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산 아래의 사역보고서(마 17.14-27)

20220828(양무리교회) 초안 - 20021030-31(묵상)

  

 

 

산 아래의 사역보고서

Matt. 17.14-27

  

 

    본문 관찰

 

    산 아래에서 벌어진 일(14-21)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한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못할 것이 없으리라

    두 번째 수난예고(22-23)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성전세 논쟁(24-27)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주라

  

 

세상을 보는 눈

 

    “예수께서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1,9a,14a)

 

산 위와 산 아래가 절묘하게 대조된다.

산 위는 영광의 그리스도인데 산 아래는 고통과 질병으로 신음하며 울부짖는 중이다. 어쩌면 이 두 지평이 공존하는 곳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로 올라가신 주님은 다시 아래로 내려오신다(1,9,14). 산 위 영광에서 산 아래 영광으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영광의 산 위에서 어둠과 고통의 산 아래로 내려오신다.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4a)를 외치는 베드로의 간곡한 요구를 뒤로 하고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행해 걸어가야 할 바로 그 산 아래로 내려오셨다. 하지만 산 아래는 여전히 불신이 지배하는(17a,20), 또한 세상의 기준과 법칙의 지배를 요구하는 곳이다(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거기에서, 산 아래에서 메시야에로의 길은 도도히 선포되고(22-23), 그 길을 향한 진리의 걸음은 계속되고 있다.

 

 

세상코드(14-21)

 

산에서 내려와 무리에게 이르자마자 산 아래의 실상이 드러난다(14-16). 정황으로 봐 아마도 예수님께서 산 위에 계실 때 산 아래에서는 풀리지 않는 숙제 때문에 옥신각신했던 모양이다(16). 몇 제자들이 영광이 있는 산 위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4a)라고 눈빛을 통일하며 칭얼거리고 있을 때, 바로 그때 동시상영되고 있던 또 하나의 그림은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15a)를 외쳐야 하는 절망과 고통으로 가득찬 산 아래 세상이다.

참으로 두려움이 앞선다. 우리가 변화산의 영광이라는 황홀경에 빠져있을 때(사실 이런 경험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풍성한 축복임에 틀림없다. 때문에 이것 자체를 경시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그리고 영광은 우리게만 머물러 있는 은총과 축복이어야 한다고 아우성칠 때(얼마나 이기적인가), 바로 그 동일한 시간에 산 아래 세상의 모습은 참담하다.

지금 산 아래의 세상이 해결할 수 없는 고통에 처해 있는 것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17a)이고, 동시에 믿음이 작은 까닭”(20a)이다. 이것이 세상의 진짜 실상이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것이 없는가. 아니다. 제자들이 조용히 주님께 나아와 어찌하여 못하였나이까?”(19)라고 물었던 것처럼, 또한 주님 발 앞에 간질병이 든 아들을 둔 아버지처럼 꿇어 엎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넘어지며”(15b)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기 위해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를 주님께 구해야 한다.

주님은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20) 하신다. 주의 빛으로 비추어 주신, 그래서 우리가 상대하며 사는 세상, 그 세상은 지금 이 시간에도 이런저런 것들 때문에 끊임없이 신음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산 아래가 산 위처럼 영광으로 되어질 수는 없는가. 대답은 있다!’이다. , 산 아래가 영광이 되게 하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1621절에 다시 이어지는 두 번째 수난예고다(22-23). 이것이 핵심적인 답이다. 이것이 산 아래가 산 위처럼 영광이 되는 길이다. 주 그리스도 메시야는 이 세상에 십자가라는 둥지를 준비하신다(22-23). 놀라운 희망이다. 주님은 하실 일을 이처럼 준비하고 계신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매우 근심하는 제자들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왜 이럴까. 산 아래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렇기 때문에 20절이 말하는 믿음이다: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결국 그렇다면 산 아래의 간질병이 가지고 온 어둠인 고통과 절망을 끊어내고 산 위처럼 영광이 임하게 하는 것은 믿음이다. 이 믿음이 죄와 사망과 사탄의 어둠을 몰아내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 잘 보라. 이 세상에 임할 하나님의 영광은 먼저, 주님이 십자가에서 사망과 절망의 어두움을 몰아내시는 것으로 임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작은 씨 하나 정도의 믿음이다. 그렇다면 지금 산 아래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두 가지의 보고서가 어둠을 끝내고 빛의 영광이 임하게 하는 것으로 드려져야 한다.

 

 

성전세 논쟁(24-27)

 

한편 세상은 지금 성전의 주인이 오셨음에도 그걸 모른다. 그러니 그 주인에게도 성전세(30.13, 38.26)를 내야 할 의무 같은 것만을 말한다. 기막힌 역설이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주신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단지 성전세를 거두라고 하신 것인가. 지금 성전은 산 아래 인간의 죄와 고통과 눈물을 해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이익과 욕심만을 구하고 있다. 그러니 간질병을 앓는 백성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이다.

주님은 저들의 이 생각을 아셨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27a), 이제부터 세금을 내라 하신다. 괜히 불필요한 논쟁에 휘말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로 가는 길에 작은 것들에 발목을 붙잡힐 이유가 없다.

어떻든 타락하고 세속화된 성전이지만 율법이 명한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은 피하지 않으신다. 여기서 한 가지 적용하고 가자. 주님은 기도하는 집인 성전이 비록 강도의 소굴이 되어있을지라도 해야 할 일은 하셨다. 교회가 어쩌고저쩌고, 목회자나 그리스도인이 저쩌고어쩌고 하면서 정작 해야 할 성도의 소명과 사명을 중단하거나 믿음의 길을 떠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부스러기 묵상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22-23)

 

여전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1.2).

예수 그리스도(메시야)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여시겠다고 이미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산 아래 세상은 이처럼 여전히 혼돈과 절망의 상태이다(16.21). 제자들은 물론 아무도 십자가의 구원과 영광을 믿거나 반기는 기색이 없다(23b, 16.22). 위와 아래는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다. 제자들은 세상을 향해 아무런 대답을 주고 있지 못한다(16).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 무엇보다 성전 또한 그 빛을 잃었다.

이럴 때 일수록, 그렇기 때문에 지금 산 아래 세상은 주님을 필요하고 믿음이 요구되고 있다. 사랑하고, 섬기고, 고치고, 가르치고, 회복해야 할 산 아래가 사역지이기 때문이다. 꾸짖어야 할 적()은 귀신이고, 십자가의 빛과 우리의 믿음을 필요로 하는 대상은 심히 고생하고 있는 아이이다(18). 산 아래는 여전히 혼돈과 어둠의 영인 마귀의 손아귀에 붙들려서, 주님을 향해 불쌍히 여기소서!”(15a)를 외치는 심령들의 탄식 소리로 가득하다.

지금 우리가 괴로워하고 아파해야 할 것은 제자들처럼 우리의 믿음이 겨자씨만큼만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함과 초라함이다. 제자들과 다를 바 없는, 간질 하는 아들을 둔 아버지 같은, 이 모습 이대로 주님께 무릎 꿇는다. 이를 해결하고 죄와 어둠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하기 위해 오신 주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말씀하시는 주님만이 희망이요 빛인 이유다. 오늘 그 빛이 예배자로 나아온 우리에게 비추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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