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5).

20220101a(묵상)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Jn. 1.1-5

 

    본문 관찰

 

    태초에 계신 말씀(1-3)

    생명의 빛(4-5)

   

 

태초에 말씀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예수님은 육신을 입기 이전에도 계셨다(1-3, 8.58).

이게 지금 요한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피조물인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직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2.9)의 부분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는 14절에서나 나타나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4a)로 말미암아 그분을 눈으로 직접 보기 이전, 바로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에서 요한의 복음은 시작된다.

   

 

태초에 계신 말씀(1-3)

 

창세기 11-5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창세기와 요한복음이 그대로 만날 수 있는 것은 말씀(Logos)이신 하나님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1-2).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만물의 창조가 말씀이신 하나님 없이 지은 바 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3). 이것이 신학적으로 성자(聖子)이신 예수님의 선재(先在) 교리다. 예수님은 만들어진 피조물이 아니다. 또는 인간 가운데 가장 탁월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까 한 인간이 어느 날 진리를 깨닫고, 터득하고, 득도하여,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자의식(自意識)이 생긴 것이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된 게 아니다는 얘기다. 이처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조신(人造神)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태초에 계신 말씀이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다.

   

 

생명의 빛(4-5)

 

말씀 = 그리스도 = 하나님이라는 진리가 분명히 드러난다. 한 인격 속에 양성, 즉 인성과 신성이 동시에 거하신 분, 그 하나님이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분, 그분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시다. 태초부터, 만물을 창조할 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빛으로 오신 분이시다. 그러나 창조 이후 세상은 곧바로 죄로 말미암아 어두움 가운데 있었다. 빛이 어두움에 비추었으나 어두움이 깨닫거나 이기지 못하였다(5). 세상이 어두움임에도 불구하고 빛으로 오셨다. 어두움을 피하시거나, 나무라시거나, 진노로 다스리시지 않으시고, 그러셨음에도 인간이 그것을 알거나 모르거나를 막론하고 오셨다.

1-4절의 진리이시며, 말씀이신 하나님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어두움인 에게까지 그 참 빛을 비추셨다. (인간, 죄인)는 어두움이었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였다. 영적 어두움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에 빛을 이길 수 없는, 무능하고 무지하고 무력한 죄인(罪人)의 어두움이었다. 이게 죄인인 나이자 우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님을 먼저 알고, 믿고, 또 믿기로 결정하고, 선택하고, 깨닫고, 구원을 발견하고, 영생의 세계를 알고,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뭐 이런 거룩한 일들을 스스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그는 아직도 하나님의 진노라는 영원한 어두움가운데 빠진 죄인일 뿐이다.

   

 

부스러기 묵상

 

                  1절                                                   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은 이 진리를 스스로 깨닫고 알게 되었는가?

아니다. 그 역시 알게 되었을 뿐이며, 하늘의 영광을 보게 되었을 뿐이다. 태초에, 창조의 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지 못했던 한 피조물에 불과한 요한 아닌가. 그런데 그가 어떻게 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아는 진리를 깨닫고, 기록된 말씀으로 하나님을 소개할 수 있게 되었을까? 그것은 생명의 빛이신 말씀(Logos)이신 하나님 자신이 모든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요한 자신에게도 빛이었기 때문이다(4b). 유한은 무한을 파악하지 못한다.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 없이, 계시 없이, 말씀 없이, 인간 스스로의 어떠함으로 하나님을 발견하거나, 하나님께 나아가거나, 하나님을 아는 그런 일은 없다. 요한은 그것은 어두움이라는 한 단어로 묘사한다.

태초에서부터 말씀의 빛으로 어두움에 비추기 바로 직전(지금)까지 셀 수 없는 시공(時空)의 역사가 흘렀지만 빛은 빛이고, 어두움은 여전히 어두움이다.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진리의 빛으로 오시기 전까지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깨어라, 깨어라, 먼동이 튼다!”라는 찬양을 들으면 가슴이 막 뛴다. 그렇다. 마침내 어두움이 깨어나고 있다. 내가 얼마나 어두움 가운데 있는가를, 내가 얼마나 진리이신 말씀과 거리가 있는 삶을 사는 죄인인가를,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 나에게 무슨 모양으로 그려지고 있는가를 비로소 알고, 깨닫고, 믿고, 보고, 그래서 주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자라고 있음을 찬양하는 자로 그분의 생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인하여 감격한다.

요한과 더불어 시작된 예수행전(복음대로)을 따라 요한복음 읽기와 묵상을 시작하는 기쁨, 아무도 빼앗을 수 없음이 얼마나 다행인지, 아직 남아있는 조그마한 어두움이라도 다 빛으로 말미암아 물러가는 죄씻음과 신생(新生)의 은혜를 그래서 더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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