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의 入예루살렘(눅 19.23-40)

20210319(묵상)

 

 

 

승리의 예루살렘

Luke. 19.28-40

 

    본문 관찰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나귀새끼를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예수께로 끌고 와서 태우니

    제자의 온 무리가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고난주간 첫째날, 종려주일

 

이제 노중행전에서 예루살렘행전으로 전환된다(28, 9.51).

본문은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의 일정 가운데 고난주간 첫째 날(종려주일)이다. 마침내 공생애는 종려주일을 하나의 깃점으로 고난주간으로 이어진다. 한편 왕이신 예수님의 승리의 입성이라는 영광의 메시야 플롯은 곧바로 고난의 메시야 멜로디에 의해 반전된다. 그리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의 외마디 솔로(solo)로 중단되는 듯 하더니 백부장의 화답송(“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23.47b)을 따라 한 주간의 대장정이 마무리된다(23.56b). 그러나 승리의 부활을 통해 다시금 마지막 악장은 하나님을 찬송’(24.53)하는 멜로디에 의해 절정으로 성취될 영광의 재림송을 예고해 준다. 본문은 이 하나님의 나라를 내다보는 하나의 서곡(序曲)이다.

   

 

스가랴 99(22-38,40)

    ↔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3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9.9)

 

예수님은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맞은편 마을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매어 있는 것을”(29-30) 보셨고, 이를 풀 때에 주인에게 주가 쓰시겠다 하라!”(31b)고 하면 군소리 없이 내어 줄 것까지 내다보고 계셨다. 일이 이처럼 기가 막히게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진행되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무엇보다 주님은 이 일련의 일 진행을 통해 스가랴의 메시야 예언을 성취하시는 것에 초점이 맞추고자 의도하셨다. 선지자는 예언하고 메시야는 지금 이를 그대로 이루신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백성들이, 그러니까 제자의 온 무리가 기뻐서 그들이 본 모든 일에 대하여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노래”(37, 새번역)함으로써 저들 역시 스가랴의 예언(9.9 19.35-38,40)을 성취하는 일에 쓰인다. 참으로 아름다운 하모니가 아닐 수 없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전쟁에 승리한 개선장군과 비교하면 일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승리의 행렬이다. 세상 그 누가 이처럼 입성하는 자를 메시야라 칭송하겠는가. 그러나 선지자는, 아니 하나님은 세상의 방식으로 볼 때는 이해되지 않고, 또 알 수도 없는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42b,44b,)- 그런 자로 오신다.

이것은 지금 비유가 아니고 실재다(8.10). 이처럼 주님은 이 초라하기 그지없는 왕의 입성처럼 보이지만 형식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여기까지 낮아지시며 또한 순종하신다. 그리고 이를 자원하여, 더욱 능동(적극)적으로 성취하신다. 누가가 의도했든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 자리까지 섬기신다. 나는 과연 나귀새끼를 탈 수 있을까.

한편 19장에도 하나님의 나라라는 밭에 뿌려진 사악한 가라지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7,11,20-23,39,45-46,47b). 하지만 어리석게도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신들의 최후의 말로가 내 앞에서 죽이라!”(27)로 매듭될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적반하장(賊反荷杖)처럼 예수님을 죽이려고 꾀하”(47b)는 어리석은 죄악을 백주에 감행한다. 바리새인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39).

하지만 주님의 메시야적 소명의 성취를 가로막을 자는 없다(40). 그는 누구든지 실패할 것이며 파멸할 것이다(27). 주님의 의지는 매우 단호하고 확고하다(40, 2.11 참조). 이것이 뻔히 예상되는 사태를 아시면서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야 마시는 주님의 결심이자 열심이다. 죽기 위해 들어가는 길에 죽여주겠다니 고맙지만 그렇다고 주님의 섭리에 쓰이는 긍정적인 도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저들의 길은 단 하나다(27).

   

 

부스러기 묵상

 

    “주가 쓰시겠다 하라!”(31b)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메사야의 영광스런 입성을 위해 쓰인다.

물론 저희가 이를 알았든지 몰르는지와는 상관이 없이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는 일에 적절하게, 매우 긍정적으로 쓰임을 받는다(28-38). 하지만 반드시 이런 배역을 맡은 자들만이 예루살렘 입성의 길목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39). 이 둘의 긴장과 충돌은 복음서 전반의 국면을 이끌었지만, 그럼에도 진정한 쓰임과 그에 따른 헌신은 누구인가를 알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나귀새끼를 끌어온 두 제자들, 졸지에 어린 나귀새끼를 주님께 드린 나귀의 주인,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은 자들,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환영의 행렬을 이룬 사람들, 또한 이 모든 일을 예언한 스가랴, 이들은 모두가 다 빛나는 조연(助演)들이다. 그리고 정말이지 더더욱 이 모든 일을 성취하시는 그리스도, 그분은 분명 영광스러운 주연(主演)이시다.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영광스러운 예루살렘이다.

나의 배역을 생각해 본다. 지금껏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 발목잡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는 감히 장담할 수 없다. 좀 더 폭넓게 가자면 내 곁의 사람들에게 딴지걸기의 유무를 적용하자면 나 역시 돌에 맞아도 수 없이 그래야만 하는 죄인이다. 인정한다. 하지만 뭇사람들처럼(7), 의도적으로(20-21), 그놈의 돈 때문에(45), 무지 때문에(42b,47b) 지금도 그 버릇 버리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죄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나의 결말은 보나마나 뻔하다: “내 앞에서 죽이라!”(27b)

나귀새끼가(35, 22.28,30), 내 손에 들린 종려나무 가지가(37, 21.8), 돌들이(40) 나를 비웃는(참소하는) 참으로 비참한 형국에 빠지기 전에 내가 선 곳이 과연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끊임없이 돌아보는 일에 게으르지 말기를 가슴 깊이 다짐해 본다.

주님!, 나귀새끼를 쓰셨듯이 나를 쓰소서! 내 안에 나를 향한 주의 음성이 늘 이처럼 들려지게 하소서: “주께서 쓰시겠다!”(34) 나귀로 태어나 나귀로 살다가 나귀로 끝날 미물도 주께서 쓰시겠다 하시니 주의 쓰심에 합당한 도구가 되었는데 나는 무엇인가. 아직도 주님이 쓰시기에는 불편한, 아직도 어설픈, 아직도 공사중인, 아직도 쓸 만 한 구석을 찾으려 해도 어디 하나 쓸모없는 부지깽이 같은 나는 아닌지, 그런데 이 부족하고 못난 나를 어디에 쓰시려고 부르셨는지, 언제까지 기다려 달라고 아우성만 칠 것인지, 정말 내 맘대로 주께서 기다려주실 것인지, 어느 것 하나 자신이 없다. 순례자와 같은 나그네 인생길을 돌고 돌아 본향으로 귀향하고 있는 길목에서 잠시 나귀 생각에 잠겨본다. 나귀보다는 잘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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