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부자의 인생(人生)보고서(눅 16.19-31)

20210220(묵상)

  

 

 

한 부자의 인생(人生)보고서

Luke. 16.19-31

  

    본문 관찰

 

    한 부자가 있어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이에 그 거지가 죽어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구하노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인생 풍경화

 

서로 다른 두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19 20).

살아 있을 때 부자는 19절을, 거지는 20절을 각각 그리며 살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 두 그림은 이 세상이라는 화폭에 그려지고 있다. 그 그림은 바로 자기 자신의 인생이다. 한편 이 그림은 자신만이 그릴 수 있으며, 한번 그리고 난 후 어느 시기가 지나면 결코 다시 그릴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에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이것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려가는 인생 풍경화다.

부자는 자신의 인생 풍경화에 20절과 같은 그림이 그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아주 멋지고 화려한 호화롭게 연락(宴樂)하는 그림을 그렸다. 동시에 부자는 나사로의 그림에 관심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얼마나 고독하고 처절한 밑바닥 인생 풍경화를 그리는 사람이었는가를 알지 못했다. 그는 거지 나사로와 서로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았고, 비록 서로 공존하고 있었을 뿐 전혀 이질적인 인생 풍경화를 그리며 살았다.

반면 전혀 다른 하나의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거지는 부자의 그림에 어떤 영향도 줄 수 없었으며 단지 부자의 부스러기를 통해 볼품없는 초라한 인생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뿐이다. 부자의 그림에는 고운분위기가 있지만 나사로의 인생 풍경화에는 까지 등장할 정도로 흉물스럽기 그지없어 보인다.

   

 

죽음 그 이후

 

하지만 두 사람은 22절에서 죽음으로 급반전된다. 죽음은 이 두 사람의 인생을 갈라놓고 있다. 그러니까 부자와 나사로의 삶은 이생(현세)으로 끝이 아니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던 것이다. 거지는 천국에서 아브라함과 함께,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가운데 죽음 그 이후의 새로운 그림이 이어지고 있다.

본문은 이들이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그것을 목적하지 않는다. 부자는 바리새인을, 거지는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던 세리와 죄인을 가리키지만(15.1-2). 주님은 이 그림을 통해서 부자(바리새인)와 죄인(세리)의 실패와 성공의 원인을 가르치시려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성공 그 이후를 그리시고 있는 것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

 

죽음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22). 사람은 다 죽는다. 언젠가 나에게도 그 때가 반드시 온다. 불행하게도 부자는 죽기 이전에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연락하는 삶이 끝나고, 그 이후가 있음을 준비하지 못했다. 그는 행복한 것처럼 보일 때가 가장 불행한 때임을 알지 못했고, 가장 불행한 시기를 가장 행복한 것처럼 살았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부자처럼 살아간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이 가장 비극의 주인공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지금부자처럼 사는가, 아니면 거지처럼 사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후가 더 중요하다. 이 세상이 아닌 영원한 세상에서 아브라함의 품에서 살 수 있는 자로 남은 생을 통과해 내고 있다면 그는 가장 행복한 영원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죽음 이후가 있다(23).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생활의 시작이다. 그런데 이 새생활이 부자처럼 올 것인가, 아니면 거지처럼 임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부자는 이 사실을 죽음 이후에 알았다. 이것이 그의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의 죽음 이후는 고통으로 묘사된다.

거지에게도 죽음 이후는 있다. 이 땅에서 거지로 살았기 때문에 죽음 이후에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거지가 아니다. 그는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의 죽음 이후는 아브라함과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부자의 소원은 응답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가 죽음 이전에 해결해야 할 것을 죽음 이후 비로소 저 곳에서야 소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소원들은 거절된다(24,27,30). 다행스러운 것은 부자와 거지와는 다르게 우리는 이 두 그림을 동시에 다 볼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누구의 인생이 실패한 인생이요, 허망한 그림인가를 알 수 있는 오늘(현세)이라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본문의 부자는 바리새인을 지칭한다(15.1-2). 그렇다면 내가 바리새인처럼 이생을 마친다면 그 끝은 곧 부자처럼 시작된다. 바리새인들은 천국과 지옥, 영생과 영벌, 하나님의 사람과 진노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진리를 믿고 받아들이는데 실패한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엄청난 결과를 자초하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이들의 때문이다(14, 15.1-2).

 

 

부자의 발견

 

부자는 지옥이 어떤 곳인가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는 지옥이 고통 받는 곳임을 체험한다. 물론 때는 이미 늦었지만 말이다. 어떻든 그의 깨달음은 정확했다. 지옥은 갈 만 한 곳이 못된다는 체험 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부자는 이 사실을 지옥에 가 본 다음에야 깨닫는다.

지옥은 공간 이동이 불가능하다(26). 그러니까 천국에서 지옥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통행할 수 없다. 지옥에서 잘 보이면(지옥생활을 모범생으로 보내면), 또는 그곳에서 회개하고 새롭게 결심하면 천국으로 올 수 있는 어떤 기회가 다시 있는 그런 곳이 아니다. 지옥에서 다시 지상으로 올 수 있는 길은 없다. 지옥은 그곳을 경험하고서 다시 어떤 기회가 주어지는 간이역(연옥)이 아니다(23.43).

또한 부자는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24)라고 말하면서 지옥은 고통 받는 곳’(28)이라고 이야기한다. 부자의 경험에 의하면 혀에 물 한 방울이 필요할 정도로 견디기 어려운 곳이다. 부자는 감사하게도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지옥을 먼저 탐방하고, 그 지옥의 거주민이 된 체험을 우리에게 증언해 준다. 놀랍게도 이 고통은 일시적이거나, 그 끝이 있는 한시적인 것이 아니다.

지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회개하지 않은 자들이 가는 곳이다(30). 부자는 자신의 형제들이 지옥에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회개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매우 정확한 지적이며 통찰이다. 부자가 어떻게 이 구원의 진리를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지식이 자신의 인생행로에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다.

이로 보건데 단순한 지식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부자에게서 그렇듯 구원의 진리에 대해서 아는 구원받은 것은 별개다(8.29, 2.19). 동시에 부자는 회개의 기회를 놓쳤다. 그는 부자로 살 때, 구원의 진리를 듣고서 알았을 때, 그때가 회개의 때였다. 그러나 이 회개의 시간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회개의 때가 지나가기 전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한다. 지금이 구원의 때이다(고후6.2).

지옥은 이렇듯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이 가는 곳이다(29,31). 진정한 기적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 그 이상이다. 기적은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자신을 아는 것이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난 경험,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는 사람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그는 그 일을 기적으로 믿지 않는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31)

 

부자는 지옥에 대한 지식을 지옥에서 알게 된 것이 아니다. 그는 이생에서 부자로 연락하며 살고 있을 때부터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천국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복음을 거부했다. 부자는 지옥에 오기 전에 이곳에 오는 것을 거부했어야 했다. 부자(바리새인)는 이 사실을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왜 그것을 무시하였을까. 이것이 이 비유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부스러기 묵상

 

본문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주님이 비유 가운데 등장시킨 부자는 과연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이 점을 분명히 정리해야만 이 비유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비유는 단순히 은유적으로 해석되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부자는 누구인가. 먼저 비유가 시작되는 1614절이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그렇다면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는 다름 아닌 바리새인들이다. 이것이 이 비유를 단순히 도식에서 이해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오류를 방지해 준다.

물론 성경은 부자=지옥을 말하지 않는다. 한편, 역설적으로 바리새인들이 본문의 비극을 맞이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알게 함으로써 나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바리새인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며 반항한 것 때문에 현세에서는 부자처럼 살았지만 내세에서는 지옥의 대우를 받은 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비극의 견본(sample)일 뿐이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씀 듣기를 거부한(29,31).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로 세우심으로써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큰 죄와 거짓 속에 있는가를 고발하신다. 이렇듯 말씀을 거부하면 부자와 같은 이생과 내생에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지금 이생에 있을 때, 그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대상이다. 불행하게도 이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아니 이미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거부한 자들이다. 그들은 신령한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을 거부하였고, 하나님의 미래 계획마저도 자기들 마음대로 생각했다.

하나님의 기회는 이 세상에 살 동안에 유효하다. 바리새인이었던 부자는 이러한 기회를 다시 한 번 더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그는 이 세상에 살 때에 자신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요청을 들었어야 했다. 따라서 아무도 핑계할 수 없다. 부자는 지옥에서야 하나님께 소원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것이다. 기회는 지옥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총을 맛볼 수 있는 기회는 이 세상의 시간표 안에서만 유효하다.

나는 누구인가? 만약 나 역시 바리새인처럼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거부하고, 나의 율법을 따로 만들어 놓고, 왜곡된 진리를 따라, [내가복음](5복음서)대로 행동하고 살아간다면 나 역시 바리새인인 부자와 같은 길을 가게 된다는 것을 교훈받는다. 한 부자의 인생보고서는 그 교본(敎本)대로 따르다가는 나 역시 실패하는 인생이 될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신 것이 이것이다. 나에게도!

 

  

제목 날짜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도 망하리라(눅 13.1-9). 2021.02.08
한 소경의 메시지(눅 18.31-43) 2021.03.14
한 부자의 인생(人生)보고서(눅 16.19-31) 2021.02.16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맹인에게도 임한다(요 9.1-12). 2022.01.25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눅 3.1-6) 2021.01.06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시다(눅 4.31-44). 2021.01.09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님을 보내신다(요 14.15-26). 2022.03.30
표적을 요구하지 말고, 회개가 답이다(눅 11.29-36) 2021.02.04
표적은 믿음이라는 꽃으로 피어난다(요 9.35-41). 2022.01.25
포도원 이야기I,II(눅 20.9-26) 2021.03.18
평지설교3: 하나님의 나라를 듣고 행하라!(눅 6.39-49) 2021.01.17
평지설교2: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눅 6.27-38) 2021.01.15
평지설교1: 평지에 서신 그리스도(눅 6.12-26) 2021.01.15
평안,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요 14.27-31). 2022.03.30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5). 2021.12.29
큰 부자 관리의 딜레마(눅 18.18-30) 2021.03.10
최후의 만찬(눅 22.14-23) 2021.03.22
첫 번 크리스마스!(눅 2.1-20) 2021.01.02
첫 번 부활절(눅 24.1-12) 2021.03.27
지금은 누가복음의 선교처럼(눅 8.1-3)-선교주일 2021.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