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18(묵상)
천국 잔치에로의 초대
Matt. 22.1-14
본문 관찰
초청장1(1-7): 청함 받은 사람들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잔치에 오라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 혼인잔치에 오소서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 밭으로 가고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 진멸하고 … 불사르고
초청장2(8-14): 만나는 대로 청함을 받다.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여 오라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임금이 …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혼인잔치의 비유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
O – 혼인 잔치를 베푸는 왕과 같다.
X –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는 자들과 같다.
X – 혼인 잔치를 수종드는 종들과 같다.
X – 혼인 잔치에 만나는 대로 데려온 자들과 같다.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을 위해 결혼 잔치를 베푸는 왕과 같다.”(2, 우리말성경)
잔치를 베푸는 왕과 그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의 언행이 변화무쌍하게 그려지고 있다. 집요하리만큼 잔치다움을 고집하는 임금, 그리고 철저하리만큼 잔치다움을 거부하는 청함을 받은 사람들, 여기서 우리는 정말 이렇게 잔치를 취급해도 되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사람들의 마음이 잔치로부터 떠나있음을 보게 된다. 다름 아니라 천국 잔치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청함 받은 사람들1(1-7): 잔치에 오기를 싫어하다.
혼인잔치에는 초대한 사람들을 부른다. 임금은 “종들을 보내어 …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청한 사람들을 혼인잔치에 오라 하였다. 잔치에로의 초대는 청함 받은 자들을 부르는 종들이 아니라 천국 잔치를 베푼 임금이다. 또한 아무나에게 잔치 자리가 허락된 것이 아니라 초청한 사람들이 따로 있었다. 무엇보다 ‘모든 것’(4)이 다 준비된 그런 잔치였다. 아들의 혼인을 축하하는 잔치에 초대한 것은 임금의 특별한 배려요 사랑이요 관심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청함 받은 자들’ 곧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은 왕이신 하나님이 베푼 잔치에 오기를 싫어하였고(3), 종들 곧 선지자와 제사장과 율법인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들은 척도 않는 자들도 있고(5), 혼인잔치가 아니라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밭, 장사)을 선택했으며(5), 또 임금이 보낸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여 버리는 사람들까지 있었다(6). 핵심은 이것이다.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과 초대보다 더 귀한 것이 있었다는 얘기다. 하나님보다 귀한 것이 있다? 이게 지금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올라온 예루살렘의 실상이다.
한 마디로 임금의 초청을 우습게 여긴 것이다. 그러니까 왕의 잔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일에만 온통 시간과 정열을 집중하며 살았다. 삶의 우선순위가 임금의 잔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임금은 임금이고 나는 나라는 철저한 이기주의는 물론이고, 하나님보다 세상 나라의 잔치에 취해 있는 이스라엘의 실상, 그러니 임금일지라도 내가 선택한 결정에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고, 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임금의 초청보다 더 중요하다는 완악함과 교만이 저들의 본심이었다.
[청한 사람들1] → “임금이 노하여 …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게 된다(7)
▪천국의 잔치보다 ‘내 밭’(부동산)이 더 귀하고 소중하다.
▪천국의 잔치보다 ‘내 사업’(비지니스)이 더 소중하고 귀하다.
그러니 임금이 보낸 종들을 죽여 버리는 것 아닌가(6).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면 없애버리는 것이 가장 확실한 승법(勝法)이라 생각하는 살인자들이 바로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임금의 뜻을 전하는 전권대사(全權大使)를 죽인 것은 더 이상 이런 요구를 하지 말라는 선전포고(宣戰布告)와도 같은 것이다. 세상에 겁이 없어도 유분수지, 지금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여기까지 높아져 있고, 왕과 대결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자리까지 나아가 버렸다.
사람은 자기의 행위가 자기 무덤을 파는 자충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른다(7). 맘먹은 대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떵떵거리지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생 시간표다. 그것도 임금의 뜻을 거스르고 그 어깨를 임금과 나란히,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허세를 부렸으니 그게 그대로 부메랑이 되어 죽음(심판)으로 그 값을 치르게 되는 것 아닌가.
왕의 초청장(8-14): 만나는 대로 청함을 받다.
마침내 임금은 자신이 베푼 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1-7) 곧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유대인들은 더 이상 이 잔치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고 판단한다(8). 그럼 잔치는 어찌 되는가. 초대받은 사람들이 거절하면 있어야 할 잔치가 없어지기라도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잔치는 계속된다. 임금이 베푼 혼인 잔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잔치는 특별하게 초대받은 사람에게서 이제는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9), 그러니까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초대하는 것으로 임금의 명령이 새롭게 하달된다.
이제 잔치의 초대석은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다. 임금의 명을 받아 외치는 자들의 소리를 듣고 잔치에의 초대 앞으로 나아오기만 하면 된다. 종들은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이 가득한지라.”(10) 이제는 종들도, 초대받은 사람들도 모두가 다 임금의 기대와 요구에 충실하였다. 그래서 일이 제대로 된 것이다.
천국 잔치는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간다. 누구나 청함을 받아 잔치에 들어온다. 하지만 들어온 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 이후에 왕은 결정적인 조건을 제시한다. 다시 진짜 핵심은 이것이다; 천국 잔치는 종들이나 잔치에 들어온 자들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인가. 오직 왕이신 하나님에 의해서다.
부스러기 묵상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계19.7b-8)
→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4)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6.11)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 옷 입고”(골3.12)
‘다시’(1) 비유로 대답하시는 것에 뭔가 실마리가 있다.
바로 앞 21장에서 주님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계셨다(21.23,33,45-46). 그리고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1) 말씀하신 것이 이어지는 본문이다. 그렇다면 ‘처음’(1-7) 초대받은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아브라함의 후손, 바로 유대인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그 많은 선지자들과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을 통해 임금(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대한 말씀이 선포되었음에도 그것보다는 자기 멋대로 살았고, 심하게는 왕의 잔치를 알리는 그분이 보낸 종들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의 잔치에는 아무런 관심도 마음도 생각도 없었다.
지금 예수님이 오신 예루살렘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지금 주님으로부터 이 설교가 선포되는 시간에도 메시야를 죽이려는 자들이 저들 아닌가. 주님을 지금 이처럼 하찮게 생각하는 것이야 초대받은 사람들의 자유(선택)일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에 대한 대가는 분명 임금(하나님)으로부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치르게 될 것이다. 불행하게도 저들은 이 복음의 소리를 외면하였다. 지금 이 시대 역시 그렇다. 예나 지금이나 모두들 전부가 다 자기 마음과 생각 대로다(5-6).
한 가지 난해한 문제는 ‘새로’(8- ) 부름 받은 사람들, 그러니까 이방인들 가운데 잔치에 걸맞은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다는 점이다(11-12). 그러면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게 무얼 의미할까(11). 어쩌면 사거리 길에 나가 갑자기 청해 온 사람들이었기에 잔치에 올 때 무슨 준비를 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유대의 혼인잔치에는 잔칫집 입구에서 하객들에게 예복을 한 벌씩 나누어준다는 게 정설(定說)이라면, 그렇다면 그는 천국잔치에 합당한 준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저버린 경우가 아닌가.
하지만 이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요한계시록의 도움을 받아본다. 어린양의 혼인잔치(계19.6-10)를 묘사한 내용에 이런 부분이 있다: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7b-8) 그렇다면 예복을 입지 않는 한 사람은 그 자신 스스로가 혼인잔치에 걸맞은 모습(행실)을 나타내 보일 수 있도록 살았다는 것에 대해 아무런 대답(시인, 고백)을 할 수 없는 자였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유구무언(有口無言, 12)으로, 동시에 예복을 입지 않은 행실 그대로 자신의 자격 없음을 드러내 보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천국 혼인잔치에는 아무나 가는가? 그렇게 생각했다가는 큰 코 다친다. 그 경우를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에게서 톡톡히 깨닫게 된다. 내가 이 땅에서 살았던 내 삶, 곧 ‘옳은 행실’이 내가 혼인잔치에 입을 옷이라는 요한의 계시가 다시금 나의 나됨을 돌아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