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요 3.16)

20220109a(양무리교회)

 

 

 

예수 그리스도

Jn.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으니

      이는 그(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심히 좋았더라.”(1.3,31) 그래서 문화명령까지 하신다(1.28). 여기에는 하나님의 기대, 마음, 소망, 비전, 계획 등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 가지고 계신 놀라운 섭리가 들어있다. 만드신 분이 지금 그렇다고 표현하신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면 설명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사랑이라!: 그런데 세상은 자신을 창조한 조물주 하나님을 버렸다. 반역이고 폐역이다. ‘타락이다.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함으로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세상을 사랑하신다. 인간 때문에 하나님은 달라지지 않으신 것이다. 왜냐? 그는 사랑이시니까. 그가 누구를 사랑하는가? 바로 나를!

-‘하나님이 김충만을 이처럼 사랑하사

-생각해 보라,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가슴 뛰는 일이고,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귀중한 일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이 금하신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이 아닌 원치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간을 찾아오시며 변함없이 말씀하신다: “얘야,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 사랑은 태초에 에덴동산에서부터, 범죄하고 타락한 인류 아담에게도 금지되지 않았다. 그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명령을 어기고 죄를 범한 아담을 사랑으로 찾아 가신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3.9)

 

하나님의 사랑은 파괴하고 위기에 빠뜨린 인간(인류)을 사랑하사 바로 아들을 보내신다. 사랑은 분노, 진노, 심판, 죽음 등 다른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죄가 하나님의 계획을 변경시키거나 주도하는 것이 된다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끌려 다니시는 분이 된다. 인간이 하나님을 조정하고 조작하게 된다고? 그럴 수는 없다. 이는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과도 맞지 않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은 나는 너를 사랑해를 말로만 하지 않으셨다. 말은 누가 못하나? 말로는 뭘 못하나? 말로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보다 더 잘 말하는 사람이 세상에 가득하다. 세상에, ‘I am God!’라고 뻔뻔스럽게 말하는 자들이 어디 한 둘인가.

 

하나님은 독생자, 그러니까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주셨다. 이렇듯 사랑은 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전부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메시야)를 주셨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있을까?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인간이 죄로 말마임아 타락하여 심판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변함없이 계속 사랑하시겠다는 선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메시야)는 하나님의 사랑의 사인(sign)이자 약속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으니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하나님은 당신의 가장 소중한 아들을 주셨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16.21).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셨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26.39)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인간은 죄를 심었지만 하나님은 생명을 꽃피우신다. 길이 열렸다. 하나님 쪽에서다. 그래서 은혜다. 인간이 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는 문, 오직 유일한 문을 다름 아닌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여실 것을 말씀하신다. 놀랍다. 어떤 행위도, 선행도, 노력도, 애씀도 아닌 바로 믿음이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기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4.5-9)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다. 기독교는 예수를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 머물거나 만족하지 않는다.

 

(1) 멸망하지 않고

 

    *창조 타락 심판(죽음)

    *창조 타락 구원(영생)

 

하나님은 세상이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신다. 죄 없는 인간이 죄를 범할 수 있다면, 죄인이 죄를 범하는 것이야 자동(automatic)이지 않겠는가. 이렇듯 죄로 넘어가, 바로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된 게 인간이다. 그 인간은 살 길이 없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의 힘이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건 전무(全無)하다.

 

하나님은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어서 나를 멸망으로부터 건져내어 살리시는 분이시다.

 

(2)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단지 이 세상을 살아가는 60년이나 80년이라는 시간만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삶을 살도록 하신다.

  

 

최고의 선물,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구원하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선물은 값으로 계산하지 않는다. 선물은 그래서 그냥 감사함으로 받는다. 그런데 만약 지갑을 꺼내서 그거 얼마냐, 내가 값을 낼께!’라고 한다면 선물을 주는 자의 마음과, 정성과, 사랑과, 그 사람을 모욕하는 행동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으로 하지 않으시고 반대로 자주로, 심판을 선물로, 영원한 형벌을 주시는 것으로 하셨어도 인류는 할 말이 없다. 그게 마땅히 받아야 할 죄의 값이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받으면 된다. 이것이 선물을 받는 자의 가장 아름다운 자세요 태도다.

   

 

[찬양] 죄인들을 위하여

죄인들을 위하여 주님 찾아오셨네 주 안에 생명이 있네

죄인들을 위하여 주님 찾아왔으나 사람들 영접 안 했네

예수 안에 생명 있네 주님이 빛이 되시네

예수 안에 생명 있네 주님이 빛이 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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