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법칙(눅 21.5-24)

20210323-24(묵상)

 

 

 

종말의 법칙

Luke. 21.5-24

 

    본문 관찰

 

    이미 종말(5-24)

       A 예루살렘성전 파괴 예언(5-9)

       B 종말론적 핍박 예고(10-19)

       C 예루살렘 멸망 예언(20-24)

    아직 재림(25-38)

       D 재림의 징조들(25-33)

       E 종말론적인 삶(34-38)

  

 

소계시록(1)

 

종말과 재림에 대한 다섯 그림(ABCDE)이 함께 겹쳐짐으로써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A)와 종말론적 핍박(B)과 예루살렘의 멸망(C), 그리고 재림(D)은 각각으로서의 메시지가 있으면서 동시에 이를 맞는 자들(종말론적 삶을 통해 재림을 맞이하는 성도, E)과 유기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다섯은 서로 어떤 관계인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예루살렘의 멸망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종말과 재림 사이에 있는 긴장이며, 그 사이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이라는 무대는 핍박과 고난으로 이어지지만 궁극적인 승리, 곧 종말의 완성인 재림으로 그 끝이 날 것이다. 그날이 오기까지 성도는 무엇으로 사는가.

   

 

예루살렘 성전 파괴 예언(5-9)

예루살렘 멸망 예언(20-24)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6, 19.44a)질 것이라는 예언은 불과 한 세대가 지난 후에 그대로 성취된다(AD 70에 로마의 티토 장군에 의해). 그러나 이것이 곧 종말인가. 주님의 대답은 아니다이다(8-9). 주님은 아마도 그때가 되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또 받아들일 수 있음을 미리 아시고 이처럼 예고하시는 것 아닐까.

같은 맥락에서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20)는 말씀이 주어진다. 이는 징벌의 날’(22)로써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23b)음으로 해서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24)게 될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이 곧 종말(‘’)은 아니며, “어느 때에 무슨 징조가”(7)에 대해 주님이 그리시고 또한 기대하시는 큰 그림이다. 그래서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8a) 말씀하신다. 더 명쾌한 것은 이 일이 먼저있어야 하되 이 곧 되지 아니라는 점이다(9b). 그럼 ’(종말)이다고, 혹 종말이 가까이 왔다고 미혹을 받을 만큼 그것에 앞서 예고해 주신 것들은 무엇인가.

먼저 내적으로는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고 말하는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과(8), 동시에 외적으로는 난리와 소요의 소문”(9a)이 처처에서 들려오는 일이 에 앞서 먼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종말의 징조를 보고서 이를 잘못 가르치는 자들이, 그것도 자신이 그리스도라 말하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미혹한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한편, 일단 본문의 문맥상으로는 예루살렘 멸망(성전 파괴)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9b)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또한 먼저 있어야 할 것은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난리와 소란의 소용돌이다(8-9a). 결국 에 앞서 먼저 있어야 것은 분명해진 셈이다. 먼저 있어야 하는 것과 끝은 분명히 다르지만 그러나 긴장 속에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이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하고 파괴되기 이전에 주님께 이 말씀을 듣는 당시의 독자들과, 비록 이것이 성취된 이후를 살아가지만 아직도 계속되는 적그리스도와 난리와 소란의 소용돌이 안에 있는 현재의 독자들이 만나는 지점이다. 첫 독자들 역시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기 이전에 나타난 여러 징후들을 통해 그것이 곧 임박했음을 알았어야 했듯이, 지금의 독자들 역시 먼저와 끝 사이의 긴장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종말론적 핍박 예고(10-19)

 

종말은 곧 핍박과 매우 유기적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마지막에 될 일들의 순서가 있다(“이 모든 일 전에”, 12a). 먼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12a) 온갖 핍박과 환난과 고통이 있는데(12) 심지어 순교하는 일까지(16),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17)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말론적 핍박의 와중에도(12,16-17), 그러니까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9b)한 때에도 모두가 다 미혹을 받아 부끄러운 모습으로 종말을 맞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큰 위로이자 희망이다(13,18). 주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지키시며 보호하신다. 따라서 문제는 종말론적 핍박이 아니라 증인으로(13),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은 자로(18) 당당하게 이미 종말과 아직 재림그 사이를 살아가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더 심각하게 되물어야 할 질문이다.

사실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8b)고 주장하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고, 핍박하는 자들이 있고(12), 순교의 피를 흘리게 하는 자들이(16) 함께 공존하는 것이 종말이라는 징조’, 그리고 먼저사이의 끊임없는 긴장점이지만 말이다. 이제야 24절의 말씀이, 즉 종말론적 핍박의 때에도 인내로 영혼(목숨)을 얻는 자들이 복되다(24)는 말씀이 희미하게나마 이해되는 것 같다. 정말 이제는 더욱 내가 꿈꾸며 이루어야 할 종말을 살아감, 그 파도 앞에 주님 말씀을 품고 당당하게 설 수 있으리라 싶다.

   

 

부스러기 묵상

 

소위 소계시록로 불리우는 이야기를 읽고 있다.

마태복음 24장과 마가복음 13, 그리고 누가복음 21(5-38)이 그것인데 이러한 종말론 강화는 AD 70년에 예루살렘(성전)이 멸망함으로써 1차적으로 성취된다. 이 예언은 주님의 공생애 마지막 부분에서(AD 33-35년 경) 주어졌고, 복음서들은 60여년을 전후한 어느 시기에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 예언은 역사적으로 성취되었고, 이렇게 되자 복음서의 독자들(이 예언이 이루어지기 전부터 이루어진 후까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자들)은 과연 이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토론하였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예언이 가지고 올 긴장은 실로 놀라운 것이다.

아마도 대다수의 성도들은 종말의 징조들과 예언의 성취가 곧 종말(재림)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거나, 아니면 예루살렘(성전)을 둘러싼 주님의 예언이 성취되려고 하거나 그럴 만한 전반적인 징후들을 보면서 종말과 재림에 대한 생각(신앙과 신학)과 삶이 여러 갈래로 나누이는, 그야말로 종말론적 현상들을 목도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종말론적 현상이 교회 안에 혼재해 있을 때 이에 대한 복음서 저자들의 대답은 매우 적절하다 싶다.

때와 징조와 현상과 성취(예루살렘/성전 멸망 및 파괴)는 그것의 완성(재림)을 향해 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중요한 정거장들과 같다. , 하나의 정거장은 그것이 목표(도착지, 종말과 재림)하는 것을 향해 또 하나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사인(sign)은 점점 가까이 오고 있는 종말(재림)을 알리는 사이렌(siren)이지 그것이 곧 종말은 아니다.

초대교회가 그러했듯이 지금 역시 징조(siren)와 종말(재림) 사이의 긴장의 때이고, 또한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종말의 때를 살아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누가의 첫 독자들이나, 이 복음서를 읽는 초대교회나, 지금 읽는 우리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종말론적 긴장의 때를 살아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주님이 미리 알려주신 [종말의 법칙](‘종말은 주님의 예언하신 징조들이 성취되는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 보자. 비록 그 걸음이 핍박과 순교와 모든 사람으로부터의 미움(왕따), 동시에 적그리스도의 출현에 따른 다른 복음과 난리와 소란(나라와 민족 사이의 전쟁, 큰 지진, 기근, 전염병, 무서운 일, 하늘의 큰 징조, 9-11)으로 말미암아 휘청거림을 당한다 할지라도 최후의 승자는 주님의 팔 안에 있음을 기억하자(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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