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국들의 장송곡.葬送曲(사 14.1-32)

20200729-30(묵상)

  

 

 

3강국들의 장송곡(葬送曲)

Isa. 14.1-32

  

   본문 관찰

 

   이스라엘의 회복(1-11)

     긍휼히 여기시며 다시 택하여 본토에 돌아오리니

     여호와께서 안식을 주시는 날에

     너는 바벨론 왕에 대하여 이 노래를 지어 이르기를

       어찌 그리 패하였는고 여호와께서 악인의 몽둥이를 꺾으셨도다

       이제는 넘어져 있은즉 너도 우리 같이 되었느냐

       네 영화가 스올에 떨어졌음이여

   바벨론의 멸망(12-23)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악을 행하는 자들의 후손은 영원히 이름이 불려지지 아니하리로다

     너희는 그들의 조상들의 죄악을 말미암아 그들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일어나 그들을 쳐서 멸망의 빗자루로 청소하리라

   앗수르의 멸망(24-27)

     반드시 파하며 짓밟으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블레셋의 멸망(28-32)

     네 뿌리를 죽일 것이요 살륙을 당하리라

     다 소멸되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 그 안에서 피난하리라

   

 

이스라엘 vs 이방(3강국들)

 

이스라엘은 안식으로(1-3), 이방 나라들은 패망으로 끝난다(4- ).

하나님에 의해서다(1,3,5,22,24,32). 바벨론(13)과 이스라엘(1-2)에게 역전의 나팔이 울려 퍼진다: “전에 자기를 사로잡던 자들을 사로잡고 자기를 압제하던 자들을 주관하리라.”(2b) 마침내 역전이다. 이스라엘이 은혜를 받는지에 대해서는 그 이유가 알려지고 있지 않다. 반대로 바벨론을 비롯해 이방 나라들이 몰락에게 되는 이유는 명백하게 공개된다(5- ).

   

 

이스라엘의 회복(1-11)

 

아하스가 유다를 다스리고 있을 때(7-14, 7.1, 14.28) 이스라엘은 이미 바벨론 포로와 귀환이 예언되고 있고(1), 하지만 바벨론은 패망이 예언된다(13.1-14.23). 가장 사악하고 거짓된 왕이 다스리는 때에 하나님은 7-14장을 통해서 강력한 메시지를 선포하신다. 이스라엘의 죄는 저들로 하여금 포로 되게 하였으나, 하나님의 의와 사랑은 저들을 긍휼히 여기신다(1a, 7.14, 9.6-7, 10.20-23, 11.1-5,10-12.6). 이스라엘이 잘나서가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의 긍휼이며, 다시 택하심을 통해 고향 땅에서 살게 하실 것이다(1a).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이스라엘과 연합할 것이다(1b). 마침내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 즉 인류를 향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성취하사 세상을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 보이신다(12.3, 3.16a). 삶은 역전되어 이스라엘은 안식을, 그러나 하나님과 원수된 나라들은 슬픔과 곤고와 고역이 그 뒤를 따르게 된다(3).

하나님은 이처럼 역전되는 그 날에 부를 [바벨론 장송곡]을 미리 발표하신다(4-11). 하나님의 열심이 이를 이루어 가실 것이다. 여기에는 죄악을 꺾으시는 하나님의 꿈이 들어 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심을 언행(言行)하심으로써 결국 궁극적으로 볼 때 과연 누가 승리하는가를 보여주신다. 이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단하도록 만드는 나침반인 셈이다.

하나님이 바벨론의 학대와 강포라는 악인의 몽둥이를 끝나게 하시는 날이 있다(4-6). 이제는 저들의 왜곡된 분노는 물러가고 평화와 안식의 노래를 부르게 하신다(7-8). 악인은 이렇듯 온 세상의 비아냥거림과 조롱거리로 전락한다(8-11): “구더기를 요로 깔고, 지렁이를 이불로 덮고, 누워라!”(11b, 표준새번역) 음부(무덤, 지옥, 9,11)까지 낮아진 처참한 몰골을 묘사하는 가히 해학의 압권이다. 하지만 이것은 은유나 비유가 아니라 실제요 실상이 될 것이다.

   

 

바벨론 장송곡(12-23)

 

바벨론이 계산할 수 없었던 것은 자신들이 잘 나갈 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방자하게 언행(言行)한 부분이다. 누구나 빠질 수 있는 함정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하셨다. 그래서 인간(‘’)은 실패할 때보다 성공할 때가 더 위험하다.

바벨론의 실패도 그렇다. 하늘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나뒹굴기(12) 바로 직전까지 그는 이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13-14) 바로 교만이라는 죄다. 어리석어도 이 정도면 불치병이나 다름없는 중증(重症)이다. 이러니 음부까지 추락하는 것 아닌가(15). 결국 심은대로 거둔 것이다(16-17,19-20).

마침내 하나님이 친히 모집하신 군대는 저들의 모든 것을 끝장낸다(13.1-5 14.21-23). 죄를 미워하시사 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그래서 더 이상 그것들이 대()를 이어가지 못하도록 그 뿌리를 끊으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만난다. 먼저 땅을 취하고(21), 이름을 끊고(22), 멸망의 빗자루로 말끔히 쓸어버리심으로서(23) “악을 행하는 자들의 후손은 영원히 이름이 불려지지 아니하”(20b)게 하신다.

바벨론의 헛된 꿈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여호와께서 이제는”(3,7), 또한 그러나 이제 만군의 여호와께서”(15,22) 바벨론의 모든 죄악을 음부’(무덤, 9,11,15,19)의 맨 밑바닥으로 떨어지게 하신다. 영적 전쟁은 하나님의 승리로 끝이 난다. 이걸 모르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었던 것 아닌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16.18) 가장 큰 비극은 이제 더 이상 돌이킬 기회가 없다는 점이다(20). 이게 하나님의 심판이다.

   

 

앗수르의 멸망(24-27)

블레셋의 멸망(28-32)

 

하나님은 파하며 짓밟으리니”(25a)라는 앗수르를 향한 심판 또한 반드시’(24) 그렇게 되게 하실 것이라 하신다. 가장 강대한 나라들이 하나 둘 하나님의 심판 선언 앞에 선다. 그렇다, 하나님이 결정하셨으니 누가 이 하나님의 경영을 폐하고 돌이킬 수 있겠는가(27). 하나님이 생각하셨다면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24a). 이로써 이스라엘을 짖누르던 멍에의 짐는 벗기어지게 될 것이다(25b). 하나님의 보좌 보다 위에 있는 행세를 하던 앗수르, 하나님의 말씀마저도 앗수르 왕의 칙령 밑에 있다고 교만하던 그들의 종말은 이처럼 심판이다.

한편 블레셋은 요담의 아들이자 웃시야의 손자인 악한 왕 아하스 16(7-14)이 그 끝을 알리는 해에 블레셋은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가 이사야를 통해 전달된다(28-32). 그렇다면 이 메시지는 아하스의 아들로서 그의 뒤를 잇는 히스기야에게 요구되는 말씀이 되는 셈이다.

아하스는 앗수르 정책에 따라 앗수르와 화친함으로써 주변 국가들의 침략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죽자 블레셋은 히스기야에게 앗수르 동맹을 요구한다. 이는 블레셋을 치던 막대기’(29)인 앗수르가 부러진 것에 비유되고 있듯이 힘이 점차 약하여지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앗수르나 블레셋이나 애굽이든 간에 열방을 의지하여 사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당시 패권을 잡고 떵떵거리던 나라들을 하나 둘 심판대 위에 올려 놓으시며 심판(멸망)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블레셋 역시 다 소멸되리로다!’(31)라고 선언하신다. 따라서 블레셋의 사신들에게 화친(동맹)을 맺지 않겠다고 대답하라 하신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 그 안에서 피난하리라.”(32)

   

 

부스러기 묵상

 

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 이스라엘과 이방 3강국들(바벨론, 앗수르, 블레셋)의 쌍곡선은 이것을 잊지 않게 한다. 사실은 둘 다 범죄한 나라다. 그런데 하나는 다시 긍휼히 여기심을 받고(1-3), 이방 나라들은 패망하게 된다(4- ). 왜 그럴까? 신비한 부분이면서 두렵기도 한 대목이다. 하나님이 나에게도 이 둘을 적용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쪽에 서게 하셔도 할 말이 있을 수 없질 않은가.

내가 살았던 값을 이 법칙에 대입시키면 당연히 이방에 해당하는 답(심판, 멸망)이 나올 것이다. 그래서 두렵고 떨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반열에 나를 옮겨 심으신다. 나는 죄를 심었으나 하나님은 안식’(3)을 거두게 하신다. 그래서 은혜 아닌가. 바벨론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정죄하는 몽둥이’(5)로 쓰이는 혁혁한(?) 공로가 있음에도 그것은 인정되지 않으시면서 말이다.

아마도 이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많은 경우 구원의 간증을 들어보면 누구 때문에 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라는 얘기를 듣게 된다. 그런데 정작 그가 말하는 누구가 불신자(핍박자)일 경우가 많다. 그럴지라도 누구역시 공로가 인정되어 안식으로 가는 기차에 무임승차(無賃乘車)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바벨론이 그렇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이스라엘처럼 대접받을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가장 기초적인 진리를 다시금 되새김질 해본다.

[바벨론 장송곡]이 신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겁도 난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 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94.18)기에 망정이지 만약 이방 나라들처럼 외면(유기, 1.24-32)하셨다면 나 역시 음부 저 밑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이스라엘이 노래하는 슬픈 노래를, 바벨론에 예고된 장송곡(4-11)을 듣고 있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 노래’(4a)를 부르는 자 되는 은혜를 받을지언정 그 음악을 듣는 자 되어 슬피 우는 그런 인생이 되지 않기 위해 내가 서야 할 땅(1-4a), 아니 나를 그처럼 세워주실 영광의 회복을 향한다. ‘여호와께서’(1,3,5,22,24,32)라는 은혜의 발판만을 밟으면서 말이다. ‘이제’(7,15)는 정말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23b)하심에 따라 살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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