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세상이 복음을 흔들 때, 그래도 십자가 곁인가?(마 22.15-33)

20230122(양무리교회)

  

 

 

세상이 복음을 흔들 때, 그래도 십자가 곁인가?

Matt. 22:15-33

 

 

    본문 관찰

 

    바리새인들 헤롯 당원들(15-22)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23-33)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너희가 오해하였도다

    성경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포도원을 망가뜨리는 악한 여우들

 

저들(바리새인, 헤롯당, 사두개인)의 공동의 적()은 오직 예수님이다.

놀랍게도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악한 거짓으로 덮고서(16,24) 자신들의 정체를 위장한다. 그런 후에 예수님, 곧 진리와 생명을 공격한다. 이들은 인간적이자 정말 악하고 정욕적이며, 자기들 마음대로 쓴 <내가복음>으로 무장한 자들이다. 그러니 성경도, 하나님도 결국 자기 식대로 생각할 뿐이다.

이처럼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복음을, 교회를, 십자가를,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인을, 기독교를 흔들지 않을 때는 없었다. 바로 이럴 때, 그래도 우리는 십자가 곁인가? 주와 복음을 위해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가. 십자가를 지고 주를 묵묵히 따르고 있는가. 이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통해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도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즉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과 사두개인들에게서 이러한 공격과 비판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악한 시험, 그리고 성경에 대한 오해

 

[4] 세금 논쟁(15-22): 유대의 로마에 대한 세금, 어찌해야 하는가.

[문] 바리새인들, 헤롯 당원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민족주의와 유대주의라는 악한 올무를 통해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다.

[답] 예수님 -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사람들은 자기가 믿지도 않는 말을 이처럼 넉살 좋게 그럴듯한 말로 포장한다. 하지만 세상은 정작 성경(진리)을 모르기 때문에 헛되고 거짓된 말들을 하면서도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함정에 빠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주님은 이런 저희의 악함을 아시”(18a)기에 이처럼 말씀하신다: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18b) 감히 주님을 악한 올가미에 집어넣는 시험을 하려 들다니 어이가 없다. 사실 저들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17b)에만 관심을 가졌다.

정작 저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1b)는 말씀이다. 인간의 삶에 필요한 모든 주제들을 하나님과 연결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시험하려고 질문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5] 부활 논쟁(23-33): 성경과 부활과 하나님에 대한 조롱과 모욕

[문] 사두개인들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부활이 없다는 자들이 이번에는 종교적인 주제로 진리와 예수님을 비난하고 조소하고 조롱한다.

[답] 예수님 -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23-28)를 묻는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말씀을 가지고 와서 인용하고는 있는데, 문제는 믿지도 않는 것에다가 그 말씀을 붙여서는 그럴듯한 논리까지 엮어서 꼼짝없이 함정을 만든다. 거듭남을 맛보지 못한 자들의 손에 들려진 성경 말씀(24, 25.5)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씁쓸하게 보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수단화할 수 있는 그런 간() 큰 죄인들이다.

이에 대해 주님의 진단이 절묘하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29) 잘못 오해(생각)하는 이유는 무지에서 비롯된다. 이렇듯 성경을 문자로, 지식으로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낳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세상의 소리가 얼마나 이처럼 성경도,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은가.

 

 

그렇다면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하고, 그 반대로 걷는 사람들이다.

진단: 과연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드는가?

처방: 거짓과 위선에 대한 예수님의 처방은 무엇인가?

 

마태는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4.17)에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라 천국을 향해 주와 함께 한 자들이 다수이지만, 그러나 중간중간에 전혀 이질적인,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처럼 하나님의 나라 쪽이 아닌, 그 반대로 언행하는 사람들을 클로즈업하듯 보여주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이들을 이처럼 실족하게 하는가이다. 그렇다면 복음을 따라 천국대로를 걷는 자들이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이겠는가를 뒤집어서 생각하게 한다. 몇 가지 이야기에서 이를 정리해 본다.

 

[1] 정결 논쟁: 세리 마태의 집에서 함께 식사(9.9-13)

[문] 바리새인들 -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11) 그러니까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꼴을 보니 너희 선생의 수준이나 격을 알만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너희와는 다르다는 권위주의와 특권의식, 그리고 분리주의라는 사악함이 들어있다.

[답] 예수님 – ① 세리와 죄인들처럼 병든 자를 치료하고 회복할 자는 의사는 예수님 자신이다라고 하신다(12). 치료자(천국, 복음)는 너희가 아니라 예수님이다. 그러니 너희 바리새인들은 건강한 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너희는 치료자이신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겠는가. 병들었으나 나를 통해 치료된 죄인들이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자를 원하지 아니하노라.”(13, 6.6) 여기서, 너희들이 하나님의 나라 밖에서 죽어가고 멸망 당하는 길로 가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은 없고 종교 형식과 의식만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신다. 하지만 예수님은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죄인들 안으로 들어가신다. 이것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차이다.

 

[2] 귀신 논쟁: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12.22-37)

[문] 바리새인들 -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24) 무슨 프레임인가: 예수는 귀신이나 잡신 등 수 많은 사이비 중 하나다. 결국 귀신과 동일하다는 식으로 정죄한다. 그러면 예수님은 메시야가 아니라 귀신의 다른 이름을 가진 귀신의 능력자라는 뜻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렇게 되면 결국 예수님도 귀신의 힘을 빌어 능력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때문에 예수님이 귀신의 아류일 뿐이 되고 만다.

세상은 지금도 늘 이처럼 이야기한다: 결국 종교는 다 같은 것 아니냐. 착하게 잘 살고, 건강하고, 복 받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말고, 좋은 사람되자는 것 아니냐.

[답] 예수님 하지만 예수님은 진리의 복음과 사탄을 분명하게 구별하신다.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바알세불(사탄)을 힘입어 귀신(사탄)을 쫓아내면 사탄끼리 싸우는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사탄의 나라가 서겠느냐.”(25-26) 그렇다면 주님은 성령을 힘입어 사탄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하시는 분이시다(28). 따라서 지금 누가 사탄의 지배와 그의 나라를 따르는 자인가가 백일하게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3] 전통 논쟁: 제자들이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함으로 장로들의 전통을 범함(15.1-20)

[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함으로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2) 이 말은 진정 예수님이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가장 기본적인 유대 전통을 따르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라는 비아냥이다.

[답] 예수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3) 무슨 말인가. 전통(풍습, 관습, 인권, 세상 법)이 성경 위에 있을 수 없다. 그 증거로 하나님의 말씀 두 가지를 예로 드신다: (1) 네 부모를 공경하라(20.12, 5.16). (2)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21.17, 20.9). 그런데 <고르반>(5)이라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6) 자들이 바로 너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신다. 놀라운 것은 사람이 만든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너희들로 말미암아 무너지고 있이다라고 하신다.

 

 

부스러기 묵상

 

세상이 복음과 그리스도와 교회를 반대하고 거절하고 비난한다.

예수님 시대에만이 아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다. 무엇 때문인가. 놀라운 것은 그 이유를 주님은 복음과 교회의 문제나 상황에서 찾지 않는다. 그럼 어디서인가. 악하고 죄 가운데 있는 자들, 또 성경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들에게서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백성들과 그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높이고 받들고 찬양하고 따르지 않는다. 가장 종교적인 언어와 질문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나 사악하고 완악하게도 이를 도구 삼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와 성도들을 무너지게 하는 일에 온 에너지를 집중한다.

이런 세상과 사탄의 전략 앞에,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언행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일에 헌신하고 이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지금도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를 흔들어낸다.

그러나 십자가 곁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에게 그 길을 찾는다.

동시에 십자가의 사람은 성경에서 그 길을 찾고, 믿고, 그 길을 따라 행한다.

 

#참고([1]-[5])

[1] 정결 논쟁: 세리 마태의 집에서 함께 식사(9.9-13)

정결하지 않고, 죄인이라 칭하는 자들에게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있다. 전쟁과 재난과 사회적 약자의 인권과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곳에 복음과 교회는 늘 함께 한다.

 

[2] 귀신 논쟁: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12.22-37)

하나님의 성령이 어두운 권세를 멸한다.

 

[3] 전통 논쟁: 제자들이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함으로 장로들의 전통을 범함(15.1-20)

조상들의 전통과 문화라는 앵글에서 온갖 사이비 문화와 미신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언행되이 어지는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다.

 

[4] 세금 논쟁(15-22): 유대의 로마에 대한 세금, 어찌해야 하는가.

세상 나라에 사는 자로서 해야 할 국민으로서의 의무(납세, 국방, 준법 등)를 성실하게 행하고, 그러나 여기서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간다.

 

[5] 부활 논쟁(23-33): 성경과 부활과 하나님에 대한 조롱과 모욕

비록 세상이 종교적 주제를 믿지 않으면서도 성경을 인용하고, 예수의 이름을 넣어서 결국 기독교를 조롱하고 비난하고 공격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동시에 성경을 아는 바른 지식에 서 있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답

 

1.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베드로마저 예수님을 부인하는 초유의 상황이다.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만이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 흔들리고 사람들 주를 떠나는 바로 그때에,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있다. 그게 무엇인가.

주께서 말씀하신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22.31-32)

 

2.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마침내 십자가와 복음에 원수로 살다가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처지가 유대인들이자 온 인류다. 오늘 주제로 다시 담아보면, 교회와 복음과 그리스도를 비난하고 반대하고 욕하며 십자가의 원수로 살았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설교자 베드로 사도를 통해 말씀하시는 메시지를 듣고, 마침내 희망과 소망이 열리고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2.37b) 그러자 놀랍게도 새롭고도 산 길이 열린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2.38)

그런데 이 약속은 시간적으로 사람들에게나 특정하게 제한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이어지는 말씀이 절정이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의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여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2.39-40)

 

그리스도와 복음을 대적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자들에게 과연 무슨 소망이 있을까. 그런데 주님은 그런 세상 한 복판에 육신을 입고 오셨고, 그들로부터 모진 모욕과 고난과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신다. 세상은 교회를 없애고, 십자가를 끌어 내리고, 믿음을 떠나게 만들고, 교회 문을 닫게 만든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 세상을 향해 용서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다.

이 십자가의 길이 생명의 길이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길은 사망과 저주의 길이다. 어느 길을 걸어가야 주님을 만나고 뵈올 수 있을 것인가.

 

    세상 흔들리고(고형원 작곡)

 

    1. 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사랑은 영원하 변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2. 믿은 흔들리고 사람들 주를 떠나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나라는 영원히 쇠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후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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