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 이야기I,II(눅 20.9-26)

20210321a(묵상)

 

 

 

포도원 이야기I,II

Luke. 20.9-26

 

    본문 관찰

 

    악한 농부들의 비유(9-18)

    세금 논쟁(19-26)

  

 

서바이벌 게임(survival game)

 

포도원주인농부들종들아들이 등장하는 비유다(9-18).

그리고 이 비유는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에게까지 확장되고 있다(19-26). 일차로 이 말씀은 백성’(6,9, 19.37-38,47-48)들에게 주어지다가, 이어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에게로 그 지평이 확대된다(9,19). 또한 양자(兩者)의 반응이 일단 흥미롭다(16b 19-20). 듣고 깨닫는 자(긍정적인 적용자, 16b)와 들어 알면서도 예수를 죽이려는 자(부정적 적용자, 19), 그리고 이런 틈바구니에서마저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를 가르치시는 주님의 불타는 열정, 이런 조각들이 하나 둘 퍼즐(puzzle) 되면서 메시지는 점차 강화된다.

   

 

악한 농부의 비유(9-18)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17, 118.22)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논의가 공론화 되면서(19.47-48) 옛 법의 사람들의 사악한 질문과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이라는 구도가 이번에는 저희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문(비유 메시지)과 거기에 대한 저들의 응답으로 교차(1-8 vs 9-26)되면서 점점 저들의 가증스런 속내가 드러나고, 그럴수록 주님의 말씀은 날카로운 검이 되어 변함없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딤후3.16)하게 맞선다.

악한 농부의 비유에는 메시야의 오심에 따른 포도원 주인과 농부들과 아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련의 팽팽한 긴장이 엿보인다. 지금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알고 있듯이 포도원 주인이 보냈으나 농부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바로 그 아들이라고 하는 대단한 암시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결국 주님은 이 비유 속에 당신 자신의 여정을 담아내신다. 이렇게 보면 이 비유는 매우 비장하고 장엄하다.

포도원 주인(하나님)은 종(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잘 관리하라고 명한다. 주인은 소출 때가 되자 연달아 세 명의 종들을 보내지만 관리를 맡은 농부들은 저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낸다(9-12). 주인은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지만 성속자인 아들마저 죽이고 만다(13-15a). 당연히 주인은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만다(15b-16).

주인은 아들의 희생적 죽음을 무의미하게 끝내지 않으시고 감히 농부들(건축자들)이 버린 돌(산돌이신 아들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심으로써 포도원을 둘러싼 인간의 욕망을 끝장내시고야 만다(17, 118.22, 4.11, 벧전2.7). 하나님은 이 돌을 통해 경거망동(輕擧妄動)하게 교만하던 무리들을 응징하신다. 결국 농부들처럼 언행하는 것은 곧 심판의 대상이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포도원을 관리하는 농부이기를 자처하는 자들은 이 비유가 의미하는 바를 심각하게 듣고 자신들의 삶의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 지금은 주님의 권위에 도전하거나(1-8), 죽이려고 꾀하거나(19.47) 할 때가 아니다. 주신 말씀 앞에 겸손하게 서야 할 때다. 그렇지 않으면 곧 심판은 숯불이 되어 머리 위에 올려질 것이다: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18b)

   

 

세금 논쟁(19-26)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5b)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포도원 이야기(9-18)에 나오는 악한 농부가 바로 자신들이라는 것을 알았다(19a).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깨달음은 즉각 스데반의 청중들처럼 반응하도록 만들었다(19b, 7.54). 하지만 이번에도 하나님은 아랑곳없고 단지 사람(백성)을 두려워한 나머지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음모는 뒤로 미뤄지고 만다.

그러자 이번에는 정탐꾼들을 예수님 곁에 두어서 예수님 엿보기를 시도한다(20). 소위 겉과 속이 다른 자들의 달콤한 속삭임이 들려온다. 마치 에덴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하던 때와 같이 립서비스(lip-service, 21)로 일단 자신들의 정체를 숨긴다. 그리고 올무에 넣기 위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22) 예수님 곁에만 이런 자들이 있는 게 아니다. ()을 가장한 어두움(늑대)은 어느 시대, 어디에도 있다. 지금 교회 안에도 이런 자들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주님은 이들의 간계(奸計)를 아셨다(23). 사뭇 진지하게 보이기는 하나 속에는 간악하고 사악하기 그지없는 더러운 것들로 가득한 자들, 예수님께 질문의 답을 구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진리를 아는 자리로 나아가기 위함이 아닌, 때문에 대답하는 바로 그분을 책잡아 죽이려는 음모를 위한 명분을 얻기 위해 거룩을 가장한 자들, 이것이 지금 예수님 앞에서 백주에 자행되는 죄인들의 생활이다.

주님은 데나리온에 그려진 그림과 글을 보게 한 후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5)는 절묘한 말씀을 하신다. 이번에도 저들의 계산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만다(26). 주님은 저들의 죄행(罪行)을 다 아시지만 그럼에도 중심을 잃지 않으시고, 진흙탕 속에서도 연꽃이 피듯이 잠잠히 당신의 길을 가시며,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시는 일을 중단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의 초지일관(初志一貫)한 집중력을 생각해 본다. 보통 우리는 잘하려고 했는데 이런저런 이유들(사람, 상황, 형편)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변명만들기에 급급한 것과 대비되면서, 진행되는 일련의 흐름이 자신의 목숨을 요구하는 것을 뻔히 다 아시면서도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가는 메시야 앞에 서서 결국은 내가 어떤 모습으로 그분의 뒤를 따라가야 할 것인가를 결단하게 한다.

삶의 정황이 만들어낸 첨예한 가이사의 것속에서 그것만이 아닌, 그것만으로 우리네 인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이루며 사는 것만이 다 일 수 없다는, 그러니까 땅의 문제만이 사람들이 추구해야 하는 최상의 가치는 아니라는 점을 하나님의 것이라는 절묘한 꼭지점을 통해 밝히 드러내신다. 세상은 가이사의 것에 대한 대답만을 요구했고, 그것만 해결되면 그런대로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의 것에 대한 바른 시각 없이는 이것은 언제나 반쪽 진리일 수 밖에 없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스러기 묵상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16b)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19a)

 

말씀을 듣는 자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일단 모든 청중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았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16b,19a). 그러나 들은 바 말씀에 대한 적용(반응)은 극과 극으로 나타난다. 이 그림은 사도행전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데 베드로의 청중들과 스데반의 청중들에게서 그렇다(2.37 vs 7.54).

모두가 다 들은바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었다. 하지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결국 스데반의 청중의 편에서 말씀을 들었고, 자신들에게 찾아온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버리고) 만다. 이런 첨예한 대립과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결코 당신이 하신 말씀을 저들처럼 올무로 사용하신 적이 없으시다. 또한 타협이나 감정적 대응(저주성 메시지)도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하는 자로서, 베드로와 스데반이 그랬듯이(2.14-36, 7.2-53), 아니 주님이 그러셨듯이 비록 말씀을 듣는 자들의 마음밭이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지 않은 사악하고 못난 것들이 그대로 보여진다 할지라도 저들 때문에 메시지를 망치거나 변질시키지 않을 수 있기를 갈망한다.

사람들 눈치(여론)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나쁘다 할 순 없지만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는 것, 이런 몰골로 추락해 버린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의 -이들은 하나님을 위해 부름 받은 종들이다.- 추한 모습에 연민을 느낀다. 이렇게 살자고 서기관과 제사장의 소명에 응답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런데 어느 순간, 무엇이 오늘처럼 이들을 비참하고 비굴하고 비극적인 사람들로 찌그러지도록 만들어버렸을까.

우리 역시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처럼 어두움의 자식들로 추락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하나님의 것을 보는 눈을 잃어버리면 가이사의 것에 따라 춤을 추며 살아가는 것, 이런 죄악에서 나만은 예외일 것이라 생각하지 말자. 어느 순간 하나님의 것보다 가이사의 것에 연연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사는 일에 슬금슬금 발을 빼고 있는 저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의 나는 아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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