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4(묵상) 초안 - 20021105
결혼교향곡
Matt. 19.1-12
본문 관찰
바리새인들 -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 -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바리새인들 -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 -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결혼과 이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5.31-32)
바리새인들이 또 다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찾아왔다.
참으로 불행한 사람들이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주님을 흔들어 골탕먹이고, 그래서 메시야 사역을 무력화하기 위해서 주님 곁을 배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주님은 비록 의도가 불순한 질문이기는 하나 그것을 통해서 가정(결혼, 이혼, 독신)에 대한 매우 귀중한 가르침을 말씀해 주신다.
우문현답(愚問賢答)
“구실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3, 현대인의성경) 이게 소위 종교 지도자라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통해 입에서 나온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결혼과 이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분분하기만 하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음에도 인간은 이혼 편의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이게 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인간의 이기적이고 욕망에 찬 죄의 결과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결혼식에서 주신 주례사는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5, 창2.24)는 말씀이다. 동일한 성경은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6, 고전7.10)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지금 하나님의 세우신 결혼의 본래적 목적을 말씀하심으로써 이혼의 부당함에 대해 정면승부를 하고 계신다.
시대는 악하여 말씀의 원칙을 버리고 이혼에 대해서 자기 마음대로 이러쿵저러쿵 말도 많다. 더욱 악하고 무례한 것은 자기 방식대로 진리이신 주님까지 설득하려 하고 있음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성경에 자신의 생각을 일치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과 사상에 성경까지를 변형시키고, 상황윤리화 시키려고 한다는데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결국 “성경은 이렇게 말하지만 내 생각은 이것이다!”고 말하는 자들은 다 바리새인들의 아류일 뿐이다.
바리새인들의 언행은 이미 산상수훈에서 결혼과 이혼에 대한 주님의 말씀(5.31-32)을 들었거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시험하기’(3, tempting him, KJV) 위해서 꺼낸 불순한 논쟁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지금 이혼에 대해 궁금한 것을 알고 깨닫기 위해서 묻거나, 혹은 바른 가르침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뭔가 시비를 걸기 위해서다. 인간은 이처럼 사악하다.
사실 모세가 선포한 이혼증서는 바리새인들이 왜곡한 것처럼 이혼을 권장하는 것이 아니다(7, 신24.1-4). 오히려 신성한 결혼과 그에 따라 세워진 가정이 인간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혼하는 것을 허락한 것이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8). 주님은 계속해서 오직 하나의 이유만이 이혼 사유가 된다는 말씀을 줄곧 분명히 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9, 5.32)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이 “인간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깨어져 가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랴. 다른 얘기지만 요즘은 이혼하는 것도 많지만 이혼 당하는 경우도 많다. 때문에 이혼을 단순하고 평면적인 잣대로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도 해 본다. 들어보면 오죽 하면 이혼이라는 최후의 방법을 선택했을까 싶은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5a)라 했는데 결혼하고도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한 원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5b) 하셨음에도 끝없는 자기 욕망과 사악한 이기주의가 한 몸 이루기를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만큼 성경의 가르침과 결혼의 본래 목적을 떠난 인간의 죄가 낳은 자충수(自充手)가 아닐까.
부스러기 묵상
얼마 전에 아내에게 물어본 기억이 있다.
혹시 당신은 지금까지 30년 넘게 함께 살면서 이혼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고... 그랬더니 웃기만 하였다. 우리 부부 둘 사이에서 나는 지금껏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으니 어쩜 아내가 내게 더 잘 했는 것 같고, 아내가 그런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한 것으로 봐 나는 아내에게 그리 잘 한 남편은 아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목회를 하면서 가정이 깨지기 일보 직전까지 가는 경우를 수도 없이 본다. 자라는 자녀 앞에서, 혹은 오늘의 말씀인 9절 때문에, 친정 어머니 생각하면서, 마땅한 다른 대안이 없어서, 그래서 꿈도 사랑도 다 잃어버린 채 깨져 가는 가슴을 쓸어 담아가면서 어쩔 수 없다며 체념하는 사람들의 하염없는 눈물을 종종 만난다. 어찌할까.
오늘도 어떤 분과 이런 얘기를 했다. 아들이 걷고 말하기 시작하면서 녀석과 조금씩 대화가 되는 것은 참 좋은데, 그런데 우리 부부의 삶이 유리관 속에 들어있는 것처럼 아들 녀석에게 그대로 노출되는 것을 느낀다고... 자녀 앞에서 품위를 지키고, 조금씩 서로 조심하면서 부부 사이도 더 원만해 진다는 것을 느껴간다고도 했다. 이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다. 그런데 그만 듣다가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그분 앞에서 나 역시 울컥하던 눈물을 꾹꾹 참으면서 기도한 후 돌아왔다. 하지만 왠지 우울하다. 함께 나누었던 시편 107편 4-9절 말씀처럼 “그 근심 중에” 있을지라도 마음판에 새겨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