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사 22.1-25)

20200808-09(묵상)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Isa. 22.1-25

  

   본문 관찰

 

   예루살렘(1-14)

      지붕에 올라감은 어찌함인고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관원들도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결박을 내 딸 백성이 패망하였음으로

      여호와께로부터 이르는 소란과 밟힘과 혼란의 날이여

      성벽의 무너뜨림과

      엘람 기르 사람 병거는 골짜기에 가득하였고

      마병은 성문에 정렬되었도다

         → 그러나’(11b)

      너희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셉나와 엘리아김(15-25)

      셉나(15-19)

         여기에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여호와가 너를 던지되 공 같이 던질 것이라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 네가 그 곳에서 죽겠고

         네 관직에서 쫓아내며 네 지위에서 낮추리니

      엘리아김(20-25)

         네 정권(政權)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리니

            → 그날에는’(25a)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으리니 그 못이 부러져 떨어지므로

         그 위에 걸린 물건이 부서지리라

   

 

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

 

이사야는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예루살렘을 보며 슬피 통곡’(4a)한다.

엘람과 기르의 기마병들이 예루살렘 성문 앞에 공격을 준비 중이어서다(5-7).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모습은 실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1-3,8-11a,13). 그러니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다른 길이 없다(4b-5a,14). 이처럼 심판이 문 앞에 당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러나’(11b-12) 이후를 요구하셨음에도 이스라엘은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이것은 두 사람(셉나, 엘리아김, 15-25)의 인생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예루살렘 콤플렉스(1-14)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죄(), 그리고 회개에의 초청은 앞서 1-5장에서 집중적으로 설교되었다. 이스라엘의 영적 시계(視界)가 칠흑같이 어두울 바로 그 때 이사야는 하늘을 보고 하나님의 소명 앞에 선다(6). 그리고 칠흙처럼 어두운 시대 앞에 찬란한 메시야의 희망을 노래한다(7-12).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놓여 있다(13-23). 지금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니다(22). 이 많은 설교를 들었고, 선지자 이사야가 있음에도 말이다. 이 어찌 이스라엘만의 문제이랴.

하나님의 환상(이상/異像, 1,5)이 있는 곳과 그 대상임에도 심판은 면죄되지 않는다. 심판의 그림은 죽음의 도성으로(2), 백성들은 지붕으로(1), 지도자들은 도망을 가고(3), 엘람과 기르의 병거와 마병을 앞세운 침략자들이 성문에 진을 치고(6-7), 이를 막아보기 위해 성벽 재건용으로 헐린 집들이 여기저기에 보인다(10). 한 때 즐거워하던 고을이 말이다(2a). 아니다, 놀라운 것은 지금 심판 예고 앞에서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13)라고 말하는 수준이다.

그러니 11b-12절로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들을 의지한다. 먼저, 수풀 곳간에 저장된 무기들이다(8). 또한 두꺼운 예루살렘 성벽이다(10).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의 물 공급이다(11a). 이것만 잘 되어 있으면 엘람과 기르의 침입, 아니 하나님의 심판도 문제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11b-12) 이스라엘은 이처럼 살아서는 곤란하다. 하나님을 앙망하고 존경하며(11b), 통곡과 회개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했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끝내 회개하지 않았다.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을 쪼개고 지나가는 심판을 집행하실 것이다(14): “이 죄악은 너희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결국 1-7절은 단순한 예고가 아닌 실재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가를 만천하에 드러내실 것이다(8-11a). 유다는 마침내 벌거벗은 상태가 된다(8a). 그날이 오고 있다. 사실이다.

 

 

셉나와 엘리아김(15-25)

 

이제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였는가를 구체적으로 예증한다. 이를 위해 죄() 아래 있는 두 사람을 등장시킨다. , 나의 이름이 앞으로 이들처럼 쓰이면 어찌될까 싶어 이름 앞에 부끄럽게 살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먼저 셉나(Shebna, 15-19). 그는 국고를 맡은 자(15), 궁중의 고위 관리(15)로서, 그리고 서기관(36.3, 왕하19.2)으로서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유명한 자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이 오늘이 있도록 하신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못하고 살고 있다. 오직 그의 관심사는 사후(死後)의 평가의 상징인 무덤에 집중되어 있다(16). 참 불행한 사람 아닌가.

결국 그는 하나님에 의해 단단히 결박되고 던지되, 감싸서 던질 것이라.”(17-18a)는 선언과 함께 수치’(18b)를 당하고, 결국은 죽게 된다(18b). 이것은 먼저 삭탈관직(削奪官職, 19)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몰락은 죽은 이후에 싸늘한 무덤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있을 때 자신의 무너짐을 스스로 본다는데 있다. 그래서 심판(공의)은 무섭다. 하지만 진짜 무서운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인 줄을 모른다는데 있다. 이것이 죄인의 금생과 내세의 총체적 비극이다.

또한 엘리아김(Eliakim, 20-25)이다. 특이한 것은 그는 지금 셉나에게서 자신에게로 영광이 교체됨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20, 왕하18.18). 또한 셉나의 몰락이 무엇 때문인지도 알았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그는 높아진다. 그래서 정권(政權, 21), 다윗 집의 열쇠를(22a), 그리고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22b)는 영광 앞에,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견고하게”(23a)함을 받아 마침내 영광의 보좌(23b)에 앉게 될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영광이요 복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그날에는 (25)이라는 종말론적인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왜 그런가? 이사야는 그 이유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그가 이 심판의 대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역시 높은 지위와 명예와 존귀함이 결국은 그의 몰락을 부채질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 아닌가. 결국 몰락(심판)의 원인이 되어버린 것으로 밖에 성공의 목록들이 사용되지 못했다면 그것을 얻고 누리며 살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부스러기 묵상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18.1)

 

선지자의 눈물에는 다 이유가 있다(4).

하나님과 전혀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마이동풍(馬耳東風) 하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받은 복을 하나님의 심판을 맞이하는 것으로 밖에 쓸 줄 모르는 무지한 백성들을 보면서 이사야는 통곡한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그는 위로를 거부한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이 살아가는 저들을 보면서 말이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좀 씁쓸하다. 심판이라는 태풍이 몰아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5-7) 그 순간만을 모면하려 하고 있을 뿐이고(1-3), 허수아비와 같은 것들을 준비해 놓고서 안심하고 있고(8-11a), 오히려 잔치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13). 문제는 죄를 행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 모르고 있고(11b,14),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는다(12). 참으로 놀랍고도 놀라운 죄의 뿌리다.

이게 하나님이 택하신 나라요 백성인 이스라엘(‘성도’)이다.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에 지붕을 찾고(1), 죄로부터 탈출(도망, 출애굽)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함에도 단순히 그 문제의 곁을 떠나는 것만을 시도하고 있고(3), 가짜 해법을 붙들고서 안심하고 있고(8-11a), 그래서 그것만큼 하나님을 앙망하지도 존경하지도 그분의 명령을 준행하지도 않고(11b-12), 그것만큼 죄악 중에 있으니(14)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이르는”(5a) 심판을 받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나는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까. 정작 예루살렘의 심판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고, 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외치고 있지만 나의 마지막 때, 그날에하나님 앞에 섰을 때를 이스라엘처럼 고려하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면 이것은 나와 이스라엘이 전혀 다를 바 없다.

오늘은 행복한데, 그러나 내일은 심판인 이스라엘의 모습이 두고두고 내 마음을 부담스럽게 한다. 이 둘의 단절은 하나님의 명령을 떠난 죄악(11b-12,14)임을 잊지 말자. 그렇다면 오늘이 문제 없어 보인다고 미래가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리라는 법은 없다는 점 또한 분명히 하자. 오늘과 내일을 하나로 연결하려면 죄가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리하여 은혜의 줄기가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함 또한 명심하자.

하나님이 아닌 그 무엇을 붙들고 있는 들 그게 나의 영원한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심판 앞에 여지없이 무너져 있는 이스라엘에게서 보고 있는 중이다.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만으로 나의 힘을 삼아야 한다. 오늘을 부요하고 복되게 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며 주님 바라보는 하루이기를 기대해 본다. 사실 무엇이 되느냐보다는 어떻게 사느냐를 더 우선한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더불어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오늘이 영원을 단절하게 하지 못하도록 오늘을 건강하게 살아보자.

 

  

제목 날짜
그 날에 ‘이 노래’를 부르리라!(사 26.1-27.1) 2020.08.13
이사야 찬양시.讚揚詩(사 25.1-12) 2020.08.12
이사야 종말론.終末論(사 24.1-23) 2020.08.11
두로 망국가.亡國歌(사 23.1-17) 2020.08.10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사 22.1-25) 2020.08.08
바벨론이여, 합락되었도다!(사 21.1-17) 2020.08.07
애굽 묵시록.黙示錄(사 20.1-6) 2020.08.06
애굽의 과거 현재 미래(사 19.1-25) 2020.08.04
다메섹에 대한 경고라(사 17.1-18.7) 2020.08.01
모압 애가.哀歌(사 15.1-16.14) 2020.07.31
3강국들의 장송곡.葬送曲(사 14.1-32) 2020.07.29
바벨론아! 심판의 날이 가까왔다(사 13.1-22). 2020.07.28
‘그날에’ 부를 노래(사 12.1-6) 2020.07.26
메시야 환상곡.幻想曲(사 11.1-16) 2020.07.25
'남은 자'(Remnant)의 복음(사 10.20-34) 2020.07.24
요동치는 시대일지라도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합 3.1-19). (1) 2020.07.24
앗수르 방정식(사 10.5-19) 2020.07.24
그럴지라도 메들리.Medley(사 9.8-10.4) 2020.07.23
메시야, 흑암에서 빛으로!(사 9.1-7) 2020.07.22
하나님의 파도타기(사 8.11-22) 2020.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