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지라도 메들리.Medley(사 9.8-10.4)

20200723(묵상)

  

 

 

그럴지라도 메들리(Medley)

Isa. 9.8-10.4

  

   본문 관찰

 

   말씀을 보내시며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셨은즉 알 것이어늘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쌓고 대신하리라

   대적들을 일으켜(아람-블레셋)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그럴지라도(9.12b)

   그리하여도 돌아오지 아니하며 찾지 아니하도다

   장정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그럴지라도(9.17b)

   이 땅이 불타리니

   ‘그럴지라도(9.21b)

   불의한 법령을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벌하시는 날과 멀리서 오는 환난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그럴지라도(10.4b)

   

 

북왕국 이스라엘에 부는 역풍(逆風)

 

이사야는 갑자기 메시지의 방향을 북왕국 이스라엘 쪽으로 향한다.

메시야의 예언을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9.6-7a 9.7b) 해 놓고서 곧바로 다시 심판을 선포하는 것은 그만큼 북왕국 이스라엘이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의 은총과 너무나 멀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과 메시야의 극명한 대조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까지 거부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누구든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멸망의 예언을 성취하는 도구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예외는 없다.

지금 이스라엘은 죄 아래로 너무 깊이 빠졌고, 그만큼 다시 돌아오기에는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이다. 이들의 죄를 보면 가나안을 바로 앞에 두고서 광야에서 쓰러져 간 출애굽 이스라엘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역풍을 어떻게 풀어 가시는지 그 해법을 따라가 본다. 하나님의 시선이 유다에서 이스라엘로 점차 확장되고 있다는 것은 열방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화살이 자신들을 향할 수도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과연 이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을 깨닫게 될까.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적절하게 응징하셨지만 그럴지라도’ “주께서는 진노를 풀지 않으시고, 심판을 계속하시려고 여전히 손을 들고 계신다.”(9.12b,17b,21b, 10.4, 표준새번역) 어쩌면 20년이 넘게 남왕국 유다를 향해 외쳐지는 심판의 메시지를 북왕국 이스라엘도 직간접으로 듣고 있었을 것이다. 잘못한 두 아들을 야단치기 위해 먼저 큰아이를 혼내키고 있으면 작은아이는 얼른 눈치를 채고서 정신을 차려야 옳은데 수 십 년이 넘게 이들은 어느 것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이사야의 시야에 들어온 죄목(罪目)들만 보아도 하나님이 여태껏 기다려 주신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럴지라도(9.8-12)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주께서 말씀을 보내시며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셨은즉.”(8), 그래서 모두가 알 것이어늘 그들이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말하기를.”(9) 하나님이 뭘 하셔도 자신들은 다시 대용품을 찾아 쌓고 대신하리라.”(10) 건방을 떤다. () 큰 이스라엘 아닌가. 결국 그러므로이후가 집행될 뿐이다. 하나님은 대적을 일으켜서 아람을 윗맷돌로, 불레셋을 아래맷돌로 사용하사 이스라엘을 삼키게 하실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럴지라도라고 말씀하신다.

심판은 갑작스럽게, 아무 이유 없이 집행되는 것은 아니다. 말씀을 준행치 않은 것은 하나님을 버린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이 아닌 유사품과 대용품을 찾아 이를 의지하며 살았음을 의미한다. 하나님 없이도 다듬은 돌백향목이 있다는 것, 무너지고 찍히는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굴하고 이렇듯 교만하고 오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서슴지 않는 이스라엘, 결국 말씀을 떠나면 교만으로 향하고, 그렇게 되면 심판으로 추락하는 것임을 이스라엘은 알았어야 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아닌 유한한 충전지를 따라 그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고 위험한 불장난인가를 새삼스럽게 생각해 본다.

 

그럴지라도②③(9.13-21)

 

심판 이후에 하나님은 그럴지라도이심에도 이스라엘은 아직 오히려. 이들은 자기를 치시는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13)로 반응한다. 그러니까 회개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인(sign)을 읽을 줄 모른 것이다. 말씀의 거울에 자신들의 몰골을 비춰볼 그런 영적 실력이 없기에 그렇다. 마침내 심판은 극렬히 타는 풀무불처럼 온 이스라엘을 강타한다. 장로에서부터 젊은이와 고아와 과부에 이르기까지 멸망을 당함으로써 하나님의 긍휼은 중지된다. 지도자의 잘못은 온 유다가 심판의 미궁으로 끝없이 추락하게 만든 요인이다(16). 결국 위에서 아래까지 모두가 불경건하여 악한 일을 하고, 입으로는 어리석은 말만 한다.”(17a, 표준새번역)

참으로 악이 불처럼 타오르고 있고, 이 불길은 온 유다를 태우고 있다(18). 하나님의 진노는 이스라엘을 땔감 삼아 저들과 저들의 죄악을 불태우신다(19-21). “사람이 자기의 형제를 아끼지 아니하며.”(19b) 서로가 서로를 죽이며 함께 망하는 것, 그리고 그 마지막은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21b)는 것,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어느 누구도 피하거나 막을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결국은 백향목’(10)으로 대신해 놓은 것도 다 불에 타 없어지고 말 것인데 인생이라는 게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는 길을 그렇게도 피하려고만 하면서 살아보겠다고 하는 존재인지, 정말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럴지라도(10.1-4)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3a)

 

지도자들의 죄는 좀 더 구체적이다. 결국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서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이루는 자들에게 화 있을진저가 선언된다. 불의한 법을 제정하고 공포하여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에게 심판의 화살이 날아든다. 하나님마저도 불쌍히 여기시며 보호하시는 가난한 자들과 고아와 과부의 것을 토색하고 약탈하고 불공정하게 판결하고 처리했으니 벌하시는 날멀리서 오는 환난의 때’(3)를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지도자들의 부정축재(不正蓄財)는 오늘의 일만은 아닌 것 같다(3b). 불의한 재물이 결국 슬피 울며 떠나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선지자의 외침을 쉽게 읽고만 넘어가지 않아야겠다 싶다. 이것이 자기 생명을 결코 지켜주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경고가 들리는 듯 하다(4a).

   

 

부스러기 묵상

 

내 백성’(10.2)이라는 말이 귀에 번쩍한다.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으로 채워지셨길래 도대체 이 모양 요 꼴의 이스라엘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백성’(1.3 5.13 10.2 10.24)이라 하신다는 말인가. 내 마음 같아서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내가 이들처럼 바닥 없는 심연 아래로 끝 모르고 추락하고 있을 때, 좀 쉽게 말해서 만약 내가 죄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내 백성이라 부르시는 것을 포기하려고 하신다면, 결코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 이렇듯 나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여전히 냉정하고 싶어하는 나의 좁은 마음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묵상이다.

심판하고 계시지만 아직 남은 자의 보이지 않는 행렬은 계속되고 있다. 그 희망의 불씨는 이미 1장의 겨우 남았도다.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8-9)에서 희미하게나마 보았었다. 그래서 심판과 메시야 예언 사이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대상으로 정신없이 요동치고 있지만 그래도 내 백성이라는 하나님의 여운이 고난 속에서 다시금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일단 그럴지라도접속곡(medley)은 네 번 반복되는 것으로 중단된다. 하나님의 분노는 아직 끝나시지 않은 모양이지만 어떻든 비록 손을 들고 계실지라도 북왕국에 대한 진노는 이쯤해서 일단락 된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사실 이러한 경고와 그것에 대한 집행은 전면전은 아니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찻잔 속의 태풍처럼 비록 비바람이 치고 폭풍이 휘몰아쳐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맑고 화창한, 말하자면 늘 반복되는, 그래서 전혀 특별하지 않아 보이는 것, 따라서 북왕국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 메시지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고 지냈을 수도 있다. [늑대소년이야기]처럼 선지자는 언제나 하는 소리고,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산다는 뭐 그런 식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현대인에게 가장 교묘하게 발견되는 아주 악질적인 신앙 버릇이다. 이러한 영적 매너리즘(mannerism)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이제는 어떤 특별하고 자극적인 처방이 아니면,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어지간해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성경도 어느 정도 알고, 믿음생활도 익숙한 옷이 되어 있고,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의무에도 크게 모자람이 없고, 그러면서 교회에 의존하지 않는 교회적인 신앙, 목회자의 돌봄과 섬김 없이 나 홀로 집에서 스스로 생존하는 목회적 삶,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것을 공공연하게 주장하며 사는 공동체적 자세, 이처럼 살아도 그렇게 불편해 하지 않은 이상한 바벨탑을 쌓고 살아간다. 지금 이사야의 청중들이 그러하다. 성전과 제사와 안식일과 절기(1.11-14), 제사장과 선지자(8.2, 9.15), 율법,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흥망성쇠(興亡盛衰) 속에서도 오히려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여호와를 찾는 것을 거부한다(9.13). 온 몸이 병들어 만신창이(滿身瘡痍, 9.14-17)가 되었음에도 말이다.

나 역시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101-4절의 엄중한 국문 앞에 두려움을 느낀다. 혹시 나도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을 미혹하니 인도를 받는 자들이 멸망을 당하는도다.”(9.16)는 말씀에 자유롭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이사야가 그랬듯이 우리시대 목회환경도 결코 만만치가 않다. 그가 심판을 외치는 설교자로 목회할 수 밖에 없었듯이 어쩌면 지금이 그때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사야처럼 외쳤다가는 66장이 끝나기도 전에 강단에서 내려와야 하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이사야처럼 할 수도 없고, 그래도 안 되겠지만 편안하면서도 웃으며 들을 수 있고, 부담되지 않으면서 고개 끄덕일 수 있는, 깔끔하고 산뜻하고 간단한 것이 OK로 통하시는 시대를 산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이사야 식으로 설교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앞에 좀 지루할 정도로 반복적인 심판 메시지이지만 더 들을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이사야의 설교를 듣는 게 불편하고 부담스럽다면 난 이미 하나님의 말씀도 내 방식대로만, 내 입맛에 맞는 것으로만, 하나님과 말씀까지도 그 주도권을 내가 잡고 살아가는 소망 없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정말 겁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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