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절 어린양이 십자가로 향하신다(요 19.1-16).

20220414b(묵상)

  

 

 

유월절 어린양이 십자가로 향하신다.

Jn. 19.1-16

  

    본문 관찰

 

    보라 이 사람이로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유월절의 예비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11)

 

예수님을 사이에 놓고 빌라도와 유대인들이 벌이는 신경전이 점차 고조된다.

어떻게 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이처럼 언행할 수 있는지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모두가 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서 메시야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것을 볼 때 저들 영혼이 불쌍할 뿐이다. 역시 우리 시대에도 주님과 복음을 이처럼 값싸게 취급하는 빌라도와 유대인들의 후예들이 아른거린다. 이들의 죄행(罪行)을 읽고 묵상하는 것만으로도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다. 왜들 이러면서 사는지, 불나방처럼 불 속으로 돌진해 가는 무지한 인생들의 죽음을 향한 몸부림이 고난 당하시는 주님을 보는 아픔만큼이나 내 마음을 때린다.

 

 

빌라도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18.38b)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4b)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6b)

 

채찍’(1) 끝에는 쇠붙이가 달려 있어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이 뒤따른다. 면류관과 자색 옷(2,5)을 상징하는 것들인데 군병들은 지금 이런 언행으로 주님을 조롱하고 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3) 이런 모욕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신다. 이것이 주님을 넘겨준 자의 죄’(11b). 그리고 첫 번 무죄선언(18.38)에 이어 계속되는 무죄선언(4b,6b)을 하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것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6b)며 주님을 저들의 요구대로 내어준다. 이게 빌라도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인 야망이 예수님 때문에 방해되지 않기를 원했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27.24a)

그는 하나님의 아들’(7b)이라는 유대인들의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한다(8). 그는 지금 예수님에 관한 질문과 약간의 호기를 부리는 그 사이에서(9-10) 유대 총독임에도 불구하고 두려워 떨고 있다. 더욱 있다는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서(11)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힘쓴다(12a). 하지만 이것 역시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호신용(護身用)에 불과하다. 불과 몇 년의 이 땅의 영광을 위해 영원한 저 땅의 영광을 포기한다. 불쌍한 영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사도신경의 한 구절로 등장한다: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16)

이러한 일련의 언행들은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11a)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말은 죄를 짖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셨거나 조장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죄행으로 가는 길을 하나님이 막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죄는 사람이 짖고 책임은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어리석을 뿐이다. 주님은 빌라도의 죄를 분명히 밝히셨다: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11b)

 

 

유대인들

 

    “빌라도가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27.24-25)

 

빌라도가 수동적인 반면에 유대인들은 능동적이다. 저주를 받을지라도 이 일은 행하고야 만다는 결의가 대단하다(27.24-25). 유대인들의 교활하고 비열한 죄성이 씁쓸하다. 자기 나라를 점령한 가이사까지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끌어드린다(12,15b):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15b)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진짜 왕은 거부하고 가짜 왕을 추앙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서 참 빛이신 주님을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15a)라고 소리친다. 사람이 이렇게도 돌변할 수 있을까(12.12-13 12,15).

이들은 지난 3-4년여 동안 예수님의 말씀행전을 친히 목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험한 무리들이다. 주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요한이 소개해 주었듯이 주님의 행적을 통해 믿는 자들도 많았다(2.23, 7.31, 8.30). 그런데 어찌 된 일이 백성이 다’(27.25) 진리 반대편으로 줄을 서 버리고 만다. 사람들의 마음이란 이처럼 간사하다. 요한의 첨언(添言)이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2.24)

 

 

부스러기 묵상

 

빌라도와 그 아류들의 입장에서 이런 괴변을 늘어놓을 수 있다.

어차피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빌라도나 가룟 유다와 같은 배역도 필요하고, 구레네 시몬(23.26)이나 베드로(18.17,25-27)의 역할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면 빌라도와 유다 역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였지 않느냐는 뭐 이런 말들 말이다. 일면 대답이 좀 궁해지는 것 같고, 또 딱히 뭐라 뒤집을 만 한 근거도 얼른 생각나지 않는다. 사실 종종 이런 질문들을 만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가나안 족속들과 이방 나라들이 뭐 의로워서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가 된 것이 아니다. 사람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범한다. 빌라도나 가룟 유다는 죄인으로서 섭리의 한 부분을 맡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들 역시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의 또 다른 한 축을 담당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저들의 죄를 탕감해주는 면죄부는 될 수 없다. 죄에다 죄를 더한 것일 뿐이다. 우리 시대 역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이 다 그러하다. 저들의 언행은 주의 심판을 좀 더 분명하게 보장받는 것일 뿐이다.

 

    “그 때에 각 사람아 행한 대로 갚으리라.”(16.27b)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2.23b)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20.13b)

 

이러한 죄행록으로 가득한 19장의 언덕에도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는 기막히게 연출된다: “이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6시라.”(14a) 유월절은 무엇인가? 출애굽기 12장에서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기 전() 애굽의 장자들은 다 죽었지만 이스라엘은 무사하게 하시는 사건을 위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지키도록 하셨다. 지금 기록자 사도 요한은 이 유월절이 시작되는 낮 12시의 시간을 알린다. 이때부터 어린양을 잡아 유월절을 지키는 의식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세례 요한은 이미 이 사실을 장차 보리라’(1.42,50-51)의 앵글에 담았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1.29) 주님은 유월절 어린양이시다(고전5.7). 주님은 이처럼 영적 황무지에서도 구원의 장미꽃을 찬란하게 빛나도록 피우신다. 감히 누가 하나님이 하시는 섭리의 거룩한 행진을 가로막거나 중단시킬 수 있으랴. 주님을 거역하는 것 같고, 사람들에 의해 죽임 당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사(救贖史)를 도도하게 진행해 가신다. 사람들에게서 실망했지만 주님이 하시는 일을 묵상하면서 십자가의 고난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면서 고난에 동참하는 하루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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