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예수님의 역사적 재림, 곧 보게 된다(마 24.29-51).

20230312(양무리교회)

  

 

 

예수님의 역사적 재림, 곧 보게 된다.

Matt. 24.29-51

  

 

    본문 관찰

 

    환난 후에 인자가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29-31)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 택하신 자들을 모으리라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32-41)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깨어 있으라(42-51)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이 되어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의 임하심의 징조들

 

전무후무(前無後無)한 환난의 때, 그것으로 끝인가.

아니다. 마태복음 24장은 앞서 28절까지 종말론적 환난이 지나면, 곧 이어 주의 재림이 있다고 말한다(29). 이처럼 핵심 주제는 첫째로 주의 재림이다: 환난 후에 인자가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29-31) 이때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누어질 것이다(30-31). 둘째로, 그렇다면 과연 재림의 시간은 언제인가(32-41). 이것이 초미의 관심사다. 하지만 결론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36-37) 셋째로, 이런 맥락에서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재림 비유가 매우 적절한 신호등 역할을 한다(42-51).

 

 

재림 예수(29-31): 인자가 오는 것을 보리라.

 

종말, 즉 마지막이 환난이고 그것으로 역사는 끝인가. 마지막에 될 일인 환난그러니까 환난으로 끝이다, 거기까지다이라면 얼마나 허무할까. 하지만 환난 이후에 경천동지(驚天動地, 29, 13.10, 34.4, 6.2) 하는 일이 있다. 무엇인가. 예수님의 역사적 재림이다: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30b) 그렇다면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함에 있어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은 그가 환난기를 어떻게 보냈느냐가 결정적이다. 두 그림으로 설명된다.

먼저,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사람들이다(30a). 심판이다. 이들은 자타(自他)가 공인하는 가짜들이다(4-5,10-12,23-26).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다. 이것은 필연이다. 잇따라 예고편이 공개되었음에도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살았으니, 그리고 돌이킬 여유도 없이 홀연히 재림의 나팔이 울려 퍼졌으니 울부짖어 보아도 이미 기회는 사실상 끝장난 이후다.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은 천사들이 온 열방에서 모으는 주님이 택하신 자들이다(31). 구원이다. 이들은 환난으로 끝이 아니라 그것을 영광의 승리로 이어가는 사람들이다(9,13-14,22). 이처럼 주의 재림은 역사적이며, 공개적이며, 공간적 제한이 없이 시공을 초월하여 영광 가운데 일어난다. 이렇듯 주의 재림은 심판과 구원이라는 이중적 목적을 성취한다.

 

 

재림 시간(32-41): 그 날과 그 때는?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36a)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시를 알지 못하느니라.”(25.13)

 

그렇다면 재림의 때, 곧 그 시간은 언제인가. 주님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32)는 것처럼 이와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33a), 그러니까 앞서 말씀하신 환난이라는 밑그림에 따른 종말론적 징조들(1-31)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33b)라고 말씀하신다. 종말이 그렇듯이 주의 재림 또한 이미’(already) 시작되었으나 아직’(not yet) 온 것은 아닌, 그 사이에 자리한 긴장이다.

놀라운 것은 주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34-35). 하지만 문제는 있다.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36a)에서처럼 징조가 성취되는 바로 그 날과 시간은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에 속한 부분이다는 사실이다. 징조는 이것을 통해서 인자의 임함이 이제 곧 임박하고 있음을 알리는 하나의 사인(sign)이지 그것 자체가 인자가 오는 날과 시간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처럼 둘, 징조임하심은 명백히 구분된다.

그러나 이 둘이 구분된다는 것은 징조에 대한 긴장감을 늦추거나 인자의 오심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이를 노아의 홍수 때를 예로 들어서 이 둘 사이에 끼어있는 제자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깨우치신다. 홍수가 있을 것이라는 예고가 있은 후부터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간 날까지 사람들은 [홍수심판예고편]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었다(38). 더더욱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39a).

방주가 완성되어 가는 것은 두 가지 사인을 동시에 알리는 신호등과 같았다. 하나는 심판이고, 다른 하나는 구원이다. 지금 주께서 말씀하시는 인자가 다시 올 때에도 바로 그럴 것이다(37,39b). 징조가 하나 하나 구체적으로 진행될 때마다 주님의 재림은 그만큼 더 가까이 오고 있다. 그럼에도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바로 그 날까지도, 그리고 홍수가 나서 다 멸망을 당하면서도 깨닫지 못했다.

우리 시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노아의 방주가 지어지고 있어도, 그러니까 종말에 대한 징조들이 하나 둘 신호등 역할을 감당하고 있어도 인생들은 그 신호를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자기 생각대로 무시하며, 그러면서 자기 갈 곳을 찾아 살아간다. 종말과 재림이라는 영원한 표지판을 무시한 채 말이다. 그러나 저들이 하나님의 사인(말씀)을 버려 두었듯이 주님으로부터 버려 둠을 당할 것이”(40-41).

 

 

재림 비유(42-51):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 vs 악한 종

 

누가 종말을 사는 충성(신실)되고 지혜(슬기)로운 종인가?(45-51): “나는 주인의 것을 맡은 청지기다. 주인이 나에게 맡긴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종이고 주인은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맡은 일을 한다해도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자기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는 자다.

이렇듯 종은 그가 아무리 훌륭하고, 성실하고, 성공하고, 잘 되고, 그래서 유명해지고 소위 떠도’, 그럼에도 그는 종일 뿐이다. 결코 주인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는 간혹 신분이 바뀌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그는 분명 하나님의 종일 뿐이다. 이것을 망각하면 큰 일 난다.

두 종의 출발은 분명 같았다. 그러나 그 끝이 달랐던 것은 꾸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천국까지 이르는 신앙의 레이스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꾸준함’(충성)이다. 꾸준함이 능력이다. 충성된 종과 악한 종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때가 곧 올텐데 그래서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12.1b)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충성이 답이다.

교회 안에도 두 종류의 종들이 언제나 공존한다. 이 둘 다 주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청지기들이다. 충성된 종처럼 주인의 의도대로 자신을 드리는, 따라서 이 사람의 초점은 자기가 아니라 언제나 주님이다(45-47). 그러나 악한 종처럼 ‘자기 방식으로 생각하며 행동하는, 마음에 품은, 그러기에 이 종의 결국은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48-51).

 

 

부스러기 묵상

 

무화과나무와 홍수심판이라는 신호등을 주목한다(32,37).

가지와 잎의 변화를 보면서 여름을 아는 것이 순리이듯이, 노아의 때에 홍수로 멸망을 당하기까지 깨닫지 못했던 불행한 사람들의 전철을 밟지 않는 것이 내가 지불해야 할, 내게 맡겨진 소중한 몫이다. 무엇보다 예비 종소리를 들을 수 있음이 얼마나 다행인가. 동시에 이제 곧 예정된 종말과 주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믿는 기적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 그저 감사할 뿐이다.

이제는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의 자리를 지키는 특권을 가볍게 생각하는 철없음을 버릴 때도 되었다. 알지 못하고, 생각지도 않은 때에 주께서 다시 오실 것이다. 홍수심판이 시작되자 방주문 밖에서 통곡하며 문 열어 달라고 소리치던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방주문은 이미 닫혔다. 비록 악한 종으로 살았을지라도 그래도 주인의 종으로서 맡은 일을 하던 종이었다고 소리쳐봐야 별 소용없는 때가 곧 올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시작된 종말을 사는 지혜자의 모습이다.

재림의 때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불가시성)과 재림이 있다는 것(역사성)은 다른 얘기다. 그러므로 깨어 그 때를 준비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방주 밖의 심판이 집행되는 꼴 나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의 삶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종말과 재림을 알리는 예비 종’(예고, 마지막에 될 일들-환난)본 종’(성취, 환난 이후-주의 재림) 사이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지금이다.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33b) 하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듣고서 말이다. 지금은 깨어 있어야 할 때다. 곧 생각하지 못한 때에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다. 그날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 때문에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있음이 큰 복인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 다시 오실 날이 점점 더 가까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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