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만을 소개합니다(요 1.6-18).

20220102(묵상)

 

 

 

예수님만을 소개합니다.

Jn. 1.6-18

 

    본문 관찰

 

    사도 요한이 소개한 세례 요한(6-8)

    사도 요한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9-14)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15-18)

   

 

그는 누구?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소개한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한다고 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정체(identity)를 바로 아는 것이다. 이것 없이 어떤 일을 시작하기 때문에 좌충우돌(左衝右突)이 일어난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세례 요한(6-8)

 

요한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광야에서 고행(苦行)하다가 스스로 자가 발전’(터득)한 것도 아니다. 이방 종교들처럼 어떤 자의식이 생겼거나, 득도(得道)의 경지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된 그런 것도 아니다.

 

(1)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았다(6).

 

요한의 일생이 의미(가치)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고 믿는 것만큼 흔들리지 않는다. 한 사람의 신앙과 그의 사명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의 시작이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것 없이 자신에게서 시작된 계획(확신)을 하나님의 것에 감정이입(感情移入)할 때부터 문제는 꼬인다. 이 경우에 신앙의 중심이 ’(ego)이기 때문에 나의 형편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거나 변한다.

그러니까 늘 생각이 흔들린다. 마치 신기루와 같다. 그것을 좇아갈 때에는 이룰 수 있어 보이고 아름다운데 막상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좌절(자학, 침체, 낙심)한다. 쉽게 결정하고, 그것만큼 쉽게 포기한다. 이처럼 나의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는 나로부터 시작하면 늘 그렇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나를 향하여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심이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무대에 등장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요한과 함께 하신 것이다. 이 말은 요한이 하나님과 함께 한 것이란 말과 구별된다.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그 주도권을 잡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늘 이렇게 일하신다. 다윗의 일생이 그러했다. 그가 젊고, 유능하고, 지략과 용맹이 있고, 군사와 다윗성이라는 요새가 있고, 많은 무기와 말들이 있고, 목숨 바쳐 일하는 무수한 신하들이 있어서, 그래서 다윗의 일생이 형통한 것이라고 성경은 결코 말하지 않는다. 다윗, 그는 누구인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삼하5.10, 8.6b,14b)

 

(2)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다(7-8).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분명하게 알았다. 그는 누군가를 증거하는 사람일뿐이지, 즉 그리스도는 아니다. 이것이 요한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요한을 특별히 붙잡으신 것이다. 나 역시 영적 혼돈(Chaos)이라는 자충수에 걸려들지 않으려면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놀라운 계획이 무엇인가를 위로부터 받아야 한다. 그것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증거하는 이 일만 하면 된다. 이것은 다른 것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영적 이기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것은 그것만큼 내가 모든 일을 다 해야 한다.”, 그래서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는, 만약 그렇지 않으면 영적 자존감을 맛보지 못하는 그런 덜 성숙한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만큼, 동시에 무엇이 아닌지도 아는 사람이다: “나는 이 빛이 아니요.”(8a, 20) 은혜의 삶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동시에 언제나 피조물인 죄인이라는 점을 망각하는 거기에서부터 영적 균형이 심각하게 일그러진다. 내가 혹시 세례 요한처럼 쓰임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빛이 아니다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않아야 한다. 영적 교만은 교만해야지!’라고 다짐해서 오는 게 아니다.

언젠가 읽었던 책을 읽다가 적어 놓았던 글이다: “형제여, 자매여! 이것은 내가 받아야 할 것이 아니다. 나는 아니다. 내가 조금 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조금 더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다면 당신은 나보다 더 귀한 일을 하나님께 드렸을 것이다.” 비슷한 고백이 성전 미문(美文)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걷게 되는 기적 이후에 베드로의 말에도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3.12)

   

 

예수 그리스도(9-18)

 

사도 요한은 자신은 십자가 뒤에 감추고서 곧바로 그리스도만을 증거한다. 요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일에 자신의 전부를 집중한다. 그러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깊은 샘 하나만을 팠다. 나 역시 오직 주님만을 알기를 원한다. 요한이 아는 그리스도, 그는 누구신가?

 

    세상에 오신 참 빛이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이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다.

    그를 맞이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 이름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성막, 회막)으로 사셨다.

 

참으로 놀라는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점이다. 그런데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10b), 자기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11b). 그럼에도 그를 맞아들여 믿는 사람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욕망에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12-13). 마침내 주님은 자신을 살아있는 성전으로 자기 땅에 오사 참 빛을 비추기 시작하셨다.

요한은 아버지께서 주신 독생자의 영광,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 영광을 보았다(14b). 9-13절의 참 빛이 그의 영혼에 비춰지자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15a)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은혜를 받았으며, 그 비결이 무엇인가를 선전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처럼 자기 깃발 아래 청중을 모으지도 않는다. 자신을 철저하게, 끝까지 그리스도 뒤에 숨긴다(21.20,24). 오직 그 이름예수 그리스도만이 요한의 전부다.

 

    내가 내 뒤에 오시는 분을 나보다 앞선 분이라고 말씀드린 바로 그분입니다.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다.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한 데서 은혜 위에 은혜를 받았다.

    율법은 모세에게서 받았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아버지의 품 속에 계시는 독생자이신 하나님이 그분을 나타내 보이셨다.

   

 

부스러기 묵상

 

나도 요한처럼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 수 있을까?

말하자면 오직 예수님이라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나는 봄부터 소쩍새로 울다가 끝날지라도 그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사람들은 모두 주님을 위해 울다가 쓰러져 간 순교자 세례 요한의 높은 신앙과 불굴의 영성을 동경하며 우러러 본다. 그러나 정작 아무도 요한처럼 살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조금 잘 보여서 내가 얻고 싶은 것을 하나님의 손(천국 구좌)에서 내 손(비밀 구좌)으로 옮겨볼 수 있을까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있는지도 모른다. 주님의 영광을 위한답시고 벌려 놓은 여러 일들의 중심을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은 내가 땅에서 잘되고, 형통하게 되는 것을 위해 겉으로 거룩하게 포장해 놓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철저한 나그네 신앙을 묵상한다. 나는 영원한 본향(本鄕)을 사모하는 순례자다. 저 땅(영생)을 위해 이 땅(이생)을 잠시 거꾸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요한처럼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가는 사람이 그리운 시대다. 요한처럼 살고 싶다. 적당하게 타협하고, 잘못 가고 있는 게 뻔함에도 비유나 맞추어가며 적당하게 삯꾼으로 살 바에는 차라리 지금이라도 세례 요한처럼 죽는 게 바른 선택이다. 이 죄 많은 세상은 요한처럼 사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제사장의 신행(信行, 2.14-26)에 선지자의 영성을 가지고 소명자로 살다가 주님께 서고 싶다.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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