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성전다움을 회복하십시오(마 21.12-17).

20221030(양무리교회)

  

 

 

성전다움을 회복하십시오.

Matt. 21.12-17

  

 

    본문 관찰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성전정화

 

    ▪예루살렘 노중(路中) 예루살렘 입성_종려주일(21.1-1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23.37-38)

 

예루살렘과 그 성전에 오셔서 이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23.37-39).

성전은 황무하게 무너져 있고, 그러니 있어야 할 사명과 거룩은 온대간대 없다. 반대로 속되고 죄악된 이 세상의 냄새로 가득한지 이미 오래다(12-13).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병들어 있으나 성전은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14a). 이게 화석화되고 관료화되고 상업화된 성전의 실상이다. 그러니 성전의 주인이며 성전 자신인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보지 못한다.

주님에 의해 잠시 성전이 회복되는가 싶더니 곧바로 종교꾼들의 저항을 만난다(14-15a 15b). 여전히 말씀과 생명으로부터 완벽하게 멀어져 있는 성전을 확인하게 될 뿐이다(16). 마침내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유가 서서히 드러나는 순간이다.

 

 

성전신학(聖殿神學)

 

, 그러면 성전이 무엇이기에 12절의 모습에 분노로 반응하시고, 13절이라는 모습을 제시하시는 것일까. 그렇다면 성전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의 언행을 들어보면 지금 성전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먼저 성전을 알아야 하고, 그러면 어디에서 어디까지 길을 떠났고 무너져 있는 것인가를 알 수 있다.

 

[1] 아벨의 제사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4.3-4a)

    →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4.4b-5a)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11.5-51a)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성막(성전, 제단)과 제사(제물, 제사법)에 대한 율법이 주어지기도 전에 제사장(아벨), 제물(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제단에서 이를 하나님께 올려드렸다는 것이다. 동시에 성막과 성전 시대처럼 이에 하나님이 오셔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 이러한 틀에서 출애굽 이후 모세의 장막이 주어지기까지 계속된다.

 

[2] 여호와의 성막

이스라엘 자손이 이와 같이 성막 곧 회막의 모든 역사를 마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모든 역사를 마치매, 모세가 그 마친 모든 것을 본즉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되었으므로 모세가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39.32-43)

    → 구름이 성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40.34)

 

[3] 솔로몬의 성전

다윗이 성전의 모든 설계도를 주고,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이 모든 일의 설계를 그려 나에게 알려 주셨느니라.”(대상28.11-19)

    →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드는 모든 일을 마친지라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시온에서부터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본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

          …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대하5.1-13)

 

여기서 하나의 공통점[1-3]을 찾아보자. 첫째, 하나님이 명하시고 이를 아벨, 모세, 다윗과 솔로몬이 그 말씀대로 준행하는 그림이다. 물론 아벨의 제사에는 이 부분이 드러나 있지 않지만 레위기 제사법과 성막이 오기 이전에도 아벨 제사를 시작으로 출애굽하기까지 하나님께 드린 무수한 제사를 하나님이 흠향하셨다(받으셨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아벨의 제사에 친히 임재하신 것은 이미 그가 드린 제사를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아벨의 제사에 찾아오신 것과, 성막과 성전에 찾아오신 것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연속적이다.

둘째, 하나님은 바른 제사와 예배에 임재하신다. 하지만 반대로 거룩과 경건을 잃어버리고 죄악의 모습을 보여줄 때는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될 것이 예고되었다. 이는 성전건축을 마치고 성전봉헌식을 올려드린 날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이르”(대하5.11-22)신 말씀에 분명히 선언되고 있다.

    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14a)

      *14b-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15이제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늘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② 그러나 너희가 만일 돌아서서 내 율례와 명령을 버리고’(19a)

      *20a내가 너희에게 준 땅에서 그 뿌리를 뽑아내고

      *20a내 이름을 위하여 거룩하게 한 이 성전을 내 앞에 버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해 올라오신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보여주는 모습에는 하나님의 임재는 물론 바른 제사와 예배를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성전 뜰은 시장과 광장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진짜 놀랍고도 놀라운 사실은 심판 받아 마땅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우리 주님의 언행이다. 진정 그분은 진정한 성전의 회복을 성취하고 완성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메시야가 친히 이 땅에 오신 것이다.

 

[4] 성전이신 그리스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1.14a)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르켜 말씀하신 것이라.”(2.20,21)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21.22)

 

그렇다면 오늘 소위 <성전청결사건>은 무엇인가. 허물기 위함인가, 세우기 위함인가. 인간의 부패한 심령과 죄악된 돌로 세워진 성전을 허물고, 진정한 성전이신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세우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에서다.

 

 

기도하는 집(12-13)

 

거룩과 하나님의 임재를 사악한 거짓으로 가장하여 당당히 활보하는 거짓된 위선의 몸부림만이 가득한 것만을 보여주는 성전이다(12). 물론 솔로몬의 성전이 처음 세워졌을 때는 이처럼 세속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적 편리주의, 형식주의, 위선적인 가증한 습관이 시간이 지날수록 부정적으로 자리잡으면서 그 결과로 점차 이처럼 되지 않았나 싶다.

성전세를 내려면 이방의 화폐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환전(換錢)이 필요했을 것이고, 멀리서 짐승을 몰고 오기에는 도중에 흠이라도 생기면 제물로 인정이 안 되는 등 번거로움이 많았기에 예루살렘에 와서 매매하면 좋겠다 해서 생겨났을 것이고, 뭐 경기(살림)도 좋지 않는데 최소한 비둘기라도 드려야겠다 싶어서 찾는 자들이 많았기에 그걸 파는 자들이 하나 둘 생겼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제사장들의 묵인이 없었다면 성전 뜰까지 들어올 수 없었다. 그렇다면 보이는 장사꾼들만이 아닌 그 뒤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이득을 취하는 보이지 않는 장사꾼으로 전락한 성전 관리인들 때문에 거룩한 성전이 불가불 이처럼 부끄러운 곳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대의 범죄자는 바로 성전을 맡아 관리하는 종교지도자들이다. 그만큼 성전마저도 경제와 세상의 상업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게 타락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기도하는 집’(내 집)강도의 소굴’(너희)로 만드는 암세포(癌細胞). 하나님은 기도하는 집’()을 원하셨으나 사람들은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13, 56.7). 성전마저도 자기 이익과 배를 채우는 것으로 전락시키면서까지 말이다. 이게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하나님을 경험(체험)하는 곳,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입는 곳,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는 곳으로 세워졌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껍질만 남은 성전, 그 결과 더 이상 사람을 살리는 생명은 그 빛을 잃은 지 오래다.

 

 

치료하는 집(14-17)

 

그러나 주님은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성전이 어떤 곳이며, 무엇을 위해 세워졌는가를 보여주신다. 먼저 치료하는 곳으로서의 성전의 회복이다(14). 영육(靈肉)의 질병이 깨끗해지는 곳이다. 장사치들이 버글거리는 곳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다. 약하고, 추하고, 상처받고, 씻음 받아야 할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 모든 어두움의 것들로부터 자유해 지는 곳이 성전이다. 주님은 참 성전이신 당신 앞으로 나아오는 자들을 치료하신다.

또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15b)로 시작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미의 제사가 드려지는 곳이다: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16b, 8.3) 죄사함과 거듭남에 대한 감격, 이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향한 찬미, 모든 죄의 파편들로부터 자유를 선언 받은 자로서의 환희, 바로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천국의 임재를 경험하는 곳, 이곳이 주님의 몸된 성전의 본래적 모습이다.

하지만 이미 이런 것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길을 걸어가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는 이것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15a) 정도로 밖에 인식되지 못했다. 불쌍한 몰골이다. 이게 거짓 종교지도자들의 실상이 아닌가. 그러니 이상한 나머지 분노할 수 밖에(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을 보고 노하여

그래도 명색이 예루살렘 성전을 맡은 종교지도자들이다. 하지만 보고 들은 적이 없이 자리(직분)만 높아졌으니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들이 이상한일이요 소리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이렇듯 지금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지만 그것을 알 수 없는 영적인 까막눈들과 주님으로부터 새롭게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14a 16b).

어쩌면 예나 지금이나 하등 달라질 게 없는 그림이다. 성전이신 주님으로부터 영적인 눈을 뜨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종교적 기득권에 빠져서 이미 성취되어 흘러가는 말씀의 강물조차 볼 수 없을 만큼 영적으로는 죽은 자와 방불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뒤섞여서, 그 결과 서로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곳이 오늘날의 성전이어서 말이다.

 

 

부스러기 묵상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12.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하나님의 성전인 나를 생각해 본다.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거짓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들을 향해 돌을 던질 만 한 아무런 자격과 힘이 없는, 저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죄인인 것을 부끄럽지만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좀 다른 게 있다면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것이고, 그것을 내 노력과 공로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다르다면 다르다. 어쩌면 그만큼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겸손의 틈새가 아닌가 싶다.

또한 기도하는 집으로도 회복되어야 한다(13a).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전으로 회복되기도 해야 한다(16b). 주님이 내 안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에 모든 영육(靈肉)의 질병이 다 치료된 깨끗한 성전으로 거듭나야 한다(12a,14). 성전다움의 모습으로 주님께 드려지는 것이 우리에게 있는 소원이어야 한다.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도록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오셨듯이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찾아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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