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부자 관리의 딜레마(눅 18.18-30)

20210315(묵상)

  

 

 

큰 부자 관리의 딜레마

Luke. 18.18-30

  

    본문 관찰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네가 계명을 아나니 하라 하였느니라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네가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부자와 천국

 

질문과 대답 형식의 긴 대화가 이어지면서 메시지가 성취되고 있다.

이번에는 어떤 관리(큰 부자)의 영생에 대한 질문이다(‘무엇을하여야, 18). 하지만 대답을 들은 자들은 어떤 부자가 이 무엇을에 응답(순종)하지 못하고 돌아가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24-25)을 듣고 다시 더욱 더 혼돈스러워 한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26) 이때 베드로는 무엇을’+‘누가’=우리라는 공식을 꺼내 든다(28). 과연 예수님의 판단(해답)은 무엇일까. 만만찮은 주제가 묵상을 노크한다.

 

 

듣는 자들의 질문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18a)

    “듣는 자들이 이르되 ”(26a)

    “베드로가 여짜오되 ”(28a)

 

어떤 관리와 예수님 사이의 첫 질문과 대답에서는 [무엇을+계명=영생]이라는 법칙이 만들어진다(18-20). 재미난 것은 예수님의 대답에 나오는 십계명의 순서가 바뀌어 있음이다. 아마도 그 부자 관리가 매우 자신 있어 하는, 그래서 당당하게 무엇을을 꺼내들 수 있도록 해 주었던 계명(율법)부터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싶다. 부자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21)는 대답에서 알 수 있듯이 어쩌면 그는 예수님의 영생법칙(永生法則)을 듣고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20)은 결론으로 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공식이었다. 이 문제를 바르게 풀려면 22절이라는 중요한 공식을 거쳐야만 영생이라는 문제의 결론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풀려면 다음과 같은 공식이 만들어진다: 무엇을(18)+(계명+22)=영생(“나를 좇으라!) 마침내 자신이 풀지 못했던 문제의 해법이 주어졌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어떤 관리는 22절을 자신의 어떻게에 연결하는 것을 포기한다.

그렇다면 그는 20절과 22절 사이에 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어떻게’(무엇을)의 질문에 응답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자기 기준(법칙)에서 볼 때 그는 이 무엇을다 지키었나이다!”(21)라고 언행할 정도였다. 그는 이처럼 자기의 영생법칙을 통해 영생을 이루고자 했다. 예수님의 영생법칙이 풀리지 않던 문제의 해답으로 제시되고 있음에도 그는 기존의 법칙만을 고집한다. 이것이 어떤 큰 부자의 영생에 대한 영적(靈的) 딜레마다.

율법에서 복음으로 나아올 수 있는, 옛 법칙에 의해서는 영생의 문제를 풀 수 없음을,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의 새 법칙인 복음을 따라 살기로 결정해야 했음에도 이 부자는 다시 껍질 안으로 도피해 버린다. 그는 자신의 문제를 자기의 공식으로 풀려고 만 한, 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우문(愚問, 18)에 대한 현답(賢答, 22)이 왔음에도 그는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그만 오던 길을 되돌아가 버리고 만다(23).

   

 

예수님의 답변

 

   부자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단지 물질의 많고 적음이 부자(재물이 있는 자)의 기준이 아니라 이것이 자기 의()를 이루는 것에만, 그것도 자기 기준과 원칙만큼만 율법(계명)에 따라 부()를 사용하는 자를 가리키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수준의 율법 준수 -율법을 자기 마음대로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소위 관원육경’(모세오경+1) 쯤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만으로도 영생의 문을 스스로 열고 들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 알량함이다.

어떻든 재물은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을 어렵게 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한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24)와 관련하여 계명(율법)만으로는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22a)다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주목한다. 참으로 놀라운 역설은 영생을 위해 고민하면서 그것과 대칭되는 이 땅의 유한하고 찰나적인 소유로부터 자유하지 못함이다.

물론 이처럼 계명(율법)+22절을 살아가는 것이 원인이 되어 영생,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라는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22절 하반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럼에도 이 둘 사이의 긴장은 매우 유기적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의 드러남에는 일련의 흐름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22c)는 제자도(Discipleship)는 이미 이 세상의 소유나 물질로부터 초연(자유)할 것을 전제한다. 이것은 영생의 조건이 아니라 영생을 얻은 자의 가시적인 모습이자,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듯 자기 안에 이미 시작되었음을 그러내는 삶이며, 구원 얻은 자의 마땅한 삶의 열매들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부자는 영생의 문 밖에 있는 자에 불과한 것을 증명 받은 것에 불과한 질문이었다.

이때 듣는 자들의 질문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26) 이제 청중들은 혼란에 빠졌다. 이것이 내가 무엇을’(18)에서 그런즉 누가’(26)로 바뀐 미묘한 긴장이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윤리(救援倫理)는 한 부자 관원에게만이 아니라 -그는 이미 주님의 설교를 듣고 변화되지 못한 채 돌아가 버렸다.-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자들에게 심각한 영향력을 미쳤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아무도 그 주도권을 주장하거나, 인간적인 어떤 수단들을 동원하여 -그것이 율법(계명)을 준수하는 것일지라도- 인간 스스로의 힘이나 노력을 통해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명백한 결론 앞에 모두가 다 서 있다(26). 이것은 말씀을 제대로 들은 자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바로 이때 주님으로부터 구원에 대한 분명한(명쾌한) 복음이 선언된다: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27)

 

정말 아멘이다. 유감스럽게도 어떤 관원은 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자신에게 익숙한 율법(계명)의 준수만을 부둥켜안고 주님 곁을 떠났다. 이것이 세상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3.21a)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복음이다. 따라서 율법이 아닌 주님의 새계명의 지배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사람에게 말한 바율법을 붙들고 있으니 .

한편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은 [무엇을(18)+(계명+22)=영생(“나를 좇으라!)]이라는 은혜를 구원 안에서 누릴 때 이미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아니 이미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29). 물론 이것 역시 뭔가를 버려야만, 그러니까 인간 편에서 어떤 것을 행해야만 구원이라는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버리면 얻는다는 이 역설의 복음이야 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관통하고 있는 진리다(30). 어리석게도 한 부자 관원은 이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율법(계명)만 잘 준수하면 영생의 문이 활짝 열리는 줄로만 알았다. 제자든, 그가 누구이든, 어떤 부자 관원이든, 그 누구도 예외는 없다. 우리 역시 하늘의 보화를 쌓는 것과, 이 세상의 재물을 주님이 원하는 일에 사용하는 것과의 갈림길에서 어떤 관원들처럼 살 것인가(18,23), 아니면 제자들처럼 살 것인가(28)를 결정해야 한다. 어쩌면 이를 위해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의 반열에 서야 하는 피눈물 나는 결단이 눈앞에 펼쳐질지도 모른다.

   

 

부스러기 묵상

 

    어떤 관리 - ‘내가 무엇을 하여야’(18)

         → 듣는 자들 - ‘그런즉 누가 구원을’(26)

              → 베드로 -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28)

 

어떤 관리는 재물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로 막고 있었다(23-25).

그럼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 아버지와의 풍성한 삶을 방해하고 있을까. 지금은 잘 하고 있는 것, 그것도 주님의 기준과는 현저하게 다른 것에 불과한, 그러니까 유효기간이 지난 율법(계명)의 준수가 구원의 문을 여는 열쇄하고 생각하는 지극히 어리석고 유치한 수준(습관)을 버릴 때다.

더 악하고 추한 것은 가장 깊숙한 본질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고, 아니 그럴 마음은 전혀 없이(22-23), 반대로 오직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잎사귀들(20-21)만을 자랑하고 있는 이중성이다.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자기 기준을 따라 종교적인 열심(열정)만을 불태운 부자 관리처럼 어쩌면 우리도 [내가복음](5복음서)에 스스로 길들여져 있는 율법중독증 환자로서 영생과(永生科) 진료를 받아야 할 중환자는 아닌지 모르겠다.

더욱 주님의 처방전(處方傳, 22)을 받았음에도 자각증상(18,21)에 의지하여 구원의 문제를 스스로를 치료하려는 정신 나간 환자는 아닌지 싶어 좀 불편하다. 물에 빠진 자가 자기 머리를 잡아 올린다고 건져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인간이 어찌 스스로의 노력과 힘을 수단 삼아 구원을 얻어낼 수 있으랴. 그럼에도 어리석은 부자는 율법을 의지하여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27)- 부자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기 것을 나눠 주는 것보다 더 어렵고 힘든 것들을 포기할 때 하나님은 내세(영생)는 물론 금세(今世)에서도 하나님의 부요함을 누리게 하실 것을 약속하신다(30). “나눠 주라!”를 따라 살면 하늘에서 있으리라!” 하시며(22),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가장 소중한 것들을 버린 자현세에 내세에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30).

부자의 계산법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의 법칙을 이룰 수 없다. 샘이 깊은 물은 퍼내고 퍼내도 언제나 마르지 않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굵은 줄들을 의지하지 않을 때 하늘의 썩지 않는 영생의 줄을 붙들 수 있다. 이 역설의 복음을 이해하고, 그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부요함을 맛보며 살아가는 복 있는 사람이기를 기도한다. 주님의 대답을 따라 계속해서 누려야 할 하나님의 나라의 법칙을 온 몸과 마음으로 붙들어 본다. 하나님의 나라의 푸르름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제목 날짜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도 망하리라(눅 13.1-9). 2021.02.08
한 소경의 메시지(눅 18.31-43) 2021.03.14
한 부자의 인생(人生)보고서(눅 16.19-31) 2021.02.16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맹인에게도 임한다(요 9.1-12). 2022.01.25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눅 3.1-6) 2021.01.06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시다(눅 4.31-44). 2021.01.09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님을 보내신다(요 14.15-26). 2022.03.30
표적을 요구하지 말고, 회개가 답이다(눅 11.29-36) 2021.02.04
표적은 믿음이라는 꽃으로 피어난다(요 9.35-41). 2022.01.25
포도원 이야기I,II(눅 20.9-26) 2021.03.18
평지설교3: 하나님의 나라를 듣고 행하라!(눅 6.39-49) 2021.01.17
평지설교2: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눅 6.27-38) 2021.01.15
평지설교1: 평지에 서신 그리스도(눅 6.12-26) 2021.01.15
평안,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요 14.27-31). 2022.03.30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5). 2021.12.29
큰 부자 관리의 딜레마(눅 18.18-30) 2021.03.10
최후의 만찬(눅 22.14-23) 2021.03.22
첫 번 크리스마스!(눅 2.1-20) 2021.01.02
첫 번 부활절(눅 24.1-12) 2021.03.27
지금은 누가복음의 선교처럼(눅 8.1-3)-선교주일 2021.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