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1(양무리교회) 초안 - 20021103
용서 사용설명서
Matt. 18.15-35
본문 관찰
피스메이커(15-20): 나와 너, 그리고 증인과 교회
용서의 법칙(21-35): 용서 사용설명서 – 나와 너, 그리고 하나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만 달란트 빚진 자 … 주인이 불쌍히 여겨 …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 옥에 가두거늘
악한 종아!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음에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용서의 은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그러나 우리가 우리 죄를 인정하고 남김없이 고백하면,
그분은 진실하신 분이시니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모든 잘못을 깨끗게 해주실 것입니다.”(요일1.9, The Message)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
죄에 대해서 말씀을 통해 지적을 받을 때 이를 겸손하게 인정할 때 용서는 시작된다(15-17). 하지만 주님은 그가 만일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17b) 하신다. 이처럼 죄를 인정하지 않을 때는, 그러니까 죄를 시인하고 이를 고백하지 않을 때는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이 막히는 것이다. 한편 용서는 기도와 그것의 응답과 함께 간다(18-20).
피스메이커(15-20): 나와 너, 그리고 증인과 교회
회개하지 않은 죄 범한 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
①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15).
②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16, 신19.15).
③ 교회에 말하라(17a, 16.18).
④ 위 ③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17b)
먼저 생각할 것은, 나의 죄 때문에 절망하다가 주님의 용서 때문에 희망을 보는 것이다(6-10 → 15-20). 이처럼 사죄의 은혜는, 즉 죄 용서의 복음은 언제나 죄보다 강하다. 특별한 것은 하나님은 나의 죄를 너의 충고(권고, 타이름)를 통해서 해결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죄에 대해서 간섭해 들어오시는 첫 번째 하나님의 방법이다(15).
하나님은 우리가 어린아이다움 안에 이루어진 천국의 현존성을 죄 때문에 잃어버리기 전에 두 세 증인으로 통해, 마지막으로는 교회의 권고를 통해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신다. 주님은 이렇게까지 돌이킬 수 있는 은혜의 문을 열어 놓으신다. 그렇다면 이제 이 문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회개와 뉘우침이 필요하다.
너를 실족하게 한 나의 죄를 해결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인가(6-10,17). 아니다. 또한 이방인(세리)과 같이 여기는 것으로도 아직 마무리가 아니다. 희망은 있다. 나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것은 임금의 무조건적인 용서에서 비롯된다(21- ). 죄는 용서받음에서 해결된다.
용서 사용설명서(21-35): 천국과 용서 – 나와 너, 그리고 하나님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그것은 이어지는 용서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21).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자라고 한다면, 그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나타내 보여야 한다. 이것이 용서의 법칙이다. 흥미로운 것은 주님은 용서를 이해하기 쉽게 천국 비유를 사용해서 알려주신다. 한편 이 용서의 비유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시 통용하던 화폐의 가치와 그 대조를 아는 게 필요하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1세기 당시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에 바친 세금은 1년에 금 800 달란트였다고 한다. 또한 다른 한 비교로는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해 금 3,000 달란트를 준비했었다(대상29.4-7). 그렇다면 여기 24절의 10,000 달란트는 천문학적인 금액인데 이를 당시의 다른 화폐로 환산하면 약 6천만 데나리온이나 되는 거금이다.
당시 1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 1백 데나리온은 1만 달란트의 60만 분의 1에 해당하는 지극히 소액에 불과한 금액이다. 여기서 이를 다시 우리 화폐로 예를 들면, ‘6천만을 탕감받았는데 1만원을 갚지 않는다.’라고 그를 처벌한 경우에 비교되는 상황이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먼저 10,000 달라트라는 어마어마한 빚을 해결하는 결산이 자리한다(23). 과연 갚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것은 ‘용서’를 통해서다. 나의 능력으로 빚을 다 갚고서 당당하게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용서함’을 통하여 주어지는 나라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빚(죄값)을 해결할 수 없다는 얘기다.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용서를 통해서만 죄의 빚은 탕감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하여 나의 빚은 용서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용서를 뒤집으시는가?(32- ). 그렇다면 용서란 취소될 수 있는 가변적(유동적, 일시적)인 것인가? 하지만 용서가 뒤집힌 것은 용서받은 자가 용서하지 못함 때문이다. 용서받기만 알았고 용서하기는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형제간에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용서로부터 그가 영원히 멀어지게 된다는 점이다.
용서의 6가지 원리(Divid A. Seamands)
① 문제를 똑바로 직시하라.
② 어떤 문제이든지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
③ 고침을 받기 원하는지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보라.
④ 문제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라.
⑤ 자기 자신을 용서하라.
⑥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가 또한 어떻게 기도해야 할 바를 성령님께 구하라.
나는 용서받았는가.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주님은 남을 용서하는 것은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것의 가장 확실한 표징이라 하신다. 나는 주님이 나를 용서해 주심과 같이 형제를 그렇게 용서했고, 용서하고 있고, 앞으로도 용서하며 살고 있는가. 자, 용서하며 살 것인가. 그렇다. 형제를 용서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받아들였는가를 알 수 있는 잣대가 된다. 나는 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인데, 주님의 용서로 인하여 비로소 용서받았다면 나 역시 주님처럼 너를 용서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은총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은총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2-35) 용서는 자신이 용서 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자가 할 수 있다.
부스러기 묵상
내 마음 속에 누군가를 향한 분노와 원한과 미움과 증오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는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마저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보는 일을 피하면 피할수록 그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 ‘빚을 진’ 사람에게 돌려버린다. 마치 자신의 ‘빚’을 용서해 준 사실을 무시하고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 ‘빚 진’ 자에게 전가하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처럼 말이다.
내가 주님의 ‘용서받음’ 안에 있다는 것은 내가 너를 ‘용서함’과 분리될 수 없다. 용서는 하나님의 방법이고, 따라서 용서하면서 사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음을 시인하는 행위이다. 동시에 용서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알리고, 그래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용서의 복음이다.
다른 하나는 용서받아야 할 빚을 스스로 갚으려고 하는, 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때문이다. 나도 내 힘으로 용서를 만들었으니, 그러니까 내가 용서했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용서를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셈이다.
진정 빚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내가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가를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 하나님의 용서함이라는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빚진 자를 그 은혜로 품지 못한 자로 다시 추락할 수 있다. 나도 예외일 순 없다. 그래서 용서하기란 이렇게도 어려운 신앙의 목록일지도 모른다. ‘나는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았음에도 너는 나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다’는 이 기막힌 이기심과 배은망덕(背恩忘德)이 나를 파멸로 몰고 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연 어떤 파멸인가요? 32-35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