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양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요 19.17-27).

20220415(묵상)

  

 

 

어린양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Jn. 19.17-27

  

    본문 관찰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나의 쓸 것을 썼다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다르게, 그리고 바르게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18)

 

주님이 가운데 있고 다른 두 사람이 좌우편에 못 박혀있다(18).

이 그림은 사람들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주는 것 같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주님을 중심으로 한쪽(17-24)과 다른 한쪽(25-27)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구도는 요한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예수행전의 스케치를 해 온 지금까지의 밑그림과 절묘하게 일치한다. 나는 지금 어느 편 사람으로 내 인생의 보고서가 기록되고 있는지 고난을 기록하는 말씀 앞에 서 있다.

 

 

하루살이 인생들(17-24)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17a)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18a)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19)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21a)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23a)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24a)

 

유대인들, 빌라도, 대제사장들, 군병들 모두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물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좌우편의 다른 두 사람’(18) 가운데 한쪽 사람처럼, 이들 가운데도 인생의 마지막 때나 그 이전에 회개하고 주님과 함께 천국에 있게 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23.40-43). 지금은 구원의 날이요(고후6.2), 신랑을 기다리는 때이기에 아직 혼인잔치의 문이 닫히지 않았고(25.1-13),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들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얻을 때이기에(2.37-38) 말이다.

하지만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25.31-33)는 말씀이 성취될 때에는 다른 길은 결단코 없다. 하루살이가 내일이 있음을 전혀 알지 못하듯이 죄 가운데 있는 인생이 그러하다. 이렇듯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루살이 인생들이다.

오늘 이들의 환호와 즐김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뭔가 분주하게들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그것은 생명 없는 거대한 허상(虛想)이다. 이들은 최후의 날에 이렇듯 자신의 삶이 자기를 고발해 올 때 얼마나 기겁을 하고 놀라 자빠질까. 하지만 돌이킬 수 있는 기회의 때는 더 이상 없다. 지금 저들은 이걸 모르고 있다. 그것만큼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들이다.

세상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성취할 때 그것을 성공이라 부른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성공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세상방정식에 대입할 때는 성공이라는 정답을 품은 사람들일지는 몰라도, 인생의 진정한 해답이 주어지는 하늘로부터 오는 모범답안에 의하면 이들은 결코 성공자가 아니다. 가장 불행한 삶을 행복이라는 썩은 포장지에 담아 들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일 뿐이다. 제비뽑기마저도 주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지만(22.18), 하지만 이들은 이것을 알 턱이 없이 그냥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찰나적인 것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24). 이게 하루살이 인생들의 소망 없음이다.

 

 

부스러기 묵상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마리아가 섰는지라.”(25)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26a)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27b)

 

세상과 다르게, 그러나 바르게 사는 사람이 있다(25-27).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26a)인 사도 요한만은 다른 제자들과 다르게 십자가 곁에 서 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와 다른 세 여인이 거기에 더 있었다(25). 모두가 다 장차 보리라’(1.42,50-51)의 영광을 감추고 있는 이 때에 유독 제자 요한과, 여인 네 사람만이 십자가 곁에서 주님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다. 3-4년의 제자훈련을 수료할 제자들은 -수료식은 21장에서, 활동은 사도행전에서다.- 지금 이 시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이때에, 주님으로부터 약간의 부스러기들만을 받아 먹었던 여인들이 십자가 상의 그림에 희미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예상은 언제나 빗나가는 경향이 있다. 분명히 끝까지 주님 곁에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사람은 없고, 뜻 밖의 사람들이 십자가 곁에 있음을 볼 때 그렇다. 목회를 하다 보면 이런 경우는 참 많다. 교회가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먼저 된 자들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들이 먼저 되는 그런 역전을 체험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언젠가 어떤 분이 천국에 가면 두 가지를 놀란다고 했는데 하나는, 분명히 천국에서 만날 줄 알았는데 보이는 않는 사람 때문에 놀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저 사람은 분명히 지옥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천국에서 만날 때 놀라게 된다고 한다.

십자가에 못박혀 가장 처절한 고통 가운데 계심에도 주님의 시선이 가는 곳이 있다. 주님은 26절의 무리가 서 있는 것을 보시고어머니 마리아에게 말씀하신다: “여자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26b, 표준새번역) 인성(人性)을 가지신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요한에게는 ,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27a, 표준새번역)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요한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마지막이 좋은 사람들이 아름답다. 정승이 죽으면 하객이 없어도 정승의 개가 죽으면 조문객이 많다는 뭐 비슷한 말이 생각난다. 요한은 변함없는 헌신이 무엇인가까지를 보여준다. 어떻게 사는 것이 세상(17-24)과 다르게, 그러나 바르게 사는 것인가를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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