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경의 메시지(눅 18.31-43)

20210316(묵상)

 

 

 

한 소경의 메시지

Luke. 18.31-43

 

    본문 관찰

 

    네 번째 수난예고(31-34)

    한 소경의 믿음(35-43)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시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9.51)

 

두 부류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주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31b)는 말씀의 성취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긴 여행을 하고 계시는 중이시다(9.51- ). 하지만 이 고난과 죽음의 길이 몇 차례 예고되고 있음에도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알지) 못하고 있다(34, 9.22,45, 17.25). 제자들만이 아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고 있는 노중(路中)에서 어떤 한 부자 관리는 주님과 함께 갈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한다(23). 하지만 한 소경은 믿음으로 구원(치유)을 받고서 백성이 이 모습을 다 보고 있는 중에 예수를 따르니”(43a)로 응답한다.

   

 

네 번째 수난예고(31-34, )

 

    ①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9.22)

    ②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9.44)

    ③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17.25)

 

벌써 네 번째 수난예고다. 처음 두 번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에 하신 말씀이고(9.22,44), 다음 두 번은 예루살렘을 바로 눈앞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17.25). 어떠한 방해와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어도 예수님의 예루살렘은 그 누구도 결코 막을 수 없었으며, 이처럼 이제 남은 여정 역시 그러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제자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도, 또 알지도 못하였다(34). 그러니 동상이몽(同床異夢)일 수 밖에! 이러니 주님은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셨을까. 임박한 고난이 바로 문 앞에까지 와 있음에도, 제자들은 이 계속되는 예고편을 듣고 있음에도 마이동풍(馬耳東風)이다.

나도 뭐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주님의 다시 오심이 임박하고 있고,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시고 계시고, 계시된 말씀이 날마다 내게 펼쳐지고 있음에도 주님과 같이 움직이지 못하고서, 그러니 생각도 말도 행동도 내 맘대로 이런저런 삶을 살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그분은 지금 슬슬 웃으시면서, 지나가는 말로, 어떤 이야기 속에 슬쩍 끼워 넣어서, 들으려면 듣고 말려면 말고, 이 말을 듣고 은근히 좀 말려 달리는 뜻으로, 할 수만 있으면 피할 수 있는 명분을 찾으시려고 깨닫거나 알아듣지도 못하는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 분명하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24.25-26)

 

주님은 지금껏 당신에게 예언된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31b)을 이루시는 메시야로 일해 오셨다. 하지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제자들까지, 아니 하나님 아버지까지 당신을 버리시는 것 같은 절대고독 속에서, 그럼에도 이 십자가로 가는 길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고난과 죽음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시는 주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목표하고 원하는 것을 위해 오직 내 길(인생)을 하나하나 쌓아가는 것 밖에는 관심이 없으니, 이러고도 난 주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을까.

언제나 철들어서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드리면서 살게 될지, 내 뜻과 계획과 목표만을 위해 애쓰고 땀 흘리는 못남을 버리고 정말 언제쯤 주님의 제자스럽게 나를 드리며 살 수 있을지, 주님을 보고 울고 나를 보며 한숨짓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이 못난 제자들을 그대로 품고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로 나아가신다. 주님이 그러셨듯이 나도 나와 다른 사람들을 -정말,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다.- 묵묵히 품고 갈 수 있는 그런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좁쌀 같은 내 마음을 어찌할까 싶어 멀어만 보이는 주님닮기가 갑자기 흐려진다.

   

 

한 소경의 믿음(35-43)

 

    “예수를 따르니 ”(43a)

 

이와(한 관리 부자, 제자들) 대조적으로 한 소경의 언행은 눈부시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주님 앞에서 믿음을 고백하고, 그것이 주님의 들으신 바가 됨과 동시에 예수를 따르니로 응답한다. 누가가 이를 의도했든지 아니든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관리와 소경을 좌우 날개로 하고 그 중앙에 제자들이 있으나 -그것도 주님의 수난예고를 다시 듣고 있었다.- 제자들은 아쉽게도 이 흐름을 주도하지 못한다.

그는 마땅히 소리쳐야 할 분이 주님이심을 정확하게 보고 있었고, 놀랍게도 십자가로 가는 길에 반응한 외침은 변방에서 들려왔으며(38), 이것을 그의 믿음이라, 그리고 이것이 그러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치유)하였느니라!”는 주님의 은혜를 낳는다(42a).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로 받은바 은혜에 응답한다(42b). 그뿐 아니라 이를 본 모든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는 일에 쓰임을 받는다(43).

한 소경을 생각한다. 그는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는지 후에 시각장애인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35). 얼마나 힘겨운 삶의 여정을 지나오고 있었을까. 그러던 어느 날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직감한다. 그는 그 광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다(36).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메시야의 오심을 심령의 귀를 통해서 듣는다.

그리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또 더욱 큰 소리로 외친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38,39b) 하지만 이러한 소리 나는 복음은 사람의 소리에 의해 늘 무시되고 부정된다: “잠잠하라!”(39a) 어딜 가나 은혜의 불을 끄는 소방수들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한 길 가는 사람들에게서 터져 나왔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주님과 동행하기를 포기하고 돌아가 버린 어떤 관리도 문제이지만(18,22), 그러나 주님이 가시는 길에 앞서 가는 자들역시 극도로 이기적인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러나 주님은 더 이상 이를 방치하지 않으시고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40) 명하신다. 사람들, 특히나 주님의 말씀께나 들었다는 자들은 그를 주님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했지만 주님은 바로 그 사람을 가까이 부르신다.

실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되는 순간이다(13.30). 그에게는 자신이 그렇게도 원하는 바인 보게 되는 일이 시작된다: “오냐,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42, 현대인의성경) 소경은 열린 영혼으로 주님을 보고 있고(믿음), 그를 통해 새생명을 누리기를 소망하며 언행하고 있고(고백), 마침내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되면서(치유), 동시에 주님을 따르는 자로 헌신한다(제자, 43). 놀랍게도 나를 따르라!”(22c)는 제자의 길을 걸어가는 자는 어떤 부자 관리가 아니라 다름 아닌 한 소경이었다.

   

 

부스러기 묵상

 

    “어두운 내 눈 밝히사 진리를 보게 하소서

      진리의 열쇠 내게 주사 참 빛을 찾게 하소서

      깊으신 뜻을 알고자 엎드려 기다리오니

      내 눈을 뜨게 하소서 성령이여!”(찬송가 3661)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그는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1)을 온 삶으로 간증해 준 과부처럼 재판관(하나님, 7-8)을 따르는 자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9)이기를 거부한 세리처럼,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로(16-17), 재물(집이나 가족들)보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우선순위임을 삶으로 보여주며(18-30), 보이지 않는 세계를 늘 보며 사는 자로 주님을 좇는 자, 그가 바로 나를 따르라!”(22c)는 하나님의 나라에로의 초대라는 영광스러움을 누리는 제자의 모습이다.

좀 의아스럽기는 하지만 이 대목에서 또 다시 당신의 고난에 대해 예고하시는 이유가 희미하지만 깨달아지는 것 같아 좀 후련하기까지 하다. 뭐냐면, 당신마저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시다는 점이다. 이 길은 주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시듯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31b)는 고난의 메시야에로의 길이다.

아버지의 독생자이신 당신마저도 이처럼 살아가시듯이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양자)된 제자 역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고난과 고통과 아픔을 감당해 가는 것, 바로 그 안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스러움을 주님은 지금 말씀하고 싶어하시는 것 아닐까.

주님이 그러셨다면 주님을 좇는 제자인 나 역시 주님을 위해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32-33a)지만, 그러나 이것이 주님처럼 사는 길이라면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33b)- 고난을 마땅히 지불해야 할 대가로 받아들이며, 오히려 주님을 위해 고난 받게 하심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좀 어렵다고 징징거리며 주님께 칭얼거리는 나의 못남이 부끄럽다. 소경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하신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오직 주님을 따르는 제자답게 사는 것, 이것이 지금이곳에서 내 안에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며 누리며 사는 길이리라. 비장한 모습으로 당신이 가야 할 길을 말씀하시는 주님의 눈빛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보려고 몸부림치다가 다시 주님과 눈이 마주쳤다. 언제쯤 눈빛만 보아도 그분을 알고 느끼고 누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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