 타는 목마름으로 말씀 앞에 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록 주님 곁에 있다하더라도 천국로를 함께 동행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2a), 어떤 서기관들의 생각을 아시고”(4a), 바리새인들의 얼토당토 않는 무지한 말을 들으시고”(12a), 또한 요한의 제자들에게서 금식에 대한 질문을 받으신다(14). 이렇듯 당시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복음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있었다. 기적이 일어나고, 죄인이 거룩한 부르심을 받고 있는 순간에,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거역하고 복음에 반기를 드는 일이 자행되고 있다. 또한 신앙의 한 덕목인 금식마저도 자기 변호와 자기 의()의 도구가 되어 버린 영적 황무지를 목도한다.

주님은 바로 그 순간에도 가버나움에 천국로를 믿음으로 여신다. 다시 살리기 위해서다. 정말 살아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기에, 그래서 어떤 반대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진리의 길을 걸어가신다. 문제는 모두가 다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마태처럼 부르심을 받아(9), 그들처럼 믿음으로 살면서(2), 무리의 한 사람으로(8), 하나님을 찬양하며 주님 곁에서, 천국로를 따라 살고 싶다.

 

    바울: 나는 누구인가?(고전15.9-10, Message)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는 사도들의 반열에 포함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없애버리는 일에 혈안이 되어 젊은 시절 대부분을 허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은혜로우셔서 한없이 너그러우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입니다.

    나는 그분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다른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은 일을 하려고 애쓰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내가 한 일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할 일을 주시고 감당할 힘도 주셨기에,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있어서 나는 누구인가.

주님께 세운 양무리교회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으로 예수님 곁에서 천국로를 따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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