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은 증거하는 자로 숨는다(요 1.19-31).

20220103(묵상)

 

 

 

요한은 증거하는 자로 숨는다.

Jn. 1.19-31

 

    본문 관찰

 

    나는 아니다(19-28)

    이 사람이다(29-31)

   

 

하나님의 어린양

 

    “요한의 증언이가 이러하니라.”(19a)

 

요한의 설교(15-18)는 곧바로 큰 반향을 낳았다.

설교를 듣고 난 이후의 청중의 반응은 어느 때나 크게 두 가지다(1.37, 7.54). 유감스럽게도 요한의 청중은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것과는 반대로 들었다. 메시야의 탄생에 대한 선포된 말씀을 들은 헤롯도 그러했다(2.7-8,13). 그런 순수하지 못한 청중을 놓고 다시 입을 연 요한을 주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튿날’(29a)에도 마찬가지다. 요한의 메시지는 전혀 변형되지 않는다.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궤도 수정(타협)은 아예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무엇이 요한으로 하여금 이처럼 설교하도록 이끄는가?

   

 

요한의 증거(19-28): 참 빛의 증언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19a) 보내어서 요한의 설교를 진위를 가려보겠다고 나선다. 저희는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들이다(24). 저들은 요한의 설교를 더 이상 듣지 않는다. 그럼에도 뭘 말하는 지 궁금해 한다. 깨우치고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잡고 요한을 흔들기 위함이다. 참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본문이다. 요한은 자신을 숨기지 않고, 자신을 그대로 드러낸다(20a). 자신 뿐 아니라 자신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오신 메시야에 대한 계시를 밝히 드러낸다.

 

    Q 네가 누구냐?

    A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Q 네가 엘리야냐?

    A 나는 아니라.

    Q 네가 그 선지자냐?

    A 나는 아니라.

    Q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A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Q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A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요한은 이다아니다를 정확하게 구분한다. 오늘 묵상의 핵심은 이것이다. 요한은 이 진리를 어떻게 알았을까? 먼저, 가족에게서 찾아보자.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27.56, 15.40, 19.25)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자매간다. 예수님과 요한은 사촌간이다. 그렇다면 요한이 태어날 때 일어났던 하나님의 간섭하심은 훗날 성경의 기록대로 살다가 죽은 요한의 생애에 직접적인 요인이었음에 틀림없다(1). 그러니까 요한이 이것을 모르고 자랐을 리 없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요한은 이 진리를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소리로라.”(23, 40.3) 그는 자신의 근거를 말씀에서 찾는다. 광야생활을 통해서 스스로 뭔가를 터득한, 그러니까 위로부터 임한 계시와 상관없이 땅으로부터 얻어진 어떤 파편들을 조합하여 그럴듯한 무슨 설()을 늘어놓고 있지 않다. 자신은 소리에 불과하고 예수님은 그 소리의 실체. 이처럼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안다. 그것만큼 딴소리하지 않는다. 그는 아는 진리를 말하고 있는데 반해,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결코 알지 못하는 한 사람’(26b)이 자신들 가운데 서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이러쿵저러쿵 하고 있다. 이 묘한 대조가 숨죽인 모습으로 본문에 들어 있다.

요한은 이 진리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당하게 저들에게 증거한다: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27a) 하늘을 맛본 사람은 이렇게 산다. 그는 고독한 광야에서 메시야가 공생애를 시작하기까지 묵묵히 소리로서만 자신을 준비하고, 마침내 외치는 자의 소리로 증거하는 사명에 기꺼이 온 몸을 다 드린다. 그는 자신의 영성의 초점을 결코 혼돈하며 이리저리 흔들지 않는다. 분명하게 렌즈(lens)의 앵글을 맞춘다. 그것만큼 선포할 수 있고, 당당할 수 있다.

 

 

요한의 고백(29-31): 빛나는 조연

 

마침내 예수께서 요한에게 나아오셨다(29a). 요한은 그 주님을 보았다. 그럼에도 그의 외치는 소리(설교)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 사실 복음서가 증언하는 이 시기의 분위기는 어떻게 하면 요한의 언행(言行)을 책잡아 그를 죽일 꼬였다. 거룩한 메시야의 행진에 앞서 세례요한 서곡’(序曲)의 나팔이 울려 퍼지는 길목에 벌써 바리새인들이 출몰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지 않은가(19,24). 그럼에도 요한은 담대하게 선포한다. 지난 번에 했던 설교는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라며 다시 반복(30)하면서까지 말이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29)

 

요한은 자신을 넘어서(20a), 이제 예수님을 세상에 밝히 드러낸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6)으로서,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8)로서, 그러니까 빛이 아니요 그 빛을 증거하는 자로서, 자신의 전부를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15b,30b)의 뒤에, 결국 자신이 주는 물세례까지도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31) 말한다. 참으로 놀랍다. 자신을 정확하게 알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정확하지 않으면 결코 이럴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인식이다. 이 말씀을 통해 요한에게서 배우는 진리이다.

 

 

부스러기 묵상

 

설교란 무엇인가?”라는 지극히 원론적인 질문을 묵상을 통해 받는다.

요한은 지금 자신의 생명을 건 설교를 하고 있다. 그는 짧지만 굵게 살았다. 여름을 노래하는 매미는 약 1~2주를 위해 7년인가를 땅 속에서 보낸다. 요한이 그랬다. 요한은 주님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외치는 소리로 살았다. 그는 이 설교 하나 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로 서기 위한 준비를 긴 세월 동안 한 셈이다. 때문에 요한 같은 소중한 사람은, 스데반 같은 능력의 사람은 더 오래 살아서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만 순교하고 만다. 어쩌면 이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더 오래 살고, 세상의 눈높이에 적당히 안주하고, 하늘의 소리를 좀 줄이고, 사람들의 귀에 즐거운 소리는 좀 볼륨을 높이고, 뭐 그러면서 적당히 간지러운 곳이나 긁어주며 살아도 얼마든지 유명하게, 박수 받으며, 칭찬과 존경을 받으며 살 수 있겠지.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는데 나는 이런 싹이 아직도 묘연하게만 하다. 처음 목회자로 사역을 시작한 1986년만 해도 설교만큼 쉬운 게 없었다. 그런데 한 해 한 해 시간이 지날수록 설교만큼 어렵고 두려운 일이 없다. 강단에만 서면 두렵고 떨린다. 자신 없어서가 아니다. 잘 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반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나의 완악함과 교만이라는 죄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밀려올 때 더 그렇다.

설교가 뭘 할 수 있을까? 단순화시킨 감은 없지 않지만 요한이나 스데반은 결국 설교 때문에 죽은 거 아닌가. 누구 하나 변화시키지 못하고 그냥 증거만 하고 끝났다. 사실 설교 하면, 항상 5천명이 회개하고, 고넬료의 온 가정에 성령이 임한 베드로의 설교가 훨씬 더 정서적으로 친숙했었다. 그러나 요한의 설교도 하나님이 쓰셨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언제나 요한처럼 설교하다가 죽는 날을 맞이할까? 하나님이 과연 이 특권을 나에게도 허락하실까? 언제쯤이면 나에게도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15b,30b)라며 하늘의 비밀을 외치는 복음의 소리가 날까? 요한의 외침 앞에 나는 무릎을 꿇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에게도 하나님을 외치는 소리가 나는 그 날을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하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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