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흥하여야 하리라!(요 3.16-30)

20220109b(묵상)

 

 

 

그는 흥하여야 하리라!

Jn. 3.16-30

 

    본문 관찰

 

    구원과 심판(16-21)

    세례 요한(22-30)

 

 

하나님의 사랑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영원할까? 초등학교 때 좋아하던 것 지금도 좋아하는가? 화병에 장식된 꽃은 얼마나 살 수 있을까? 꽃이 1~2주 정도 사는 것과 비교하여 인간은 60이요 강건하면 70을 사는 것이 다를 뿐, 그러니까 사는 기간이 짧고 길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결국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길이다(9.27a). 그 이후에는 심판, 그러니까 죽는 것은 매 일반이다. 인간 역시 젊음이라는 한 때를 활짝 핀 꽃처럼 살다가 그 수()가 다하면 고목처럼 쓰러지고 만다.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인간이 다시 살 길이 있다. 성경은 지금 이 문제를 오늘의 말씀묵상으로 제시한다.

   

 

구원과 심판(16-21)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생을 얻게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내가 나의 죄 때문에 영원한 심판을 받아 지옥에서 고통 당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16). 심판을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 말이다(17). 마침내 이 구원의 길이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천국에서부터 이 땅에까지 활짝 열렸다. 잘못 들어선 길은 다시 갈 수 있다. 잘못 잠근 단추는 다시 고쳐서 잠글 수 있다. 잠시 잊어버린 수학 공식은 다시 외우면 된다. 이것들은 모두 조금 늦거나 불편할 뿐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것은 언제나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이다. 믿지 않으면 영원한 심판과 정죄를 받기에 그렇다(18-19).

사람들은 계속해서 착각(오해)한다. 교회를 우습게 알고, 예수 믿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다 못해 무슨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나 믿는 것쯤으로 생각한다. 신나게 살다가 죽기 바로 전에 믿으면 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그런 사람들은 바로 그 날로 이다. 사실 자연사(自然死)보다는 자기가 죽는 줄도 모르고 죽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럴 경우를 위해 천국에 갈 수 있도록 해주는 영생 보험은 없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 외에는 다른 이름이나 길이 없다(14.6, 4.12).

참으로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셔서(16a),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딤전2.4)신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결과는 전혀 다른 두 길로 나누인다는 점이다. 주님은 인생이 궁극적으로 악을 행하는 자(염소)와 진리를 좇는 자()로 판결을 받을 것을 말씀한다(20-21).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에 남은 것은 인간이다.

 

    ▪믿는 자 | 영생, 구원, 진리를 좇는 자, , 선행

    ▪믿지 아니하는 자 | 멸망, 심판, 정죄, 악을 행하는 자, 어두움

 

초로인생(草露人生)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도록 화려하게 피어보겠다고 야단들이다. 사실 화병의 꽃처럼 잠시 화려하다가 지는 꽃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초등학교 때 반장하던 것보다 지금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다. 그래서 인생은 마라톤이라 그러지 않는가? 숨이 붙어있는 이 세상은 중요하다. 성공하고, 출세하고, 돈 많이 벌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자녀 낳고, 뭐 다 좋다. 그런데 그 다음 마지막이 결국 그러다가 죽었더라.’로 끝이면 얼마나 허무한가?

이러한 찰라(순간)적인 것들보다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멸망 받을 인류(인간)를 죄 가운데 그대로 끝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16절이 이 세상이라는 화폭에 그려진다. 이 세상과 저 영원한 세계를 연결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 큰 구원을 얻게 된다. 하나님과 세상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에서 만난다. 오늘 16-21절 말씀은 이 진리를 우리에게 증거한다.

 

 

세례 요한(22-30)

 

무대가 다시 바뀐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서로에게 나아오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장면이 소개된다(22-23). 이 때는 요한이 아직 옥에 갇혀 순교하기 이전이다(24). 사도 요한은 부록(附錄)처럼 세례 요한의 됨됨이를 아낌없이 소개한다. 요한의 영성이 향기나게 된 계기는 그의 제자가 던진 하나의 질문 때문이다: “(예수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6b) 쉽게 말하면, 요한은 하루 아침에 마이너 리그(minor league)로 추락한다. 아니, 자신이 스스로 그 자리를 포기하고 자연스럽게 무대에서 퇴장한다. 주역이 아니라 조연이라는 사실을 알고 믿는 것만큼 말이다(28).

예수님이 신랑이라면 자신은 그의 친구에 비유한다. 그리고 친구의 기쁨으로 충만하다고 말한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29) 그가 이처럼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위로부터의 섭리’(1.33-34)가 그에게 말씀으로 임하였기 때문이다(27).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28a)라고 말하면서 기쁨으로 물러나는 것 아닌가. 참으로 멋진 퇴임(退任)의 변이 아닐 수 없다.

   

 

부스러기 묵상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0)

  

세례 요한의 언행(言行)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향기가 묻어나는 고백이다.

그는 예수님의 뒤에 서는 것을 기뻐한다. 주님 때문에 기쁨이 충만하다고 고백한다(29). 자신으로부터 기쁨을 만들지 않고, 주님에게서 주어지는 기쁨을 따라 사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 그가 바로 세례 요한이다. 왜 이처럼 살 수 있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렇게 살도록 이끄는 것일까? 앞서 묵상했듯이 그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았던 사람이다. 그는 빛이 아니다. 단지 그 빛을 증거하는 사람이다. 그는 이러한 자기 정체성(identity)을 하시도 잊지 않고 살았다(1:6-8,19-36).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서- 조금만 어떤 힘이 주어지면 그것을 주장하고, 그걸 통해서 뭔가를 보여주고 싶어하고, 꼭 어떤 눈에 보이는 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우쭐거리다 못해 목에 힘이 들어가고, 목소리부터 달라지고, 태도가 이상해진다. 하지만 요한에게서는 이러한 조짐을 하나도 발견할 수 없다. 요한은 주님 앞에서는 언제나 작은 자로 살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해 했다. 자신이 설 자리를 알았고,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알았으며, 예비할 때를 알았고, 퇴장할 때를 알았다. 자기 아니면 않된다는 식의 객기(노욕)를 부리지도 않았다. 참으로 놀라운 인상은 그의 퇴장하는 장면과 퇴임의 변이다.

자신의 전부를 오직 예수님께 철저히 맞춘 사람, 그가 바로 세례 요한이다. 주님이 앞서면 그 뒤를 따랐고, 주님이 우()하면 함께 우()했고, 주님이 멈추면 함께 멈추었으며, 주님이 말씀하면 아멘으로 응답했고, 주님이 말씀하시면 오직 그것만을 말했다(1.33). 결코 자신의 생각, 경험, 지식, 관록, , 판단, 상식, 고집을 앞세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증거하거나 증거 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살았다. 그는 주님께 거치는 자로 살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복음, 그리고 목회에 거치는 돌처럼 살아가는가. 아예 그걸 사명으로 생각하며 사는 자들이 가장 불쌍한 영혼들이다. 하지만 성경이 인정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영적인 질서 속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좀 안다는 사람들, 좀 잘 믿는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 자기 아니면 않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성경의 사람들과 항상 갈등하며 살았다. 그리고 그들의 결말은 늘 어두움과 부정적 이미지로 마감하였다.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을 자기 열심으로 해 보려고, 또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 때문이다. 주님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아예 다, 기꺼이, 자원함으로, 그것도 기쁨으로 내놓는 사람이 요한이다.

그는 예수님 곁에 사는 사람(성도)의 한 모델이다. 주님과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흥하려면 자신의 쇠함을 기뻐하며, 용납하며, 역류하지 않아야 한다. 그는 순교의 제물이 되었으나 그의 언행(言行)은 요한복음을 통해 우리의 가슴에 다시금 새롭게 부활한다. 요한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단지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가 되지 않도록 살아보자. 그래야 우리도 요한처럼 아주 멋지게 퇴임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어쩌면 그처럼 퇴장을 준비하는 때로 주어진 기회의 시간이 지금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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