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임팩트(눅 19.41-20.8)

20210320(묵상)

 

 

 

예루살렘 임팩트

Luke. 19.41-20.8

 

    본문 관찰

 

    예루살렘 애가(哀歌, 19.41-44)

    성전청결사건(19.45-48)

    예수의 신적 권위에 대한 도전(20.1-8)

  

 

영적(靈的) 대결

 

예루살렘에 대한 몇 가지 피드백(feedback)이 오간다.

먼저 예루살렘의 오늘(현재)과 내일(미래, 종말)을 내다보시며 우시는 예수님, 강도의 굴혈로 변해버린 성전에 대한 분노와 성전강론,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영적 충돌이 예루살렘행전이 얼마나 험난하고 넘기 어려운 산()과 같은 것인가를 예감케 한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장로들)도 대표되는 옛 질서를 온 몸으로, 또한 정면으로 맞선다. 점차 공생애의 절정으로 치닫는 전운(戰運)이 감돌기 시작한다.

   

 

예수행전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19.41)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19.45)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19.47a)

 

예수님이 울고 계신다(19.41).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다. 그런 면에서 예루살렘은 예나 지금이나 요지부동(搖之不動)이다(13.34-35):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이 예언의 말씀처럼 예루살렘은 얼마 후 로마에 의해 멸망한다(AD 70).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 영적(靈的) 무지가 낳은 필연적인 결과 때문이다(19.42,44b). 그랬으니 찬송하리로다!”(19.38)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23.21)라는 그야말로 전혀 이질적인 두 얼굴의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어찌 보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사람의 모양을 입고 사람 (‘人子’=그 사람의 아들) 같이 되사 공생애를 사시고, 이제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어린양으로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뭐 하나 달라진 것 없는 예루살렘에 대한 복받치는 연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예루살렘의 중앙(핵심)인 성전의 모습 역시 예외는 아니다. 예루살렘(이스라엘)이 이처럼 황무(황폐)하게 된 것도 성전과 종교지도자들의 범죄와 몰락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지나친 판단이 아니라고 한다면 성전의 몰골은 그야말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더욱 이런 형편에 처하게 했음에도 저들은 오직 예수님 흔들기에만 여념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랴!

예루살렘은 네 눈에 숨겨졌도다.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19.42,44)라는 깊은 잠을 자고 있고, 성전은 강도의 굴혈’(19.46, 7.11)이 되어버림으로써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자기 사명(소명)과 정체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때문에 성전 맡은 자들과 결탁하여 하나님의 전을 사람의 이득만이 목표가 된 시장터로 만들어 버린 장사하는 자들’(19.45)을 향한 성전이신 예수님의 분노는 지극히 당연하다 아니할 수 없다(2.21).

그럼에도, 정말 그럼에도 라고 말 할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은 바로 그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그것도 날마다그러셨다(19.47a). 우실 수 밖에 없는 예루살렘이자 청결케 해야만 하는 성전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지금 또 다시 성전을 찾으신다. 그리고 가르치신다. 동시에 날마다. 과연 주님은 어떤 마음이셨을까. 당신과 세상의 근본적인 단절이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당신이 해야만 하는 일들에 오늘도 충성(헌신)하시는 주님에게서 내가 취해야 할 삶의 태도를 돌이켜 본다.

누구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와 상황 때문이라고 변명하며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합리화하는 어리석음이 나를 비웃는다. 어떤 형편과 처지 속에서도 자기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배워야겠다. 예수님처럼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치르는 산고의 고통이라면 그게 나쁠 것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아니면서, 나도 그러지 못하면서, 나는 여전히 뒷골목 수준이면서, 나는 진리와의 만남에서 여전히 옛사람의 모습을 청산하지 못했으면서도 유독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는 날카로운 진리의 칼날을 사용하고 있다면 나처럼 불행한 사람은 또 있을까 싶다.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셨던 주님처럼 역시나 우는 것 밖에 할 일이 없는 초라하고 못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들썩이는 어깨를 가눌 길 없다. 나를 보고 이 땅을 보며 슬프고, 우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마음이 시리도록 아프다. 더 아픈 것은 이 눈물이 중단되지 않고 주님 오시는 날까지 계속되리라는 것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눈물만 흘리고 계시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정신을 차려야겠다.

   

 

NEW vs OLD

 

새로운 질서(예수님)와 옛 질서(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 장로들)의 충돌이 점차 임박하고 있다. 그런데 그 틈바구니에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는 백성들이 있다(19.48a). 지금 이게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예수님을 맞이하는 상황이다. 옛 질서의 우두머리들은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19.47-48)였을 뿐이다.

그 이유라는 게 우습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백성들 때문이다(19.48). 하나님의 법까지를 자기들 마음대로 훌쩍 넘어서서, 그래서 메시야를 죽이겠다고 야단법식인데 정작 넘지 못할 장애물은 사람이다. 역설치고는 참으로 기가 막히는 장면이 아닌가.

주님은 날마다 가르치고 계시는데 저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는 일을 도모하기 위해 모여 있다. 강도의 굴혈을 다시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기 위해서(19.46), 눈뜬 시각장애인이요 무지한 자리를 떠나기 위해서(19.42,44) 모인 게 아니다. 고작 한다는 일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모의하기 위해서 모였을 뿐이다. 이들이 보이는 예루살렘을 지배하는 어둠과 거짓의 무리들이다.

마침내 옛법을 신봉하는 무리들의 음모는 예수님의 턱밑에까지 가까이 와서진행되기에 이른다(20.1). 이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에 독을 담아 이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하지만 저희는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도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기능인들이다(20.5-7). 그것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가 언행의 기준이 되어버린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예수님을 향한 심문이 시작되고 있다. 아직 백성들이 무서워 주님을 잡지 못하고 있을 뿐 호시탐탐 올가미를 씌워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중단시키려는 일단의 음모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놀랍게도 저들은 자신들이 돌에 맞아야 할 자들임을 잘 알고 있다(6). 그럼에도 예수님을 죽이려는 비수를 감추고서 궁색한 논리를 찾고 있는 중이다.

   

 

부스러기 묵상

 

    “보시고 우시며 ”(19.41)

 

1941절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내게 가까이 오신 것만으로도 황송하고 감격스러운 게 사실이다. 가까이 오사 나를 보시고서 예수님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를 생각한다. 예수님께 비춰진 나는 누구일까. 오셔서 내겐 무슨 말씀을 해 주실까. 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조용히 듣는 것,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다. 이것이 주님과의 친밀함이자 교제의 복됨이라도 믿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묵상이 나의 느낌이나 생각을 캐내는 일쯤으로 편하게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내가 본문을 얼마나 보느냐, 그래서 내가 어느 정도의 깊이와 넓이 안에서 말씀을 깨닫고, 새로운 시각을 발견해 내느냐의 싸움으로 정리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묵상은 대상의 문제다. , 내가 스스로의 통찰을 통해 성경의 의미들을 깨달아가는 것이기 이전에 나로 묵상하게 하시는 바로 그 분이 하나님이심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내가 울기 전에, 나를 보시는 주님을, 나를 보시면서 어떤 반응을 하시는 주님을, 어떤 반응을 하시는 주님의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가를 주님으로부터 듣는 것, 이것이 묵상하는 사람이 주께로부터 받아야 할 묵상이다. 그래야만 내가 묵상해야 한다는 조바심(강박관념, 조급함)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이 우시는 것을 볼 수 있고, 주께서 나를 보시며 왜 우시는가를, 그렇다면 그처럼 나의 묵상을 찾아오시는 주님의 의도는 무엇인가를 주님으로부터 듣고 생각하는 묵상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다시 말하면 묵상의 주도권을 주님께 드리고, 주께서 주시는 말씀을 기다리며 받아내는 겸손함 앞에 설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럴 때 묵상은 비로소 주님과 깊은 교제의 자리가 된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셔서 그 성을 내려다보시며 우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42-44). 만일 내가 예루살렘이라면 우시는 주님을 뵈올 때 우는 것만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주께서 우실 때 함께 울 수 있는, 그리고 그 울음의 의미와 뜻을 가슴으로 보는, 말씀하시는 주님의 표정과 억양과 눈빛과 분위기에서 벌써 주님이 묵상되는 것, 이것이 묵상의 질과 깊이를 결정한다.

오늘따라 주님은 우시자, 동시에 분노하신다(41,45). 그러시면서 또한 가르치신다(47). 또한 옛질서(옛법)의 앵글 안에 주님을 묶어두려는 자들의 사악한 도전을 정확하게 꿰뚫고 계신다. 어찌 주님의 시계(視界)를 벗어날 수 있으랴. 주님께 읽혀지는 것만큼이 은혜요 축복이지 싶다. 오늘도 벌거숭이로 주님 앞에 선다. 나의 심령 폐부까지를 굽어 살피시는 주님께 나의 전부가 노출되고, 그래서 주님의 눈 안에 읽혀진 나로 말씀 앞에 섰으면 좋겠다. 사모합니다, 주님!

  

   

제목 날짜
40日 부활행전.復活行傳(눅 24.36-53) 2021.03.27
엠마오 페스티발(눅 24.13-35) 2021.03.27
첫 번 부활절(눅 24.1-12) 2021.03.27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눅 23.44-56) 2021.03.26
십자가를 보라!(눅 23.26-43) 2021.03.26
그들은 누구?(눅 23.1-25) 2021.03.26
너는 누구?(눅 22.63-71) 2021.03.23
나는 누구?(눅 22.47-62) 2021.03.22
기도가 맥(脈)이다!(눅 22.39-46) 2021.03.22
선(先) 섬김이다!(눅 22.24-38) 2021.03.22
최후의 만찬(눅 22.14-23) 2021.03.22
유다 vs 우리(눅 22.1-13) 2021.03.22
재림의 법칙(눅 21.25-38) 2021.03.19
종말의 법칙(눅 21.5-24) 2021.03.19
서기관 vs 과부: 경건이란 무엇인가(눅 20.41-21.4). 2021.03.18
부활을 네가 믿느냐?(눅 20.27-40) 2021.03.18
포도원 이야기I,II(눅 20.9-26) 2021.03.18
예루살렘 임팩트(눅 19.41-20.8) 2021.03.15
승리의 入예루살렘(눅 19.23-40) 2021.03.15
종들의 사역보고서(눅 19.11-27) 2021.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