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29(양무리교회)
세상이 성경에 대해 질문해 올 때에
Matt. 22.34-46
본문 관찰
바리새인 → 예수님(34-40)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예수님 → 바리새인(41-46)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다윗의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대화
이번에는 다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15,34).
주님은 받은 질문을 통해서 제일 큰 계명을, 하신 질문을 통해서 다윗의 주되신 메시야로서의 자기 이해와 자기 계시를 밝히 드러내신다.
바리새인 → 예수님(34-40): 시험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눅12.11-12)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b)
유대인들은 613개 조항의 유전으로, 그러니까 율법을 ‘하라’(248개)와 ‘하지 말라’(365개)는 명령으로 크게 분류한 후에 그 가운데 어떤 계명이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 토론하기를 좋아하였다. 지금 한 바리새인 율법사가 관심을 보인 것도 이것인데, 특별히 그는 이것을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미끼로 사용하였다. 율법의 이름으로 율법의 주인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좀 더 들어가 보면, 앞서 때마다 일마다 예수님을 향해 질문을 빙자해서 그와 그의 사역과 행하시는 일들을 비난하고, 공격하고, 헐뜯고, 죽이려 달려들고, 그러면서 어찌하던지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지게 하려고 했었다.
■ 유대 종교 지도자들, 예수님을 시험하다.
[1] 정결 논쟁: 세리 마태의 집에서 함께 식사(마9.9-13)
[2] 귀신 논쟁: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마12.22-37)
[3] 전통 논쟁: 제자들이 식사 때 손 씻지 않음은 장로들의 전통 위배(마15.1-20)
[4] 세금 논쟁: 유대의 로마에 대한 세금 납부(마22.15-22).
[5] 부활 논쟁: 성경과 부활과 하나님에 대한 조롱과 모욕(마22.23-33)
→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을 압도하셨다는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힘을 모아 공격에 나섰다.”(34, The Message):
■‘그러면 선생님의 율법관, 곧 성경관은 무엇입니까?’(36)
그러면 지금 묻는 질문 역시 그런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 질문(시험, 35) 속에 들어있는 의도는 무엇인가. 왜 갑자기 율법에 대한 입장을 묻는 것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바리새인들 가운데 율법사가 갑자기 성경을 알고 싶었을까. 그러니까 진리가 궁금하고,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알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싶거나 깨닫고 싶어서였을까. 결코 아니다. 다시 더 교묘하게 시비(시험)를 거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 우리를 비난하고 정죄하는데, -그것도 율법의 이름으로, 모세의 율법을 모르는 주제에- 도대체 그럼 당신이 말하는 율법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시오?’
이것은 분명 진리에 대한 도전이자 사악하고, 그것도 율법의 이름으로 율법을 조롱하고, 자신들의 사사로운 이익과 목적을 위해서는 율법도 이용해 먹을 수 있는 그런 자들이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일이 성경, 그러니까 율법에서 비롯되고 있지만 그러나 이것이 순수한 동기에 의해서라고 할 수 없는 이유다.
마침내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무엇인가. 바리새인들을 비롯된 종교 지도자들이 복음서에서 보여주는 그런 무지는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다름 아니라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 바로 성경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사랑’이라는 대신적 사랑(37-38, 신6.5)과 ‘이웃 사랑’이라는 대인적 사랑(39, 레19.18)을 핵심으로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구약을 이해하는 핵심 중의 핵심이다(40). 이것이 십계명이지요.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의 삶의 기준은 ‘하나님 사랑!’이고, 이는 ‘이웃사랑’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어느 계명이 크냐는 그것보다, 또한 그것을 따지고 규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하라!”는 제일 중요한 계명을 따라 사는 것이다.
자, 그러면 이를 예수님께서 답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사랑하라는’ 계명을 이미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누누이 들어왔고 그래서 이 계명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맺었어야 할 삶의 열매는 없고, 단지 따지고 논쟁하면서 “이것이다, 저것이다”며 율법을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순서로 배열하는 일에만 시간을 써 버렸다. 그래서 성경 위에 전통을 올려 놓았다.
왜 이처럼인가. 율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율법의 전부라 할 수 있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에 대해 관심이 있을리 없다. 이렇듯 바리새인들처럼 사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예수님이 대답하신 말씀이다.
예수님 → 바리새인(41-46): 예수님의 자기 이해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42a)
이번에는 여러 가지 말꼬리를 트집 삼아 시험하기에 몰두해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께서 당신이 누구인가를 가르치신다. 많은 질문과 대답이 오갔으나 저들은 진리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여전히 오해와 무지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29).
이 질문에는 주께서 뜻하신 의도가 있다. 그것은 자신이 사람의 아들(다윗의 후손)인 동시에 다윗의 주요, 또한 만민의 구주이심을 밝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주님은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른 시편을 인용하시면서(43-45, 시110.1) 메시야, 즉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이지만 다윗이 주라 부는 구주이심을 증거하신다. 무엇을 통해서인가. 바로 성경을 통해서다(43-45).
예수께서 되받으셨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면,
다윗이 영감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이라고 부른 사실을
너희는 어떻게 설명하겠느냐?”
하나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여기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시110.1)
다윗이 그를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그가 어떻게 동시에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느냐?(43-45, The Message)
주님은 이제껏 자신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진리에 대해, 성경에 대해 오해하고 무지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경이 그리스도이신 메시야에 대해 누구라고 증거하고 있느냐 하는 주제다. 너희 바리새인들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닌, 그러니까 너희의 유전과 전통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이다.
부스러기 묵상
율법의 핵심은 사랑이다.
주님은 지금 자신을 시험하고, 그리하여 결국에 가서는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갈 사람들 앞에서, 성경이 말씀하는 제일 크고 으뜸이 되는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라 선언하신다. 그렇다면 이처럼 사랑을 요구하신다면 주님도 끝까지 사랑을 다 이루기 위해 자기 몸을 아낌없이 드림으로써 사랑의 법을 완성하실 것이다. 이것은 헛된 말이나 전통만을 앞세우는 바리새인들과 다른 것이다. 또한 이것이 마태복음이 변함없이 보여 줄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주님은 그리 사실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주님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셨다. 같은 마음으로 이웃, 곧 사람을 사랑하셨다. 이를 위해 지금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고 계시는 중이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까. 율법을 가장 잘 안다는 율법사마저도 사랑이 가장 중요한 계명인 줄 모르는 것, 그러니 전통과 유전을 성경보다 위에 놓는 것이다. 이미 구약을 가지고 있음에도 사랑의 법이 아닌, 그렇기에 하고 있는 일이란 것이 율법의 이름으로 시험의 이유를 찾고 있다.
율법 안에 숨쉬는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리니까 형식화되고 외식화되어 장로의 유전과 전통주의라는 죄에 빠져버렸고, 율법의 핵심인 사랑을 맛보지 못하니까 하나님을 위해 목숨 걸고 사는 일에 실패했으며, 그만큼 하나님의 뜻과 멀어진 사람의 뜻을 추구하며 살아와 버렸다. 그럼에도 빛바랜 율법을 붙들고 있고, 변질시켜 버린 율법의 이름으로 율법의 주인을 죽이려 하는 죄의 악순환만 거듭되고 있다.
주님은 오늘 아침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다. 사랑으로 주님과 이웃 앞에 서야만 바리새인들처럼 되지 않는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잃어버리면 우리 역시 바리새인들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