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예루살렘, 호산나! 호산나!(마 21.1-11)

20021111(묵상)

  

 

 

예루살렘, 호산나! 호산나!

Matt. 21.1-11

  

 

    본문 관찰

 

    주가 쓰시겠다 하라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온 성이 소동하여

       이는 누구냐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승리의 입성

 

    수난예고

    [1] 가이사랴 빌립보(16.13)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16.21/1)

        → [2] 갈릴리(17.22/2)

            → [3]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노중(路中)(20.17-18/3)

 

마침내 고난주간 첫째 날(종려주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십자가를 지기까지 마지막 한 주간이 시작된다. 한편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으로 시작된다(5, 9.9). 이 대목에서 중요한 변화는,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의 메시야이심은 비밀이 아니다는 점이다(16.20 21.4-5,9). 예루살렘에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으로써 당신의 메시야됨을 공개적으로 알리신다(7-10). 그런데 놀랍게도 흥미로운 것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환영한다. 마침내 때가 찬 것이다.

한편 승리하실 메시야이심에도 그 시작인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초라하다. 로마의 개선장군 행렬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나 세상이 속는 부분이 여기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오히려 바로 앞, 20장에서 맹인은 예수 그리스도 곧 예수 메시야를 보고 있다(20.29-34). 그뿐 아니다. 마침내 호산나! 호산나!”를 외치며 온 예루살렘 시내가 우리들 구원하소서!’로 가득찬다(8-9).

두 무리가 있다(8-9 vs 10-11). 다름 아닌 첫 번째 무리, 곧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9; 118.25 참조) 그렇다. 이제 온 이스라엘이 메시야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오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두 번째 무리(10-11, 예루살렘 백성들)의 반응이 대조되고 있다: 무슨 일이요? 이 사람이 누굽니까?”(11b, The Message) 그렇다면 이것은 곧 앞으로 전개될 예루살렘에서의 메시야 행전의 숨막히는 긴장을 예고하는 듯하다.

이 둘의 팽팽한 긴장이 흐르는 예루살렘으로 주님을 따라 들어오는 행렬에 오늘 우리도 함께 하며 예배하고 있다. 그러면 나는 첫 번째 무리인가(1-9). 아니면 두 번째 무리인가(10-11). 그러면 우리가 따라야 할 무리들의 모습을 살펴보자.

 

 

주가 쓰시겠다하라!

스가랴 99

 

     [첫 번째 무리(1)]

    ∙스가랴 선지자(4-5)

    ∙나귀와 나귀 새끼(2)

    ∙나귀 주인(3)

    ∙제자들(1-2,6)

 

주님은 이번 예루살렘 입성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신다. 어린 나귀를 탄 임금이 오실 것을 알리는 스가랴의 예언(9.9)을 이루시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 말이다: 시온의 딸에게 고하라. 보라, 네 임금이 네게 오신다. 그는 온유하셔서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로다.”(5, 새번역)

이때 나귀와 그 주인은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위한 도구로 쓰여진다. “주가 쓰시겠다!”(3) 하실 때 그는 기꺼이 자신의 소유를 내어놓았다(6).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금새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어린 나귀를 소유한 그 주인 역시 지금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고 계시는 이가 메시야 곧 그리스도인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보라.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사람들이 나타나더니 다짜고짜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가려고 한다? 한바탕 난리가 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때 일어난 일을 마가는 이렇게 전해준다: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저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11.4-6)

 

무슨 말인가. 지금 예루살렘 사람들은 지금 자신들 앞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분이 누구이며, 누가 예루살렘에 오셨으며, 그가 무엇인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한 것에 같은 마음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가 쓰시겠다!’라고 하는 말을 알아 듣고, 이에 긍정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것이 예루살렘 분위기다.

그러면 나는 어떤가. 나에게 이처럼 요구한다면 과연 나귀의 주인처럼 그렇게 응답할 수 있을까. 솔직히 좀 자신 없는 부분이 아닌가. 그렇다면 무엇보다 주가 쓰시겠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응답할 것 아닌가. 사실은 내가 가진 것을 주께서 쓰시겠다 하실 때, 이것은 큰 축복이다. 그래서 볼품 없는 나를 통해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기꺼이 헌신해야 맞다. 주인이 필요하다 하시는데 종놈 주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주님은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나를 찾아오셔서 내가 너를 목사로 쓰고 싶다!” 하셨다. 즉시 응답하고서 지금껏 오직 한 길을 달려왔다.

지금 주님은 양무리교회를 부르신다: “주가 쓰시겠다.” 하나님이 부르신다. 주께서 쓰시겠다 하신다. 주의 말씀을 이루시고, 주의 영광이 이루어지는 것을 위해 쓰시겠다 하신다. 그러면 우리 입장에서는 쓰임을 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써달라고 강청하거나 원해서가 아니다. 주님께서 부르시고,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중요한 게 무엇인가. 이 주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응답할 믿음이 있어야 한다. 지금 예루살렘처럼 말이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첫 번째 무리(2)]

    ∙나귀와 나귀 새끼(7)

    ∙제자들의 겉옷을 나귀 등에 얹음(7)

    ∙무리들 겉옷을 길에 폄(8)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폄(8)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소리 높여 호산나’(9)

 

, 놀라운 것은 이것이다. 겉옷들도, 나뭇가지들도, 나귀도 주가 쓰신다. 무엇보다도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를 외치는 사람들을 쓰신다. 그러면 우리 또한 쓰임 받지 말라는 법이 없다. 산천초목과 옷들도 이처럼 주가 쓰신다면 하물며 우리를 쓰시지 않겠는가.

이렇게 해서 주님은 바로 그 새끼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7). 마침내 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이다(4-5, 9.9). 나귀와 나귀 새끼를 소유한 한 사람의 헌신이 어떻게, 무엇으로 쓰이는가를 본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주님에 대한 환호성이 오늘 우리 귀에도 들리는 듯하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으라. 호산나,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이시여!”(9, 118.25-26)

호산나(Hosanna)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이번에는 예루살렘에 거하는 무리의 대다수’(8-9, 20.29)가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신 메시야로, 그가 자신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을 소리쳐 외치고 있다. 단지 소리쳐 외치는 것만이 아니다: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8-9)

 

마침내 십자가 복음, 메시야 복음이 온 예루살렘에 울려 퍼진다. 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되면서 예루살렘은 메시야의 입성을 무리의 대다수가 환호하고 찬양하고 있다. 그날 예루살렘처럼 우리 예배가 그렇다. 이것이 살아있는 예배다.

그러나 모두는 아니다. 비로 두 번째 무리들, 10-11절의 또 다른 예루살렘 무리들이다. 전혀 다른 소리다. 예루살렘 도시 전체가 동요한다: 무슨 일이요? 이 사람이 누굽니까?”(11b, The Message) 이것은 예루살렘의 분위기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써(11; 2.3 참조) 이제 시작된 공생애의 절정인 고난주간이 어떻게 이어져갈지를 예고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부스러기 묵상

 

제자들을 다시 생각해 본다.

주님은 이번 예루살렘 방문이 다름 아니라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러 가시는 고난의 길임을 여러 차례 예고하셨다(16.21, 17.22-23, 20.17-19). 하지만 제자들의 마음과 생각이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18.1, 20.20-21,24). 여전히 주님과 제자들은 동상이몽(同床異夢)이다. 천국은 이렇듯 주님(18.3-10 20.25-28)과 제자들(18.1 19.13 20.20-21,24) 사이에 끊임없는 긴장이다. 제자들의 못남 그 안에 천국을 가르쳐 주시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제자들 뿐이 아니다. 오늘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순간에도 환영의 호산나와 거부와 비아냥이라는 전혀 다른 소리는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주님은 죽기 위해, 구약을 성취하시면서 예루살렘 하신다.

주님에게서 놀라는 것은 제자들이 보여주는 모습만을 보시지 않으셨다는데 있다. 비록 지금은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투정이나 부리고 있고, 그래서 제자다운 모습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그러나 좀 더 멀리 보셨다. 이게 다 사랑의 힘이 아닐까. 그만큼 참아주시고, 또 기다려 주시기에 가능한 그림이다. 이로써 돌이켜 보면 주님의 은혜가 아닌 게 하나도 없다. 오늘 우리가 말씀 앞에, 예배 앞에, 성찬상 앞에 서 있는 것도 그렇다.

오늘 우리가 성찬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제자들처럼 부족하고 못났지만 이처럼 우리에게 주의 몸과 주의 피를 기념할 수 있는 은혜를 변함없이 베풀어 주심에는 이렇듯 주님의 깊은 사랑과 기다리심이 숨쉬고 있다. 그 기다림이 오늘 예루살렘 입성의 환호와 찬송으로 열매를 맺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 그 날이 오게 하실 것이다.

그 날이 우리에게도 주시는 은혜와 선물이 될 것을 바라본다. 이제 이 믿음으로 다같이 성찬상 앞으로 나아가자!

 

    주 예수 해변서 (198)

    1. 주 예수 해변서 떡을 떼사 무리를 먹이어 주심같이

        영생의 양식을 나에게도 풍족히 나누어 주옵소서.

    2. 생명의 말씀인 나의 주여 목말라 주님을 찾나이다

        해변서 무리를 먹임같이 갈급한 내 심령 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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