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는 물을 마시겠느냐?9(요 4.1-14)

20191020(양무리교회)

 

 

 

내가 주는 물을 마시겠느냐?

Jn. 4.1-14

 

    본문 관찰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1-2, 3.22,26)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3-4)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5)

    야곱의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6)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사마리아 여자: 물을 길으러 왔으매(7-8)

        -물을 좀 달라!

    One to One Bible Study(9- )

   

 

One to One

 

    #사마리아 여인의 장차 보리라!’(1.51)

       유대인(9) ->

          야곱보다 큰 이(12) ->

             주(15) ->

                선지자(19) ->

                   메시야(그리스도, 25,29) ->

                      세상의 구주(42)

 

우리 주님의 발걸음이 우연(偶然)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세상에 우연은 없다. 그것도 한 생명을 구원하는, 그리하여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39b)는 구원의 역사가 계획 없이 우연히 진행되었을 리가 만무하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소위 사마리아 벨트’(사마리아 금지령)에 예수님께서 제한 받으셔야 되겠는가?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러한 죄의 장벽을 언제나 정복하신다. 그렇다. 복음이 가지 못할 곳은 아무 곳도 없다. 또한 복음이 필요하지 않는 인생이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로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3-4)

 

예수님의 사마리아은 다분히 어떤 목적이 있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3) 가시려면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한다. 한편 사마리아는 역사적으로 앗수르의 침공(BC 722, 왕하17.6) 이후 혈통과 종교의 순수성을 상실함으로써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가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모든 장벽을 친히 뛰어 넘으신 것이다. 주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온 산울을 찾아 다니셨다(15.3-7, 10.1- ). 그렇다면 잃어버린 사마리아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찾아가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마리아로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4)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는 ‘Must’로 번역된다. 이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구름 따라 길 가는 나그네 행로가 아니다. 이처럼 복음은 확장되고 있다. 이것은 사도행전적 복음의 전파를 말한다(1.8): 예루살렘(2.13- ) 유대(3.22) 사마리아(4.4- ) 세상(땅 끝, 4.42)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Sychar)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5a)

 

한 인생을 정복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친히 사마리아로 찾아오신 것이다: 유대 사마리아 수가우물가 여인 그리고? 그렇다면 주께서 나를 만나주시기 위해서도 영적 포위망을 좁혀 오시기를 간구한다. 하지만 사마리아는 여리고 성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6.1- ). 우리 주님이 가장 좋은 것으로, 복된 소식을 전하시기 위해서 이신 주님이 오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는 아직도 깊은 영적 어두움의 잠을 자고 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인생이 다 이와 같다.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5b-6a)

 

그러나 이 동네는 지금처럼 처음부터 이러한 영적 황무지가 아니었다. 오랜 역사적 전통과 깊이가 있는 동네였다. 한 때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던 족보 있는 신앙의 가문이 자리잡았던 추억의 도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형편없이 가난한, 영적으로는 철저히 소외된 그런 동네가 되어 버렸다. 이 우물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과 인도하심은 언젠가부터 희미한 하나의 기억으로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이 우물에서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찾지도 또한 바라보지도 못했다. 단지 갈한 육신의 목을 축이며, 의식주(衣食住)의 방편으로서의 물을 얻어가는 전형적인 우물가로서의 역할 밖에 없는 초라한 그런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 처음부터 신앙이 화석화되고, 미지근하고, 습관화되고, 형식화되는 것이 아니다. 그 옛날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찬란했던 우물가가 이제는 그 명맥만 유지하는 곳에 되어 버린 것처럼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그 나중은 심히 미약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13.30), 그런 몰골로 전락할 수 있다.

조상들이 물려준 눈에 보이지 않은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은 온데 간데 없고, 오로지 보이는 우물만 남아 그 명맥만 유지하는 가난한 신앙, 그게 나 아닌가? 어제(주일학교, -고등부)는 화려한 부자였는데, 정작 오늘(지금)은 가난한 거지로 살고 있지는 않는가? 바로 몇 대() 만 올라가면 야곱과 요셉과 같은 능력의 사람들로 빛나는 가문을 이루었는데 나의 대()에서 그만 그 아름답던 신앙의 전승이 끝나갈 위기에 처 해 있지는 않은가? 우물만이라도 남아 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정말 형편없는 모습으로 자존심만 높은 그런 몰골은 아닌가? 자신의 영적인 내면 세계는 철저하게 무너졌으나 그것은 관심도 없고,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지도 깨닫지 못하고서 우물만을 자랑하고 가슴 뿌듯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그런 사람은 아닌가?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6시쯤 되었더라.”(6b)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7a)

 

오늘도 계속되는 우리 주님의 전도여행은 쉴 여유마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무엇 때문에 지쳐 있는가? 여인의 이력서(16-18)를 보건데 많은 사람들이 우물을 찾는 시간대에 우물가에 나갔을 것 같지 않다. 여인은 복음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마저 소외되어 있었다. 여인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정말 갈급해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우물가를 찾은 것과 우리 주님이 우물가를 찾은 시점이 일치한 것이다. 여인이 일찍 물을 길러 갈 수도 있었고, 예수님이 좀 더 일찍 오셨거나, 아니면 좀 더 늦게 이 우물가에 도착하셨다면 여인과 예수님의 역사적인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이처럼 세상에 우연은 없다. 아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우연이란 결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여인은 큰 축복을 받은 것이다. 주님은 내가 회복되어야 할 자리에 먼저 오셔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 지금 우물가에 지쳐 방황하는 길 잃은 어린 양()인 나를 만나기 위해서 주께서 문밖에 서서 기다리고 계신다. 주께서 먼저 오셔서 기다리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물을 좀 달라!”(7b)

 

전혀 뜻 밖에 우리 주님이 먼저 여인에게 을 요구하셨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교제는 이제껏 단절되어 있었다(9). 그들은 서로 지름길을 마다하고 요단 동편의 우회로를 통해 돌아서 다니곤 했다. BC 722년 앗수르(Assiria)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이래로 사마리아인들은 혈통과 신앙의 순수성 이 두 가지 모두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복된 만남’(encounter)이 이루어졌다.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이 먼저 찾아 오셨다는 점이다. 내가 걸어가는 인생의 길목에 서셔서 나를 부르셨다. 주님은 늘상 반복되어지는 삶의 자리를 찾아오신 것이다. 그리고 어둠에 갇혀 목말라 하는 나를 만나 주셨다. 늘 반복적으로 물을 길던 우물가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자리가 될 줄이야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는가? 지극히 평범했던 내 인생의 자리가 이처럼 생의 가장 중요한 만남이 되었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주를 만날지 알 수 없다.

   

 

네가 만일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10a)

 

주님은 여인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러나 여인은 자신 앞에 서 있는 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1.43-51 참조). 그것만큼 계속 딴소리만 하고 있다. 영적 무지다. 이처럼 죄인은 스스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 죄가 하나님과 자신 사이를 나누었기 때문이다(2.1-3). 여인은 지금 자신 앞에 서서 물을 좀 달라고 요청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여인은 영적으로 죽은 자다. 영이 죽자 육이 펄펄 살아서 점점 더 완전히 하나님의 반대편으로 침몰해 가고 있다.

이렇듯 주님은 지금껏 수 없이 나를 찾아 오셔서 나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영적으로 죽어 있으면 때때로 주께서 나에게 찾아오시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주님은 언제나 이렇게 나에게 오시고 계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인은 아직도 동문서답(東問西答)이나 하며, 계속해서 똑똑한 척 하고 있다(11-12). 진리가 외쳐지고 있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인생이 바로 여인에게 비추어진 모습이다. 진리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엉뚱한 말대답이나 하는 이 세상의 겉 똑똑한 사람들의 모습은 언제나 이와 같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13) 사람들은 얼마나, 또 계속해서 일시(찰라)적인 것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가? 신기루를 따라 가는 발걸음이 아닌가? 그래서 좀 더 자극적인 것, 좀 더 , 그러다가 갈데까지 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진정한 만족이 있던가? 정신을 차려보면 다시 목마를 뿐이다. 열심히 달려왔으나 결국은 다시 목마르다.

그러므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만나야 하고, 그 물을 마셔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 ‘솟아나는 샘물이란 무엇인가? 계속해서 흘러 넘치는, 결코 그 물줄기를 막을 수 없는 생수의 근원이시라는 말씀이다. 주님만이 갈한 내 영혼의 샘을 만족하게 하신다.

   

 

부스러기 묵상

 

그런데 왜 사마리아 여인은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을까?

지금 자기 앞에 서서 말씀하시며, 가까이 오신 그리스도를 왜 알지 못했을까?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진리가 자신 앞에 서 있다고 해서 인간이 스스로의 힘과 노력에 의해 그것을 깨닫거나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아직 사울이었을 때를 기억한다.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이었다(22.3- ). 다른 말로 하면, 거듭나기 전이었다. 그때도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고 생각하던 때였다. 그때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고후5.16)던 때였다. 지금 여인이 그렇다. 그러니까 말대답이나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다.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이 이와같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아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이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누구나 이 여인처럼 잠시 갈한 목을 축이기에도 여전히 부족한 물을 찾아 나설 수 밖에 없다. 진실로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나도 이럴 수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6.26-27)

예수님과 여인 사이에 일대일 성경공부는 점점 깊어지고 있다. 예수님 없이도 성경의 진리를 이야기하는 사람, 야곱이라는 과거를 붙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 하루하루 필요한 물만 있어도 큰 불편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람, 사마리아와 이스라엘의 지역 감정에 빠져있는 사람, 그런 그녀가 주님을 만났다. 아니, 주님이 그 인생을 만나 주셨다. 그리고 진리를 가르치고, 영원을 이야기하고, 영생하도록 하는 생수를 이야기하는 자리로 나아가고 있다. 이것이 나에게도 필요한 우물가다. 과연 이 만남을 통해 어떤 기적이 일어질 것인가? 더 주목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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