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2(양무리교회)
최후심판, 미리 보는 Live 생방송이다.
Matt. 25.31-46
본문 관찰
인자가 … 올 때에 … 모든 민족을 …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양은 오른편에(33a,34-40,46a)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 상속받으라
내가 … 때에 … 하였고
어느 때에 … 하였나이까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염소는 왼편에(33b,41-45,46b)
저주를 받은 자들아 …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 때에 … 아니하였고
어느 때에 … 아니하더이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그들은 영벌(永罰)에
양과 염소: ‘공개된 답안지’
이 세상은 의인과 악인이 함께 공존(共存)하며 살아간다.
노아의 홍수심판 때도 그랬다. 그런데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공개된 답안지>처럼 밝히 드러나고 있는 다가오는 미래, 최후심판 역시 마찬가지다. 먼저 인자가 다시 오실 때 이 둘은 각각 구별하여 좌우로 나누어질 것이다(32). 이렇게 해서 모든 사람은 양과 염소 편으로 나누어져 최후심판을 받는다. 먼저 오른편에 있는 자들과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임금의 선언이 있고(34,41), 이어서 이처럼 선언한 이유(35-36,42-43), 그리고 이 선언에 대한 양과 염소의 질문(37-39,44), 마지막으로 임금의 대답(40,45)이 각각 하나님의 [우주법정] 심판대에서 선포된다.
예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4.17)는 선언으로 시작된 천국이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31a), 이때 “모든 민족이 그 앞에”(32a) 마침내 서게 될 날, 바로 그 마지막이 오게 될 것이다. 다름 아닌 최후심판이다. 그런데 잘 보면, 비유이지만 마치 미리보는 Live 생방송과 같다. 마태복음 25장은 이를 어떻게, 무엇으로 예비할 것인가에 대한 답안지다. 이 준비는 공히 주의 초림과 ‘재림’(parousia, 10,19,31) 사이의 이곳 세상의 일상생활에서 채워질 것이다.
양은 오른편에(33a,34-40,46a)
염소는 왼편에(33b,41-45,46b)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31)
그런데 놀랍다. 이들 양쪽은 묘하게도 자신들이 왜 오른편/왼편에 있는지(33a,41a), 왜 임금이 축복선언/저주선언을 하는지(34,41),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 목마르신 … 나그네 되신 … 벗으신 … 병드신 …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35-39,42-43) 이 모든 삶의 순간순간들을 예수님과 함께 하며 돌아보았는지, 반대로 그러지 않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뿐 아니다. 무엇보다도 임금이 자신들의 언행(言行)을 기억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이곳 세상에서 살아온 일상의 삶이, 놀랍게도 주님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정말이지 모르는 것 투성이다.
그러니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한 것’(하지 아니한 것)이니라.”(40,45)로 요약되는 임금의 평가를 받는 것에 대해서 전적으로 무지하다. 그런데 그가 살았던 인생보고서를 따라 오른편과 왼편에 서게 된다.
이처럼 모든 인생들은 예외 없이, 마지막 때에 자신들이 어떻게 살았느냐를 가지고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을 비롯해서 이 감람산강화(24-25장)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제자로서 지금 보고 있는 Live 생방송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언행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너희가 나의 '제자'라면, 다른 말로 하면, 너희가 오른편의 양이라면 이처럼 소박하고 사소해 보이는 ‘이웃사랑’으로 사는 것이 양의 편에 서게 되는 하나의 근거와 기준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한편 왼편에 선 자들은 “저주를 받은 자들아!”(41a)로 시작되는 임금의 선언을 받는다: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1) 참으로 겁나는 최후 [심판선언문], 곧 ‘공개된 답안지’다. 따라서 ‘이웃사랑’의 삶을 살지 않은 것(42-44)은 임금이 이런 기준을 따라 평가하실 줄을 몰랐다고 말할 수 없다. 왜 그런가. 답안지는 지금 공평하게 모두에게, 그것도 Live로 공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스러기 묵상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
행위(35-40,42-45)는 최후심판(영생과 영벌)과 어떤 관계일까.
최후심판 때에 “영벌(永罰)에 … 영생(永生)에 들어가리라!”(46)는 결론이 심판대 앞에 서기전까지 그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언행(言行)한 ‘이웃사랑’의 유무에 달려있다면, 정말 이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비유라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
*선행이 기준이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은혜의 복음은 어찌 되는가?
*성경은 행위가 영벌과 영생의 기준이라고 말하는가?
*최후심판 때에 믿음은 어떤 역할(작용)을 하는가?
*선행하며 사는 것이 자신을 구원한다면 자력구원(自力救援)라는 뜻인가?
*영벌이든 영생이든 자기의 구원에 대해서 심판대 앞까지 무지할 수 있는가?
*인간은 선행을 하고, 하나님은 이를 평가하는, 이처럼 구원은 신인협력(神人協力)인가?
인간은 선행(善行)을 통해 구원을 얻어 영생에 이르는 게 아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값없이 주신 은혜의 선물인 믿음으로 받는다. 그럼 ‘이웃사랑’과 같은 행위는 무엇인가? 이것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 그 은혜에 감사해서 구원받은 자로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말하자면 구원의 열매와 같은 것이다. 선행은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다(마7.20-23 참조).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0-21)
구원받은 자는 오른편에 있는 양(羊)처럼 산다. 이들은 마치 주님께 하듯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40) 사랑을 실천하며 산다. 이를 주님께서 “내게 한 것이니라!”(40b)고 받으신다. 사도의 가르침과 동일하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골3.23)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그러니까 임금의 기준이 아닌 자기 마음대로 살아서는 종말을 복되게 맞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듣고 눈이 열려 하나님의 나라를 보며 사는 ‘제자’는 비록 험한 세상을 살아가더라도 자기가 걸어가는 생의 수레바퀴에서 만나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주님께 하듯 대하며 산다. 그는 ‘이렇게 살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계산하면서 살지 않는다. 왼편에 있는 자들은 이웃도 없고 하나님도 없이 자기방식이라는 영적 무지로 살았다. 그렇지만 양(羊)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자신을 보며, 이웃을 보며 산다.
언젠가 우리 역시 우리가 등장한는 Live 생방송이라는 종말의 자리에 서는 날이 있을 것이다. 감사한 것은 제자들처럼 지금 이곳에서 저 미래의 최후심판을 미리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웃사랑이 오른편 양의 무리에 서게 되는 이유인지도 모르면서 살아가면서다. 하나님께 받은 것에 비하면 내가 이웃에게 주의 이름으로 돌려주는 것은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주께서는 이를 기억하신다. 놀랍게도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이여!”로 시작되는 환영사 앞에 서게 하실 것이다. 그날까지 거기에 걸맞은 모습으로 사랑을 빚어가는 삶이어야 한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날이 가까이 오면서 우리가 어느 편에 설 것인가가 ‘공개된 답안지’처럼 주어졌다. 그럼에도 왼편에 있는 자들처럼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그들은 영벌에 들어가리라”(41,46)는 선언을 받게 될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종말은 상상이 아니며, 허구가 아니며, 동화가 아니다. 실상이고, 역사이고, 곧 맞이하게 될 Live 시간이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제자의 모습이 종말에 서게 될 곳이 왼편과 오른편 중에 어느 쪽인가를 보여준다. 구원 받은 자는, 은혜를 입은 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마음을 회복한 자는, 이웃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살아간다.
오늘 우리는 생방송으로 보여주신 Live 최후심판을 미리, 생방송으로 보고 있다. 내가 출연한 시간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하지만 언젠가 등장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양과 염소 편에 선 사람들만 지금 우리들로 바뀌어질 것이다. 그날이 오고 있다. 그날에는 대본을 수정할 수도 없고, 양과 염소의 자리를 바꿀 수도 없고, 출연을 거부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지금, 아직 최후심판이 시작되기 이전인 오늘을 하나님이 원하시고 인정하시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다시금 양무리의 편에 서게 해 주시기를 바라며, 이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묵상하며 성찬상 앞으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