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바리새주의(2) - 화 있을진저!(마 23.13-39)

20230228(묵상)

  

 

 

바리새주의(2) - 화 있을진저!

Matt. 23.13-39

  

 

    본문 관찰

 

    화 있을진저(13-36)

    ①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② 교인 하나가 생기면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③ 누구든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④ 너희가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⑤ 겉은 깨끗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⑥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⑦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우리는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예루살렘 멸망 예언(37-39)

  

 

일곱 가지 화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15.18)

 

바리새인들의 죄 목록표가 적나라하게 공개된다.

아찔하다. 주님은 정확하게 보고 계셨고, 또한 저들이 행한 대로 그 죄 값을 찾아내신다. 더 중요한 것은 때가 되면 그 값을 찾아 반드시 물으실 것이다는 점이다(33,36,38-39). 그렇다면 이것은 바리새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결국 누구든지, 또한 누구보다도 율법과 직간접으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의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내적인 참 경건을 잃어버리면 외적인 거짓 경건의 그럴듯한 모양을 가지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바리새인 병동(病棟)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화 있을진저!(13-36)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겉 다르고 속 다른 표리부동(表裏不同), 이것이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죄의 실상이다. 중요한 것은 바리새인들을 보면서 나를 보는 일이다. 이것을 실패하면 나도 바리새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장담할 수 없다. 내 안에 꼬투리를 내리고 있는 바리새인다움의 못된 근성들을 해부하고 찾아내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화 있을진저①②(13-15)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13)

   “교인 하나가 생기면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15)

 

참 놀라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문을 가로막고 서 있다니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13a). 그래서 더 불쌍하다. 무엇이 천국문인지 알고 있음에도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는 세상에서만 양산되는 것이 아닌가 보다. 가장 종교적이며 율법적인 것에 가깝다고 자임하는 바리새인들에게서 천국문이 차단되고 있다니 말이다.

문제는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한다는 점이다(13b).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들보다 배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린다(15). 이렇듯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막아버리는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종교지도자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위선자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래서 화가 있으리라는 불행이 예고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주님은 메시야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십자가에로의 길을 걸어가고 계신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구약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면서도 딴지걸기로 일관하고 있다. 바로 이런 신앙과 복음적이고 천국적인 저들의 언행이 통렬하게 비판받고 있는 것이다. 자기만 망하는 것도 불쌍한데 바리새인들의 덫에 걸려 천국에서 멀어지고 지옥 자식으로 추락하는 사람들, 저들을 어찌할까.

 

화 있을진저③④(16-24)

   “누구든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16)

   “너희가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23)

 

율법의 껍데기만을 지키는 자들의 한심한 몰골이 들어온다. 성전과 제단과 하늘로 맹세한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16a,18a,22a)는 것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서 나온 율법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더 가관인 것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16b), 그리고 제단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18b) 그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니 이것이야말로 성경에도 없는 소위 [모세육경]이 아닌가.

이렇게 언행하며 살면서도 "박하(薄荷)와 회향(茴香)과 근채(芹菜)의 십일조를 드리"(23a)며 살았으니 자기들 딴에는 얼마나 고귀하고 높은 신앙을 따라 살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러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만의 각()을 세우며 살아간 것 아니겠는가. 어떻든 맹세도 하고 있고, 십일조도 드리고 있는, 그러니까 뭔가 하고 있다는 게 늘 문제다.

때문에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을 놓치며 산다. 그걸 알고 보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직격탄의 대상으로 전락하진 않았을 것이다. 저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금보다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 더 중요하고(17b), 제물보다 제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19b). 동시에 맹세는 맹세자의 문제가 아니라 맹세를 받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연결된 보다 더 큰 그림으로 이미 넘어갔다는 주님의 말씀이다(20-22, 5.33-37 참조).

이것이 보이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오히려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보이지 않는 것을 소흘히 하게 하는 그릇된 신앙을 낳게 만들었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정의)와 인(자비)과 신(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23) 외식과 형식에 따른 보이는 양()만 난무하고 내용과 본질과 같은 보이지 않는 질()은 전무한 것,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전매특허였다.

 

화 있을진저⑤⑥(25-28)

   “겉은 깨끗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25)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27)

 

네 번째 "화 있을진저!"가 더 구체적인 결과로 예증되고 있다(23 25-28). 굳이 비교하자면 전자()가 종교적인 것이다면 후자(⑤⑥)는 일생생활의 현장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은 삶의 영역이 다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는 뜻이다. 예상했던 대로 저들은 겉은 깨끗이 하되”(25a),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27a),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나”(28a)에서처럼 사람본위의 인본주의라는 겉푸름이 있을 뿐이다.

한편 저들의 진짜 모습은 탐욕과 방탕으로(25b), 모든 더러운 것과(27b), 외식과 불법이다(28b). 저들 안은 이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내면세계가 이처럼 죽어있는데 겉이 그럴 듯 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회칠한 무덤과 같을 뿐이다. 이러면서도 각종 종교적인 언행을 일삼고 가장 거룩한 척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살 수 있는 길이 있다: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26) 주님의 관심은 인간의 내면세계다. 죽은 형식(‘’)으로는 깨끗하게 되는 게 불가능하다. 살아 있는 내용(‘’)만이 온 몸을 깨끗하게 살릴 수 있다. 겉은 안을 위해 할 일이 없지만 안은 겉을 향해 얼마든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속사람의 속푸름만이 잎만 무성한 겉사람의 겉푸름을 치료할 수 있다.

 

화 있을진저(29-36)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우리는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29-30)

 

바리새인들이 선지자들과 의인들의 무덤을 쌓고 비석을 꾸민다는 것은 저들과 자신들을 동일한 하나로 보고 있다는 것과(29), 또한 저들을 잇는 후예임을 은근히 자랑하고자 하는 계산이 깔려있는 행동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일련의 처세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31) 된다는 점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러니 아직도 저들은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랬기에 한 술 더 떠서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30) 말한다. 참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얘기다. 나 역시 이처럼 교묘하게 합리화하고 적당히 빠져나간 적이 얼마나 많은지 . 내가 만일 출애굽의 이스라엘 백성이었다면 그들처럼 불순종과 불평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내가 만일 복음서의 사람들이었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정말 선지자들의 후예였다고 한다면 저희들은 구약의 예언대로 오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섬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다. 그렇다면 저들의 이러한 말들이 얼마나 거짓되고 위선과 가증함으로 가득찬 것인가를 알게 된다. 이로써 선지자들을 죽이는 등 온갖 죄악을 저지른 조상들의 일을 이어가는 후예일 뿐이다(32,34).

그러니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33)는가. 그뿐 아니다. 아벨에서 스가랴까지의 피 값에 따른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이 다 저희에게 돌아갈 것이다(35-36, 4.4, 1.1).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 아닌가.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며, 오늘은 내일의 거울이고 씨앗이다. 어제를 이해하는 시각이 그릇되어 있으니(29-30) 오늘의 모습은 보나마나 뻔한 것이고(31-32,34), 내일 또한 비극적이다(33,35-36).

 

 

부스러기 묵상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1.12b)

    “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열조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7.25-26)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1.10)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는 주님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37-39).

마침내 예루살렘은 훼파되리라는 주님의 예언을 예고 받게 된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37-38) 이 말씀은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불과 40년도 채 되지 않은 AD 70년에 로마의 티토(Titus) 장군에 의해 성취되고 만다.

하지만 영원한 심판이 아니다는 점이 아직 남은 희망이다(39). 언젠가 저희들이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가 올 것이며, 그렇다면 예루살렘의 멸망은 다시 회복하기 위해 치루어야 할 대가인 셈인데, 과연 이마만큼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만 한 예루살렘(‘’)인가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나를 보시면 탄식하실 주님을 생각하니 몸둘 바를 모르겠다.

주님이 그토록 위선(외식)을 싫어하시다니 예전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대목이다. 바리새인들을 향해 행하신 주님의 최종선언 앞에 나 또한 어느 한 절이라도 결코 자유롭지 못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에 좀 맥빠지는 게 사실이다. 저들을 이처럼 정확하게 아시는 주님이시기에 나를 또한 그러시리라 생각하니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겁부터 난다. 어찌할까.

어느 곳 하나 성한 것이 없음에도 가장 종교적이며 건강한 것처럼 행세하며 살아온 바리새인들, 이게 종교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허왕된 모습이다. 위로부터 온 능력이 아닌 땅에서의 학습과 배움으로 만들어진 종교적 습관이 종종 신앙으로 둔갑하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나는 지금 나에 대한 천국에서의 평가와 보고서가 어떻게 기록하도록 살아가고 있을까.

주께서 나에게도 복음 한 첩을 조제해 주신다: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26) 정말 아멘이다. 바리새인처럼 살지 않으려면, 또한 저들처럼 평가되어 슬피 울며 이를 갈면서 결국 영영 돌이킬 수 없는 후회로 마감되지 않으려면 내 심령이라는 내면의 마음밭을 잘 가꾸는데 힘을 더 써야겠다. “화 있을진저!”가 자꾸만 내 마음 안에 메아리 치고 있다. 이 소리를 들리지 않게 하는 길을 생각한다. 그만큼 지금은 다르게 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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