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메섹에 대한 경고라(사 17.1-18.7)

20200802-03(묵상)

  

 

 

다메섹에 대한 경고라.

Isa. 17.1-18:7

  

   본문 관찰

 

   다메섹(17.1-3)

     무너진 무더기가 될 것이라 버림을 당하리니

     다메섹 나라와 아람의 남은 자가 멸절하여

   이스라엘(17.4-11)

     그 날에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그러나 남으리니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손으로 만든 제단을 아세라나 태양상을 바라보지 아니할 것이며

     그 날에 버린 바 된 황폐하리니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이라

     그러므로 심으며 발육하도록 하였으나 농작물이 없어지리라

   이방 나라들의 멸망(17.12-14)

     열방이 충동하나 주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니 그들이 멀리 도망함이

     보라 저녁에 두려움을 당하고 아침이 오기 전에 그들이 없어졌나니

   구스(18.1-7)

     여호와께서 조용히 감찰함이

     추수하기 전에 꽃이 떨어지고 낫으로 그 연한 가지를 베며

     그 때에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시온산에 이르리라

   

 

다메섹 vs 이스라엘

 

다메섹과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가 같이 나오는 게 좀 그렇다.

그러나 71-9절 말씀을 함께 읽으면 의문은 풀린다: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8a) 그러니까 아람왕 르신과 이스라엘이 동맹을 하여 예루살렘을 쳤던 것이다. 이것이 화근이다. 어찌됐든 이스라엘(북왕국)이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헛된 세력을 등에 업고 유다(남왕국)를 협공했으니, 두 나라(다메섹과 이스라엘)가 하나님으로부터 그에 따른 책임을 추궁 받는 것이야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 일은 유다왕 아하스(BC 744-28) 때에 된 일이다. 결국 다메섹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BC 732) 당하고, 이스라엘 역시 10년 후에 역시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한다(BC 722). 두 나라는 공히 이 일로 해서 패망의 길을 걷게 된다. 한편 이기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북왕국이 이방의 힘을 빌려 남왕국을 쳤다는 것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이자, 영적 혼합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다메섹(17.1-3)

 

아람의 수도인 다메섹의 꿈은 너무 황당했다. 이스라엘과 동맹하여 유다를 멸하려 했으니 말이다(7.1-9, 왕하16.5).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 어리석게만 보인다. 결국 전쟁에 이기지도 못하고(7.1b), 그 결과 마침내 허물어진 무더기가 되어 황무지로 변할 것이며(1-2a), 급기야 나라의 주권을 잃게 될 것이다(3).

힘은 있을 때 조심해야 하고, 잘 사용해야 한다. 결국은 이 원리를 버리자 다메섹의 힘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에 줄을 선다. 이 때문에 왕에서 백성까지 온 유다는 전쟁의 공포로 말미암아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7.2)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악()이 득세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으시며, 악이 승리하는 것을 묵과하지 않으신다. 결국 다메섹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꼴이 되었다.

   

 

이스라엘(17.3-11)

 

다메섹과 죄를 공모한 이스라엘(북왕국) 역시 풍전등화(風前燈火)이기는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일지라도 죄에 대한 심판에는 예외가 없다. 에브라임의 요새 또한 무방비 상태가 될 것이다(3a). 이와 같이 심판이 집행되는 그날에’(4,7,9) 야곱의 영광은 시들고, 견고한 성읍들이 아모리 족속의 성읍들처럼 황폐하게 될 것이다. 마치 곡식을 거두고 난 후의 텅 빈 들처럼(5), 버린 바 된 수풀 속의 처소처럼 말이다(9).

이스라엘이 이처럼 휘청거리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그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10a). 하나님이 부재(不在)중인 곳에 다른 것이 들어오게 되었고, 이는 결국 황폐함을 통해 쇠잔하게 되는 일을 부채질한다. 따라서 길가와 가시떨기 밭처럼 이미 황폐해져 버린 토양에 뭔가를 심은 들 그게 열매를 맺을 리 없다(10b-11). 이게 이스라엘의 영적 현주소다. 허울뿐인 이스라엘에게서 연민의 정을 느낀다.

그러나(6a) 다메섹과 이스라엘은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이들은 모든 것이 끝장날 막다른 골목에서 회개가 시작된다. 놀라운 반전(反轉)이다. 이스라엘은 마침내 자기를 지으신 거룩한 자를 바라보겠으며 뵙겠고”(7), 그것과 비례해서 자기 손으로 만든 인조신(人造神)인 단과 아세라상을 바라보지 아니하며 보지 아니할 것이”(8).

이것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메섹의 멸절(1-3)과 다른 남으리니 남음 같겠고 남음 같으리라.”(6)로 가는 길을 열게 만든다. [심판주의보] 앞에서 파선하는 위기를 넘길 수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또한 삶의 의지적인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패도 실패지만 그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 이게 복음이다.

   

 

구 스(18.1-7)

 

   A 구스(1-2)

      X 공의의 심판(3-6): 앗수르 연합군

   A' 구스(7a)

      X' 은혜의 구원(7b): 구스

 

구스(오늘날의 에티오피아가 아닌 애굽 남쪽의 고대 누비아, 오늘의 수단일 것이다)해변 주민들이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20.5-6)였을 만큼 강한 나라다. 그런데 이 나라가 바로 그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 예고되고 있다(20.3-4). 이런 이해의 빛에 비춰보면 지금 구스는 앗수르 동맹 체제를 견고하게 하기 위한 갈대 배를 물에 띄우고 그 사자를 수로로 보내며연합군을 도모하고 있는 듯하다(1-3). 아마도 이 일을 도모하기 위해 여러 나라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 같다.

이런 정황을 종합해 보면 구스를 중심으로 한 앗수르를 견제하는 일에 유다 역시 자유롭지 못하였던 것 같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이를 당신의 처소에서 조용히 감찰하고 계셨다는 점이다(4a). 하지만 더 결정적으로 놀라고 놀라운 일은 구스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의 역전 현상이다(1-2 7): “그때에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산에 이르리라.”(7)

결코 쉽게 이해되지 않은 텍스트의 초점이다. 전적인 하나님의 자비의 앵글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타락한 아담과 하와가 여자의 후손가죽옷에덴을 통한 새로운 삶이 주어진 것처럼, 소돔과 고모라의 전면적 심판에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구원을 받은 것처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불가항력적 은혜로 구원하신 것처럼 구스와 나라들’(2)은 종말론적으로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에 초대된다.

   

 

부스러기 묵상

 

이스라엘의 죄는 생각보다 깊고 심각하다.

이방과 공모하여 유다를 쳤으며(실용주의. 7.1-2), 하나님을 잊어버렸고(배도.背道, 10), 아세라상을 숭배했다(혼합주의, 8). 이쯤이면 중증(重症)이다.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와 있다. 그래서 야곱의 영광과 몸도(4), 또한 식물도 그러므로’(5,10b-11)로 이어지는 선언을 받게 된다. 이처럼 스스로 자초한 심판은 영육(靈肉)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것이 없질 않은가. 이것이 다 세상과 짝하여 살아보겠다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 죄의 삯이다.

죄에 대한 책임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 다메섹만이 사람의 떼는 간 곳 없고, 양무리들만 가득한 황무지가 되는 심판을 받는 게 아니다(1-2). 에브라임 역시 함께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다(3a). 그러나 이 둘의 분명한 차이는 6-8절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 당신을 바라보는 자들을 남기신다. 이제 저들은 더 이상 이방의 죄 부스러기들을 바라보지 않는다. 이것이 은혜다. 이스라엘은 죄를 심었지만 하나님은 그 황무지에서 죄를 뽑아 내시고 당신을 바라볼 가지(열매)를 남기신다.

이방의 적국들은 한결같이 다 멸망을 받는다(12-14). 다메섹에도(아람, 1-3), 북왕국 이스라엘에도(3a,4-5,9-11), 그리고 모든 이방 나라에게 다 죄는 슬픔을 -“슬프다 많은 민족이 소동하였으되”(12a)- 가져다 주었다. 이것이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免罪)하지 않고”(34.7) 죄를 미워하시며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이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만은 그러나 그날에”(6-8)라는 은총의 통로를 준비해 주실까.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불만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니다. 바벨론(13.1-22, 14.13-23), 앗수르(14.24-27), 블레셋(14.28-32), 모압(15.1-16.14), 다메섹(17.1-3), 구스(18.1-7)가 범죄에 따른 심판을 받듯이 이스라엘도 동일한 하나님의 정죄를 받는다. 이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유다와 이스라엘은 다시 회복되는 은총을 늘 약속으로 받는다(14:1-11, 17.6-8). 이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에 기초하며(14.1a, 17.6),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 편에서는 언제나 회개라는 은총의 통로를 통해서 발견된다(17.7-8).

유대인과 헬라인의 차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회개에서 비롯됨을 다시금 은총의 근거로 분명하게 각인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왜 다른 기준을 적용하실까는 일단 내 영역이 아니기에 왈가왈부(曰可曰否)할 입장이 아니다. 자꾸만 원인을 하나님 쪽으로 돌리려는 것은 또 다른 이름의 죄악이다. 그래서 문제를 인간의 회개하지 않음에서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 역시 하나님 밖에 있는 자들과 죄를 범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를 바 없다. 어쩌면 더 사악하고 지능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물겹도록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것은 이 죄들이라는 것이 -물론 그것에 따른 하나님의 징계를 받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언제나 다시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분의 은총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는 은혜의 기회가 되곤 한다는 점이다. 물론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6.1)이지만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5.20b)음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는 부분 아닌가.

나는 죄를 심어 죄악을 거뒀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십자가로 나의 모든 죄를 다 속량하셨다. 이 은총을 통과해 가고 있음이 오직 감사일뿐이다. 이방 나라들의 죄악과 그게 따른 하나님의 심판을 묵도하면서 나 역시 저들과 동일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어도 아무런 변명이 있을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비록 여전히 내 안에는 죄의 씨앗이 자라고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이 기막힌 역설을 다시금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확인하는 말씀이다. 부끄럽고 내 죄가 가슴 아파 다시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지만 이미 내 심령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기운이 채워지고 있음을 어찌하랴. 이 두 법 사이에서 통곡하던 바울의 고백이 내 영혼을 시리도록 아프게 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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