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들의 사역보고서(눅 19.11-27)

20210318(묵상)

 

 

 

종들의 사역보고서

Luke. 19.11-27

 

    본문 관찰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그들을 부르니

       종1,2 -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다섯 므나를 남겼나이다

       종3 - 주인이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내가 왕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죽이라

  

 

열 므나의 비유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11b)

         → 본문

    “예수께서 이 말씀’(11-28)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28)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시각 차이가 여전하다.

이것은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자들 사이에 끊임없는 긴장을 낳았고, 그래서 주님은 갈릴리에 이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노중에서도 수난예고를 통한 분명한 입장을 밝히셨다(9.22,43-45 17.25, 18.31-3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점점 가까이 올수록 갈등에서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11b) 이것이 열 므나의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신 이유다.

따라서 이 비유는 메시야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하나님의 나라를 무대로 귀인(예수님)이 무엇을 하고 있고, 종들(그들, 그 나라의 백성들)이 무엇을 해야 하며,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한 므나가 열 므나가 되기까지, 그리고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오기까지는 저희가 기대하는 것처럼 당장’(즉시, 11b)은 아니다.- 왕의 귀국과 함께 이미와 아직 사이의 결산이 있을 것을 말씀한다.

   

 

왕의 출국명령(12-14)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꿈은 오래 묵은 것이고(11), 이 잘못된 처방전은 쉽게 폐기되지 않고 주님의 부활 후까지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끝까지 주님을 공격하다가 장렬하게 산화한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1.6) 제자들까지 이 정도였으니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이야 오죽했을까.

이러한 술렁거림은 예루살렘 입성 초읽기에 들어간 주님에게도 상당한 압박이 되었던 게 사실이다(11,28). 그렇다면 이 열 므나 비유는 그릇된 메시야 이해라는 상황을 해결하는 쪽으로 해석(이해)되어져야만 한다. 먼저 지금 주님의 예루살렘은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12) 것이라는 보다 큰 그림과 연결되어 있다.

누가의 통찰에 따르면 지금 예수님의 예루살렘은 하나의 분명한 목표를 향해 쉼 없이 움직이고 있는 화살에 비유할 수 있다. 이렇듯 메시야는 일찍이 저편 구약에서 출발하여 이편 신약의 공생애라는 활시위를 도약판 삼아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누가는 지금 이를 줄기차게 이야기해 왔다. 그의 통찰에 의하면 구약의 예언들(“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한 모든 것”, 18.31)과 복음서의 예고(‘별세하실 것’ - 9.31, ‘승천하실 기약’ - 9.51), 특별히 네 번에 걸친 수난예고들(9.22,43-45, 17.25, 18.31-34)이 마침내 고난 받으시는 인자(그 사람의 아들)에 의해 성취되어질 것이다. 예루살렘에서다. 이렇게 해서 예수행전의 복음은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 사역에 의해 완성된다(24.25-27,44-45).

이것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주님의 목적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나타난다고?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열 므나 비유의 절묘함이 여기에 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다 이루시고 영광의 보좌 우편으로 복귀하실 것이고 다시 오실 것이다(13). 바로 그날까지 구원 받은 백성들은 주님이 맡기신 위대한 사명을 위해 애쓰고 힘써야 한다.

하지만 세상은 주님을 여전히 미워하며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14)라며 충동한다. 바로 이러한 다중적인 상황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순간부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사도신경 )는 일이 이루어지고(초림) 또 이루어질 때까지의(재림) 긴장이다. 예루살렘은 이처럼 초림과 재림 사이를 살아가면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나는 것이 아닌 이유, 분명하다.

   

 

왕의 귀국심판(15-27)

 

이렇듯 주님이 다시 돌아오기까지 세 부류의 사람들이 살아간다. 하나는, 므나를 받은 종 열 명 가운데 첫째와 둘째처럼 주인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착한 종이다(16-19). 다른 하나는 셋째 종처럼 악한 종이다(20-23).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이처럼 일하시는 주님을 미워하며 주께서 왕되심을 원치 아니하는 백성들이다(14).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15)는 날이 오고 있음에도 말이다.

내가 돌아올 때기까지라는 약속은 그대로 성취된다(13,15). 그뿐 아니라 주어진 약속은 반드시 확인된다(15). 자기들 마음대로 이해하고 해석한 대로 살아버린 것은 자유지만, 그러나 거기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물으신다. 먼저 셋째 종이다. 이것은 이미 받은 므나를 빼앗기고 만다(20-21 22-26). 또한 주님의 왕되심을 원치 아니하던 백성들이다: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14 27).

주님이 지금 고난 받는 종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이루어지는 완성의 때가 아니라 그것의 시작이다. 유감스럽게도 저희(주님 곁의 사람들)까지도 이 나라의 옴을 오해하고 있음이 안타깝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고(초림), 지금 오고 있고(초림과 재림 사이), 앞으로 곧 올 것이다(재림). 이처럼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종들이 해야 할은 분명하다.

더 분명한 것은 종들이 이 나라의 옴을 위해 할 일은 없고, 주님에 의해 왔고 또 오고 있는 나라를 맞이하는 므나를 받은 자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므나를 받았고, 그것으로 장사하는 것을 통해 그 나라를 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은 오실 주님의 몫이다.- 주님에 의해 오고 있는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종과 주인의 질적 구분이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백성들과 같은, 셋째 종과 같은 그 나라의 옴과 무관한 심판의 대상으로 추락하고 만다.

   

 

부스러기 묵상

 

셋째 종의 착각(무지, 자기확신)이 두고두고 아쉽다.

주님의 왕되심을 원치 않는 백성들이야 어느 때나 어느 곳이나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니까 그렇다 손 치더라도, 아니 주님으로부터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13)는 주의 므나까지 받은 종으로서 어찌 [내가복음](5복음서, 21)을 따름으로써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느냐 말이다.

아마도 이 악한 종은 빈둥거리며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게으른 육신덩어리였겠지만, 동시에 생각(마음, 정신)도 이에 버금갈 정도로 게으르고 악한, 그러니까 주인의 뜻과 의도를 자기 마음대로 이해(해석, 적용)해 버렸을 것이다. 그는 정확한 명령이라는 주인의 논리가 아닌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 버린 종의 논리를 따라 살았다.

아마도 무익하고 어리석은 이 악한 종은 마음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했을 것 같다. 먼저, 생각하기를 주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야 하는 것이 못마땅했으리라. 다른 종들은 한 므나가 둘이 되고, 그래서 다섯과 열이 되기까지 장사(사명, 소명, 하나님의 나라를 이룸)하는 일에 자신들의 삶을 불태웠을 것이다. 바로 그때 이 무익한 종은 마치 베짱이처럼 빈둥빈둥 거리면서 땀 흘리며 장사하는 종들을 비웃었을 것이다.

또한, 생각하기를 한 므나마저도 잃어버리면 어쩌나 싶었을 것이고, ‘만일 그렇게 되면 무섭기만 한 주인을 어찌 다시 볼 면목이 있겠는가라는 자기 나름대로의 논리에 충실했으리라(21). 주인이 종을 걱정해야 할 텐데 어찌된 게 종이 주인을 염려하며 걱정하고 있으니, 참으로 괘씸한 사고방식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13)이면 도대체 종인 나의 인생은 뭐냐 싶었을까. 충분히 가능한 추론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11)은 하나님의 나라를 장사’(sales)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채우는 자들로, 나 한 사람이라는 한 므나를 통해 또 다른 다섯과 열 므나를 하나님의 나라 곡간에 채워야 할 사명자들이다.

그런데 장사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살 궁리나 하고 있고, 자기 인생타령이나 하고 있고, 어떻게 하면 주인이 다시 오실 때에 나를 통해 기뻐하시는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될까에는 전혀 관심도 열정도 애씀도 없다면 그는 이미 주의 종됨을 포기한 자와 같다. 그러고도 주인을 영광스럽게 만날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이것은 자기 자신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무의미한 인생살이가 하나고, 주인이 와서 내리는 준엄한 죽음의 저주심판이 그 하나다.

나는 어떤 종인가. 주인이 어제 맡겨준 므나를 오늘 어떻게, 그래서 다시 오시는 주님께 내일 어떤 모습으로 설 수 있을까. 오늘의 나의 삶이 내일의 나의 신분을 결정한다. ‘착한 종이냐 아니면 악한 종이냐는 주인이 와서 심판하는 날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오늘을 보면 내일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고, 오고 있고,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나라는 갑자기(‘당장에’) ()에서 유()로 창조되는 허상(마술의 세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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