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2(묵상)
무화과나무와 믿음
Matt. 21.18-22
본문 관찰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열매 없는 세대
무화과나무 저주_월요일(21.18- )
-베다니(21.17)
→ 무화과나무 저주(21.18-19, 참고. ‘이튿날’, 막11.12-19)
두 이야기가 하나의 사건 안에 들어있다.
둘 다 무화과나무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하나(A, 18-19)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자 곧 말라 버린 기적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B, 21-22)는 그 사실을 본 제자들이 ‘어찌하여’(어떻게, 20) 말라버렸는가를 묻자 주님께서 믿음이 있으면 이 일뿐 아니라 그 이상의 일도 할 것이라는 교훈이 그것이다.
한 무화과나무(a Fig Tree)의 비극
“보라 너희가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23.38)
베다니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때가 이른 아침이었는지라 시간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시장하셨다(17-18). 그래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먹을 것)를 얻으시려고 하셨으나 잎사귀 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19)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나무가 곧 말라버리고 말았다.
먼저 이 기적에는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가지신 주님의 모습이 그대로 들어있다. 예수님 역시 배고픔을 느끼시는 사람이시며, 동시에 잎이 무성한 나무를 말씀 한 마디에 뿌리부터 말라 죽어버리도록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렇듯 이 사건을 기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뒤에 이어지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에서 분명해진다(21).
결국 같은 맥락에서 지금 이 때가 유월절을 앞둔 4월 무렵이기 때문에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막11.13b)는 마가의 관찰을 따른다면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는 말씀의 틀에서 이해하기에는 좀 불편하다. 결국 열매 없음이 심판의 기준이 아니다(심판의 기준이 행위인가?)는 점에서 볼 때 핵심은 주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목적하는 의도가 무엇일까, 그리고 왜 이렇게 하셨을까를 고민하는 것보다는 이것을 단순하게 하나의 기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너희가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면
다른 한편으로, 열매 없는 삶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이 기적에 담아내고 계시다는 것은 그리 낮설어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런 긴장은 늘 가지고 있는 게 좋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기적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단지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그것도 “어떻게 갑자기 말라 버렸습니까?”(20, 현대인의성경)에만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주님은 단순히 나무가 말라버린 하나의 사건에만 집착하지 않기를 기대하신다. 제자들이 할 일은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21a) 이 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은 단순히 기적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느냐, 이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어떤 방법은 무엇이냐가 이 사건에서 더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신다.
그렇지 않다면 그럼 무엇인가. 그것은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21a)이다. 앞서 행하신 기적만이 아닌 다른 일들도 능히 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과연 누가 이 일을 한다는 말인가. ‘믿음’의 사람이다. 주님은 눈을 좁혀 단지 벌어진 기적 하나만으로 시야가 좁혀지기를 원치 않으셨다. 좀 더 주님의 안목으로 볼 수 있기를 기대하셨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단지 말라버린 나무만을 보는 것,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는 방법론적 접근이 아닌 믿음의 세계를 볼 수 있기를 말이다. 또한 믿음이 실상이 되는 것은 물론(21),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22) 하신다. 기적 너머에 있는 믿음의 세계, 그 믿음의 세계를 좀 더 확장시키는 기도의 자리까지를 내다보며 살기를 부탁하신다. 참으로 멋진 일이다.
부스러기 묵상
그럼에도 이런 추측은 해 볼 만 하다.
하지만 매우 조심스러운 것은 기적 이후에 하신 주님의 대답에서 이런 생각을 하게 할 근거들을 찾을 수 없다는데 고민이 있다. 만일 이게 이 기적의 본래 목적이었었다면 전후(前後) 문맥에서 이것이 부각되는 것은 당연하다. 얼른 보아도 단지 열매를 찾았으나 없는 것 때문에 기분 나빠서 저주한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었을 것이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벌어진 일이었기에 이스라엘에 대한 복선(伏線, 암시)도 거기에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단지 이쪽에서 A(18-19)를 보면 B(21-22)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A는 제자들과 유대인들에 대한 메시지를, 그리고 B는 기적이 어떤 방법론으로 이해되어질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각각 담고 있는 한 사건에서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라고 한다면 이 사건의 지평은 훨씬 달라질 것 같다.
주님은 제자들의 관심과 시선을 ‘믿음’으로 옮길 것을 말씀하신다. 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세계는 ‘어찌하여’를 붙들고서 연구하고 방법을 찾는다고 되는 게 아니고 ‘믿음’의 세계다. 믿음은 나무 하나 마르게 하는 것 그 이상이며, 또한 그 이상의 세계를 보게 하고, 그래서 그 너머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주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고난주간이라는 큰 그림을 믿음으로 보고, 그것이 저들에게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신다. 마침내 무화과나무 기적에서 더 큰 세상이 믿음 안에서 열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