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수르 방정식(사 10.5-19)

20200724(묵상)

  

 

 

앗수르 방정식

Isa. 10.5-19

  

   본문 관찰

 

   앗수르 사람은 내 진노의 막대기요

   내가 그를 보내어 명령하여 하려 하거니와

   그의 뜻은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내 손이 이미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에 미쳤나니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일을 다 행하신 후에 앗수르 왕을 벌하시리라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내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온 세계를 얻은 것은

   그러므로 파리하게 하시며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하루 사이에 소멸되며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그의 숲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능히 계수할 수 있으리라

   

 

진노의 막대기

 

주제파악이 되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어디로 튈까를 모르기 때문에 대책이 없다.

지금 앗수르가 그러하다. 자기가 잘나고 똑똑하고 강력한 힘을 가졌기에 승승장구(乘勝長驅)하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이들은 이유 없이 잘 될 때 그때가 가장 위험하고, 그래서 민감하게 자기를 살피고 돌아봐야 한다는 것을 망각한다. 앗수르는 마치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도구로 쓰였던 나라들처럼 잠시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고 있는 것뿐이다.

이걸 모르니까 이기는 것이 멸망의 시작이 되고 있는 것이다(12,16). 짧은 성공이 영원한 실패를 낳는 원인이 된 셈이다. 그러니 무식한 돌쇠(완장 찬 반장)처럼 잠깐 맡은 칼을 휘두르다가 그 칼 때문에 자멸하게 된다. 때문에 앗수르 파일(file)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하며, 무엇이 승패(勝敗)의 원인과 결과인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앗수르, 네 이놈!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일을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하신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하시리라.”(12)

 

앗수르는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 도구로 차출되었다(7.17b, 8.5-8a). 하지만 조건은 잠시 세내어’(7.20) 온 것이다. 그리고 경건치 아니한 나라를 치기 위함이다(6). 그런데 칼자루를 쥐게 되니까 하나님이 주신 약도를 자기 의지와 마음의 생각대로 이해하고서는 엿장수 마음대로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는 일에 휘둘러 버린다(6 7- ). 여기에는 오직 앗수르만이 있을 뿐이다(8-11,13-15).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도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앗수르를 도구로 쓰시겠다고 말씀해 주신 것도 아니니까 승승장구하면 인간인지라 그럴 수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사야의 통찰에 의하면 앗수르는 이미 그 정도는 지나쳐 버렸다.

 

   앗수르의 교만 자화자찬(I message)

   ‘고관들은 다 왕들이 아니냐?(8)

   ‘손이 이미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에 미쳤나니(10a)

   ‘가 사마리아와 그 우상들에게 행함 같이(11a)

   ‘손의 힘과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는 총명한 자라(13)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14a)

 

하나님의 지적은 이것이다. 도끼나 톱이 스스로를 자랑할 수 없듯이 막대기와 몽둥이에 불과한 것이 막대기를 잡은 사람을 움직이려 하고,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어 올리려 하는 것과 같지 않으냐!”(15b, 표준새번역)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므로 앗수르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12) 하신다. 그리고 그 벌의 구체적인 집행이 16절 이하에 나타나 있다: “파리하게 하시며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하루 사이에 그의 가시와 찔레가 소멸되며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병자가 점점 쇠약하여 감 같을 것이라.”(16-18) 어제의 영광이 오늘의 폐허로 바뀐다(7-11,13-14 12,15-19). 정말 순간이다. “하루 사이에”(17) 된 일이다. 결국 흔적만 남아 있다(19).

인간이 자신의 내일을 알면 오늘을 이렇게 살순 없겠지. 이런 유한한 존재가 감히 막대기를 잡은 하나님을 움직이려 하다니 연민의 정을 느낀다. 하지만 이게 어찌 앗수르만의 문제일 수 있는가. 좀 된다 싶으면 없어졌다고 생각했던 교만과 자만과 오만이 슬슬 고개를 들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듣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무엇보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 교훈하시는 진리의 음성듣기를 거역하며 자행자지(自行自止) 하며 멋대로 살아가려고 이런저런 자가발전을 시도한다. 마치 자기 분깃을 달라고 해서 당당하게 아버지의 품을 떠났던 작은아들처럼 말이다(15.11-24).

분명히 경건치 아니한 나라’(6)를 맡겼을 뿐인데 허다한 나라’(7)를 멸절하겠다고 하는, 아니 하고 있는 경우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림이다.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새삼 느낀다. 평범하고 온유하고 겸손하더니 뭔가 하나를 맡으면 어찌된 것이 모두를 다 하겠다고 이곳저곳을 다 기웃거리고, 자기를 통하지 않으면 허다한일 모두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결국은 자신을 섬기고 있는 것으로 자기 배역을 소화하며 살 수 있다는 진단 앞에 두려움으로 선다(사울인생). 앗수르만의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을 잡화상처럼 다 해야 한다는 생각을 정리하고 전문점처럼 나에게 맡겨진 하나에 충실하고 거기에 생명을 걸어보자.

   

 

부스러기 묵상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5a)

 

하나님은 오케스트라 지휘자이시다.

나는 그분의 선택을 따라 하나의 악기를 맡은 단원이다. 바이올린은 그걸 맡은 주자가, 클라리넷을 맡은 자는 그것을 악보와 지휘자의 리드를 따라 합력하면 된다. 앗수르의 문제는 분수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들은 경건치 아니한 나라허다한 나라를 멸절하는 것으로 바꿔버린 순간 하나님도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파리하게 맹렬히 타게 점점 쇠약하여”(16-18), 그것도 하루 사이에 그렇게 만들어 버리신다.

그렇다면 이것은 나을 위해 이기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살아가라는 메시지인가. 하나님이 주신 악보(말씀)를 따라 연주(순종)하라는, 그렇지 않으면 사사기 무대의 여러 나라들처럼, 본디오 빌라도와 가룟 유다처럼, 그리고 앗수르처럼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일에 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호와 더불어 하나님의 자비의 반열에 서게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경건치 아니한 나라를 치게 하는 일에 쓰이는 것이 결과적으로 그 일이 끝나면(6 12a), 그것과 함께 폐기처분 될 일 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앗수르는 그야말로 토사구팽(痒死狗烹, 12)이자, 하루살이와 같은 소모품이자 일회용이다(17). 지금 잘 되는 일이라고 안심하고 있을 수 없고, 내 손에 있고 내 품에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축복이라고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해 보는 아침이다. 무엇 때문에 주어졌고, 무엇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어떤 섭리를 위해서 잠시 나에게 맡겨주신 것인가를 점검하고 통찰하지 않으면 물에 비친 뼈다귀를 보고 그걸 먹겠다고 왕왕거리는 순간 자기 입에 있던 진짜가 자기 품을 떠난다.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위해 잠시 나에게 맡겨주신 것들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것으로 나를 치장하고, 나를 드러내고, 나를 풍요롭게 만들고, 나를 유지하는 것으로 밖에 사용할 줄 모른다면 하루 사이에이 구도는 역전될 수 있다는 경고를 외면할 수 없을 것 같다(12.16-21).

앗수르의 꼴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경건치 아니한 나라’(6)에 자족하지 못하고 여전히 더 크고 많은 허다한 나라’(7)를 끊임없이 동경하고 그리워하면서 살아가고 싶고, 또한 이런저런 틈새를 비집고서 적당한 명분과 이유를 따라 이미 그러고 있는 것들이 전혀 없다고만 할 순 없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이런 기도를 드린다: “목사로 살다가 목사로 은퇴하여 목사로 주 앞에 서게 하옵소서!” 중간에 여러 샛길로 빠지는 경우들을 보면서 언젠가부터 내 안에 간직한 소박한 소원이기도 하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15)는 말씀이 정말 아멘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열어 놓으신 오직 한 길을 걸어가는 순례자로 살아야겠다. 나무 몇 그루 남은 것처럼 하루 사이에그만 초라하게 되어 버린 앗수르의 참담한 몰락이 주는 교훈을 되새김질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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