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보라!(눅 23.26-43)

20210402(묵상)

 

 

 

십자가를 보라!

Luke. 23.26-43

 

    본문 관찰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8)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34)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3)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6)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오르시는 예수님은 사방으로 욱여쌈을 받으신다. 예수를 끌고 가는 그들(26),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구레네 시몬(26), 십자가를 뒤따르는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27), 역시 십자가를 지고 가는 다른 두 행악자들(32,39-42), 주님의 옷을 나눠 제비뽑는 자들(34, 22.18, 53.12), 구경하는 백성들(35), 비웃는 관리들(35), 희롱하는 군병들(36-37)이 그들이다.

이렇게도 다를 수 있을까. 오늘 이 장면을 직접 목격한 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실존이다. 나처럼 독자의 입장에서 간접적으로 듣고 읽고 아는 자리에 있는 것과는 어떤 의미에서 질적(質的)으로 다른 경험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로 그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두 눈으로 똑똑하게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이신 주님께서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심에도 불구하고 단번에자신을 드리신 이 사건 앞에 선 모든 자들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게 아니었다. 이 반응은 예나 지금이나 제각각이다.

   

 

십자가 위에서 죽는 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3.5)

 

이 사람을 보라!: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8) 몸은 채찍에 맞아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에 흐느적거리고 있고, 밖으로는 온갖 비방과 조롱을 받으며,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38) 달린 십자가 위에 달리신다.

 

[여자의 큰 무리들에게](28-31)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오르는 길목에서 자신의 뒤를 따르며 울부짖는 여인들을 향해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28a) 하신 말씀이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8) 고난일을 보내는 나의 태도와 중심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이처럼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해 주시니 오직 감사할 뿐이다.

슬픔의 핵심은 주님의 처참한 고난에서 오는 것이 아닌, 이처럼 속죄제물이 되사 죽으셔야 하는 우리와 나의 죄 때문에 우는 문물이어야 한다. 인간의 죄가 얼마나 크고 중한 범죄였으면 아들까지 희생하시면서 죄로부터의 자유(해방)를 선언하셔야만 하는가 때문에 울어야 한다. 때문에 단지 주님의 고통이 가슴 아파 흘리는 연민의 눈물이라면 그만큼 아직 그는 십자가와 거리가 먼 사람이다.

 

[저희에게](34a)

마침내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셨다(33). 골고다 언덕에서, 다시 좀 더 높은 십자가에서 세상을 내려다 보신다. 온 몸은 피로 물들었고 영혼까지 그 고통이 전달되었으나 그는 세상이 당신에게 주었던 땅의 소리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사죄의 기도를 품고 하늘 향해 온 몸을 드신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34)

마침내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22.53b) 하신 때는 물러가고 천국 복음이 하늘에서와 같이 지금 이 땅 십자가에서 이루어지는 때가 왔다. 드디어 세상을 다 이기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십자가로부터 흘러넘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용서를 받을만한 아무런 공로나 조건도 없는, 있는 것이라고는 죄가 죄를 낳는 죄의 악순환이 춤을 추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주님은 사죄의 은총을 선포하신다.

극악무도(極惡無道)한 이 세상(인류)이 아닌, 아니 어쩌면 자신을 이처럼 홀대하여 저주와 죽음으로 내어 몬 저 세상(아버지)을 향해 시선을 옮기실 때 과연 주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소리일지 아니면 복음일지 긴장되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찾았고, 그 아버지를 향해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기를 간구하신다. 누구를? 지금 이 기도를 드리는 순간에도 자신을 향해 온갖 욕설과 모욕을 쏟아내는 버러지 같은 인생들을 용서하시기를!

아버지를 사랑하면 이처럼 고백하며 살 수 있을까. 진정으로 자신이 맡아야 할 사명(mission)을 아는 자는 이처럼 살 수 있겠지. 내가 무너지고 주 하나님께서 세워지신다면 기꺼이 그 길을 걸어가는 것, 거기까지 낮아지고, 그곳까지 내려가는 자로 내게 주어진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겠지. 나는 없고 아버지 하나님만이 있는, 그걸 내게 요구하시는 이 길을 나는 지금 무엇으로 통과해 가고 있는지, 자꾸 눈물이 난다.

 

[한편 강도에게](43)

뭔가가 교차한다. 모두가 다 주님을 비방하고 조롱하던 바로 그 순간에,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 밖에 없을 만큼 분명한 죄인으로 정죄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두 사람, 그런데 그들은 생()의 마지막 수레바퀴를 주님과 함께 하는 기회를 맞았다. 놀랍게도 바로 그중 한 사람이 주님 앞으로 돌아온다.

그는 꺼져가는 자기 생명의 소리를 들으면서 동시에 자기 옆에 달린 예수님을 보았고, 온 언행(言行)으로 쏟아내시는 그분의 말씀( 소리’, 23)을 들었고, 그 말씀을 통해 비로소 자기 자신을 보았으며,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오는 심령의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기꺼이 응답한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42)

한 사람은 비방(誹謗)의 독설을(39),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죄 값에 대한 마땅한 고백과,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41a)- 더 놀라운 것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예수님의 죄 없으심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토해 낸다는 사실이다(41b):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자신이 고백했듯이 죄의 값으로 죽어가는 자리에서 주님의 긍휼(구원)을 바라보는 한편 강도의 고백이 놀랍기만 하다. 이 대목에서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앞서 묵상했듯이 지금 주님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 감당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오르셨고, 바로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모든 피와 물을 다 쏟고 계시는 중()이다.

이것은 단지 드라마가 아니며, 언젠가 다시 있을 그런 일도 아니며, 지금껏 십자가 형벌에 따라 죽어갔던 죄인들과는 근본적(본질적)으로 다른 구원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현장에 있었던 자들은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가 다 비웃음과 조롱과 비방으로 구원의 문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35)

흔히들 사람들은 기적을 목도하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면, 내가 예수님 시대에 살았다면 저희들처럼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처음이자 최종적인 십자가의 구원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싶다.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서, 동일한 사건을 통과해 가고 있고, 유일하신 주님으로부터 일어나는 구원사건을 목도하고 있음에도 반응 역시 이처럼 분명하게 둘로 나누인다.

주님은 그 고통 중에서도 바로 그 회개하는 한편 강도의 고백을 외면치 않으신다(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할렐루야다! 누구든 고백하는 것은 자유지만 그러나 그 고백을 판단하시며 갚으시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온다. 그렇다면 나 역시 마치 한편 강도처럼 내 생이 파열될 그런 자리에 처해진다할지라도 바로 그 끝의 문턱에서 주의 긍휼과 자비를 맛볼 수 있기를, 그 사람의 심령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기적(은총)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부스러기 묵상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53.3)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보라!

사람들은 옷을 나눠 제비를 뽑을새 구경하는데 비웃어 희롱하면서 비방하여 ”(34-39) 하는 자들이 있다. 반면에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이른 구레네 사람(시몬), 주의 죽으심을 슬퍼하며 뒤 따르는 여자들, 죄사함을 고백하는 한편 강도가 있다.

 

   겉으로는 동일한 십자가 죽음

    [1] 비방자 - 강도1

    [2] 구원자 - 예수 그리스도

    [3] 회심자 - 강도2

 

자꾸만 전혀 이질적인 이 두 그림(장면)이 극명하게 대조되어 어른거린다. , 그리고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자기 의()만 철철 살아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죄행(罪行)하며 살아가는 지지리도 못난 어리석은 인생들의 처참한 몰골이 자꾸만 내 앞을 어른거린다.

또 한 사람의 십자가 구경꾼에 불과한 초라하디 초라한 나를 보며 내가 할 일이란 그저 탄식 밖에는 없음이 애처롭기만 하다. 주님은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다.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주신 것이다. 그런 나는? 이제 나는 무엇으로 받은 은혜와 사랑을 다시 돌려드릴 수 있을까? 주님, 나도 당신을 위해 이 몸을 드리리이다! 주여, 나도 나의 전부를 다 당신께 드리리이다! 다시금 이 고백을 담아 주님 앞에 올려드린다.

 

내 너를 위하여(찬송가 311)

1.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2)

2. 아버지 보좌와 그 영광 떠나서 밤 같은 세상에 만백성 구하려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2)

3. 죄 중에 빠져서 영 죽을 인생을 구하여 주려고 나 피를 흘렸다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2)

4. 한없는 용서와 참 사랑 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값없이 주었다

이것이 귀중하건만 너 무엇 주느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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