랍비를 그리스도라 증거한다(요 1.32-42).

20220104(묵상)

 

 

 

랍비를 그리스도라 증거한다.

Jn. 1.32-42

 

    본문 관찰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32-36)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37-42)

   

 

와서 보라!

 

요한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 ‘증거하러 온 자’(6-8)로서 일한다(32).

요한의 증거는 계속 이어진다(15-18, 19-28, 29-31, 32-34, 35-36). 짧은 듯한 증거(설교) 안에 삼위일체(신론, 기독론, 성령론) 교리가 다 들어 있을 정도다. 요한의 증거는 곧바로 예수를 좇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했으며, 한 가족에게 복음이 증거됨으로서 메시야 고백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이전에 이미 고백되어지는 놀라운 영적 추수가 시작된다. 여기에 주님이 하신 말씀은 와서 보라’(39)장차 하리라’(42) 정도로 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역사는 이미 불꽃이 되어 타오르고 있다.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32-36).

 

요한은 내가 보매”(32)라는 말로 증거하기 시작한다. 본 사람은 증거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일은 요한이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31a,33a) 이미 시작된 일이다. 중요한 것은 요한이 시작한 일이 아니다. 또한 뭘 보여 달라고 해서 된 일이 아니다. 요한과 무관하게, 요한과 의논됨 없이, 요한이 알지 못하고 있을 때에, 무엇을 말인가. 32절이 예수님께 이루어진 걸 말이다. 요한은 자신도 모르는 일이 자신 앞에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

사람들은 종종 여기서 착각하고, 또 넘어진다. 뭘 본 것은 자신이 잘나고, 똑똑하고, 그럴 만 한 자격이 있고, 기도를 많이 했고, 전혀 의심하지 않고 확신했고, 봉사와 헌신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것에 따른 반대급부(反對給付)와 같은 결과로써 이런 일이 자기에게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그것만큼 교만해진다. 그래서 신앙의 많은 덕목(목록)들이 이것을 얻고, 보고, 누리고, 휘두르는 것을 위해 종교적인 모양새를 띄게 된다. 이것은 맛이 가도 완전히 간 경우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신앙을 곡해한 영적 무지의 소산이다.

요한은 알지 못한 일을 어떻게 듣고, 알고,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34)고 말하는가? 참으로 무릎을 칠 만 한 기막힌 그의 고백을 만난다: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33a) 그는 자신의 증거의 근거를 오직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신 것에서 찾는다. 그는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자, 그러자 뭐라도 된 양 기고만장(氣高萬丈)해 하거나, 깝죽거리거나, 건방지고 방자하게 처신하거나, 그 시대의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 유독 자신에게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교묘하게 자기 쪽에 유리한 수단으로 변형 혹은 사유화하거나, 앞서 말한대로 자신이 뭔가를 했기에 -예를 들면, 광야에서 경건한 영성생활을 추구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그 결과로서 하나님도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통로로서 쓰이는 것에 진심으로 최선을 다 한다.

하나님은 요한에게 말씀하셨다: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33b)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것에 대한 계시를 맛본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이 말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리는 복음의 메시지다. 하나님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해서 예수님을 보고 또 이렇게 말한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36)

 

다시 반복하지만 이 진리는 요한이 스스로, 생득적으로, 학습과 교육을 통해서, 오랜 광야의 수련과 고행을 통해서, 소위 득도(得道)의 경지에 들어감으로써 깨우친 사설(私說) 진리가 아니다. 진리(Logos)는 위로부터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는 오직 이 말씀의 통로로 쓰이고 있을 뿐이다. 요한은 이러한 영적 원리를 따라 언행심사(言行心事)에 한치의 오차 없이 자신의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한 사람의 영적 성숙은 그에게 덧붙여진 은혜가 주어질 때 그것을 어떻게, 무엇으로 핸들하느냐를 보면 대략은 알 수 있다. 요한은 우리가 구비해야 할 사역의 몫들을 아주 균형잡힌 모습으로 감당하고 있음을 본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역의 맨토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37-42).

 

두 제자’(37a)는 안드레와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는 첫 제자가 된다. 이들은 예수님을 랍비(선생)로 알고 시작하지만 곧바로 예수님이 메시야(그리스도)라는 진리를 고백하는 신앙의 사람들로 바뀐다. “그날 함께 거하니”(39b)에서 시몬을 찾아 말하되”(41a) 사이 어간에 주어진 주님과의 만남은 이들을 예수의 사람들로 만든 것이다. 누가? 우리 주님께서다.

복음이 전해지는 순서도가 흥미를 끈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은 한 사람 세례 요한을 바꾸어 놓았다. 그 요한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는 순서는 이렇다: 세례 요한 → ②사도 요한/안드레 → ③베드로. 정리하면 세례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도 요한과 안드레는 세례 요한에게서, 베드로는 사도 요한과 안드레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듣게 된다. 하지만 에게서 전도를 받았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메시야를 만났다.”(41)는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은 이처럼 언제나 불완전하고 부족한, 시작만 한 초보자인 우리를 이처럼 이끄시는 분이시다. 이점은 역시 마찬가지다. 그도 를 통해서 전도를 받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입문(入門)이었다. 이게 장차 하리라.”(42b)는 예수님의 계획하심 아닌가.

   

 

부스러기 묵상

 

내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음이 얼마나 복된 사건인지 모른다.

요한마저도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33a)로 시작하여 순교하는 축복까지 받게 된 것 아닌가. 성경의 모든 사람들이 다 바닥에서 시작하고 있음이 위로가 되고, 또 기대가 된다. 나 역시 허물과 죄로 죽은, 본질상 진노하심 아래”(2.1-3) 있는 절망과 저주의 존재로부터 그리스도의 구속, 곧 죄사함이라는 값없는 은혜를 통해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아, 마침내 새로운 피조물’(고후5.17)로 여기까지 와 있다. 내가 잘나고, 뭔가 하나님께 했기 때문에 그 공로로 지금이라는 은혜에 붙들려 있는 게 아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찬송가 2883)

나는 믿는다. 베드로처럼 장차하나님께서 나에게도, 나를 통해서도 계획하신 놀라운 일이 있음을 말이다. 이걸 생각하면 얼마나 힘이 되고 가슴이 뛰는지 모른다. 나에게도 베르도처럼 장차라는 미래가 있다니 말이다. 주님께는 미래로 가는 길이 있다. 주님 앞에 나아오면 주께서는 언제나 복음과 상관없었던 지난 과거와 완전히 단절되는 소망과 구원과 영생의 미래로 이끄신다. 할렐루야다! 어찌보면 베드로가 한 일이란 그저 동생의 전도를 받아 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온 것뿐이다. 그렇지만 은혜는 여기서 시작되고 있다. 사람은 자꾸 자신이 나왔기 때문에를 생각하지만, 그래서 내가 시작했고 뭔가를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무엇이 주어졌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은혜를 받고 보면 아니다. 주께서 은혜를 주시고, ‘장차까지 내다보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하심 안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시간표라는 것을 말이다.

다시 나를 생각해 봐도 여지없이 그렇다. 내가 나의 장차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이게 절망이거나 불안함이 전혀 아닌 이유는 이 장차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있는 섭리요, 축복의 사인(sign)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 때문이다. 나는 나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 내 믿음과 신뢰의 대상은 오직 주님이시다. 그것만큼 장차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하나님의 작품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 그것을 알고 확신하는 것만큼이 내가 다시 주님께 돌려드려야 할 내 몫의 달란트라는 것, 때문에 맡은 자로서 주님께 구해야 할 것은 충성이라는 것, 나는 이 진리를 믿는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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