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25(양무리교회) 초안-20021108
공로 ≠ [천국] = 은혜
Matt. 20.1-16
본문 관찰
포도원에 품꾼 파송(1-7)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3시[9]에 … 6시[12]와 9시[3]에 … 11시[5]에도 … 포도원에 들어가라
약속한 임금 지급(8-10)
11시에 온 … 먼저 온 자들이 …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품꾼의 원망과 주인의 대답(11-16)
집 주인을 원망하여 … 나중 온 이 사람들은 …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 ] - 현재 우리 시간으로 환산한 시간)
포도원 품꾼 비유
자신의 공로를 앞세우는 공로주의자들의 몸부림이 19장을 온통 흔들어 놓았다.
이혼과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나는 내가 더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겠다’는 바리새인들이 선두에 서고(3-9), 율법주의자인 부자 청년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6)라는 구원을 향한 자기 공로에로의 절규가 그 뒤를 잇습니다(13-22). 여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더니 제자들까지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25)- 그만 흔들리고야 마는 장면이 이어진다(25-30). 이미 두 번에 걸쳐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메시야의 수난예고(16.21, 17.22-23)가 제자들에게 공개되었음도 불구하고 말이다.
문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에 의해 ‘구원(살림)’이 선언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인간의 공로에 의한, 그러니까 인간의 값싼 행위(‘자기 의’)를 통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본주의라는 깃발이 끊임없이 나부끼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은 바로 이런 행위 구원에 기초한 인간학에 유혹을 받고 있는 제자들에게 천국(天國)에 대한 바른 신학을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신다.
은혜의 논리(선물) vs 공로의 논리(댓가)
“나중 온 자로부터 …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8-12)
포도원 주인은 오늘날 시간으로 하면 오전 9시(3), 정오 12시와 오후 3시(5), 그리고 오후 5시(6)에 각각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2) 그들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 삯을 주라 하니”(8) 공히 모두에게 각각 한 데나리온씩을 나누어 주었다. 사실 모든 품꾼들은 일거리가 없어서 장터에서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3,5,6,7). 그러니까 포도원 주인이 이들을 써주지 않았다면 그냥 이렇게 놀다가 하루가 끝났을 사람들이다. 무슨 말인가. 포도원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주인은 포도원에 일하도록 한 것부터 약속한 삯(임금)을 나누어 준 것까지, 이 모두를 주인이 베풀어준 은혜의 논리로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먼저 온 품꾼들에게서 분위기가 바뀐다: “먼저 온 자들이 …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10-11)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자신들은 아침 9시부터 일을 했으니 오후 5시에 일하기 시작한 자들과는 달리 더 받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주인을 원망한다(10-11). 그 이유는 나중 온 자들과 동일한 품삯을 주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12). 주인의 은혜의 선물을 품꾼들은 공로의 논리로 바꾸고 싶어한 것이다. 하지만 주인의 행동은 약속한 그대로 집행했기 때문에 잘못한 것이 없다(13). 오히려 나중에 온 사람에게 처음 온 사람과 같이 주는 것이 주인의 뜻이었다(14).
바로 이 대목이 19장의 자기 공로 사상으로 무장된 사람들에게 교훈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들어있는 부분이다. 주인은 은혜를 베풀었는데 품꾼들은 배은망덕(背恩忘德)하게도 자신들의 공로를 주장한다. 11시 곧 오후 5시에 들어와 겨우 1시간 일한 <오후 5시집사>(6)와 3시 곧 오전 9시에 들어와 종일토록 수고한 <오전 9시집사>(3)을 같은 품삯으로 대우한 것을 견딜 수 없어 한다. 주인이 장터에서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을 품꾼으로 써주었기에 품삯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일한 공로만큼은 더 보상되어야 한다며 씩씩거린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 살려주니까 보따리 내어놓으라는 식이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 따로 없다. 이것이 주님에 의해 진단된 공로를 앞세우는 인간의 실상이다. 주인은 자기 뜻대로 약속하였고, 그대로 집행했다(2,13,14b). 그런데 품꾼들 중에 먼저 온 자들은 자기보다 늦게 포도원에 온 일꾼들보다 일을 더 했고, 그랬으니까 마땅히 자신들의 공로가 참작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생각을 하는 것까지야 그럴 수 있다고 해 보겠지만 그런데 문제는 주인의 언행을 이런 자기들의 생각으로 바꾸어 버리려고 하였다는데 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15a)
아무도 써주지 않아서 장터에 놀고 서 있었던 품꾼(‘나’)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니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자신이 어디서부터, 그리고 누구로부터 은혜를 입었는가를 잊어버렸다. 그 순간 알량한 공로를 주장하는 ‘권리타령’만 일삼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너보다 더 공로가 있다는 품꾼의 생각은 맞는가, 틀린가? 예, 옳지 않다. 자, 그러면 이 생각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공로의식을 버리고 주님의 생각으로 바뀌어야 한다: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14)
부스러기 묵상
은혜로 받은 선물을 허물어 버리고서 내가 했다는 나의 공로를 꺼내든 적은 없었는가.
사람은 이처럼 변덕스럽다. 일해야 할 시간에 일터가 아닌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3,5,6)이었다. 그러니까 포도원 주인이 아니었으면 ‘종일토록 놀고 서 있’(6b) 있다가 하루가 갔을 것이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이 써 준 품꾼이 되었을 때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을까. 결코 자신이 유능하고, 일꾼의 재능이 있고, 그러니까 자신의 어떠함 때문에 포도원 품꾼이 된 것이 아니다. 오직 포도원 주인 때문에 일하고, 포도원 주인의 은혜 때문에 약속된 은전 한 데나리온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저들은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품꾼으로 살았던 것이다(12). 그런데 <오후 5집사> 너는 <오전 9집사>인 나와 달리 겨우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자신과 똑같이 대우를 받게 되자 은혜의 논리는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고, 공로의 논리가 급속도로 장악해 들어왔던 것이다.
그처럼 은혜의 주인에게 공로의 잣대를 들이밀면서 포도원이 술렁거리게 된다. 결국 은혜를 보는 눈을 이렇게도 쉽게 자기 공로를 주장하는 쪽으로 돌려버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과 상대적으로 비교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너보다 더 공로가 있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 자신은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처럼 이 깃털같은 공로를 주장하려는 못남이 품꾼들로 하여금 그만 은혜에서 미끄러지게 만들었다.
이게 공로병(功勞病)이라는 암(癌)적 질병이다. 그래서 주인도, 11시 곧 오후 5시에 들어온 품꾼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6). 오직 자기가 일한 것만을 믿게 되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자기 자신의 공로만 들어오고, 그래서 주인의 약속과 뜻이 집행되었음에도 그것을 자기 공로로 뒤집어 보려고 하는 추한 모습으로 추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 생각 때문이다: “주인에게서 받은 삯은 내 땀의 결과일 뿐이다.” 이 생각이 주인에게서 받은 바 한량없는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주범이다. 나 <오전 9집사>는 일해서 받았고, 그런데 너 <오후 5집사>는 일하지 않았는데도 받았으니 불공평하다는 생각은 공로의 논리만이 기본이어야 한다는 무서운 병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마저도 인간의 공로가 만들어낸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그래서 범죄요 죄악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공로가 있다고 생각하면 우쭐함이 있고, 그 결과 우월감으로 당당하게 산다. 반대로 공로가 변변치 않다고 생각하면 좌절이 있고, 상대적으로 열등감이나 패배감에 빠져 비굴하게 산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헌금을 드리고, 오랫동안 섬겼는가라는 이런 알량한 공로의 논리들이 득세하고 있다면 이는 심각한 중병(重病)에 걸려있는 것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면 나를 치료하고, 그래서 내가 사는 길은 무엇일까. 내게 일하도록 열어 놓으신 천국 포도원에 흐르는 은혜의 강물이 공로의 막대기 때문에 역류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내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은혜 의식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다시금 주인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할 때다. 주인을 보는 시선을 놓쳐버리면 자꾸만 너보다 잘나 보이는 나만 보인다. 내가 최고라는 착각, 내가 더 많이 수고하고 일했다는 착각, 그러면 끝이다.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망각한 사람 치고 제대로 사는 것을 본 일이 없다. 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 나를 엄습해 오지 못하도록 지금도 변함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께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의 삶을 이끌어 가기를 빈다.
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찬 441장)
2. 말씀 위에 서서 내 뜻 버리고 감정을 버리고 말씀에 서니
불완전한 믿음 완전해지고 내가 이제부터 주만 붙드네
3. 나의 모든 욕심 던져버리고 내가 염려하며 계획하던 것
믿고 기도하며 주께 맡기고 주의 뜻을 따라 살기 원하네
[후렴]
나의 생명되는 내 주 예수님 영원토록 모셔 내 기쁨 넘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